그러나 내 마음은 기실 이번 한파로만 꽁꽁 언 것은 아니다. 내 마음의 강은 겨울이 오기도 전부터 이미 두꺼운 얼음장이 되어 있었다. 올핸 그 어느 해보다 더 일찍 내 마음에 한파가 몰아닥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알 수 없는 것이 마음 작용이다. 내가 주인이면서도 내 맘대로 주인노릇을 못 하는 것이 이놈의 심통(心痛)이다. 그 마음 잘 알겠다는 듯 복천암 입구 풍게나무는 한파 속에서도 반갑고 다스하게 나를 맞는다. 풍게나무 뒤편에 다소곳이 서 있는 안내문도 그렇게 추운 내 마음에 다스한 불씨 한 톨 조용히 던져준다.
“참나를 찾아 수행 정진하는 도량입니다. 묵묵히 스스로를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부질없는 잡담보다는 아름다운 시간이 되리라 믿습니다. 묵묵히 자기를 돌아보는 시간 되세요.”
마침 동안거 철(음력 10월 15일~1월 15일)이라 월성(月性) 스님(복천선원장)을 비롯한 열 분의 스님은 모두 선방에 들었다. 방선(放禪) 시간이 될 때까지 먼저 도량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복천암은 고패집(‘一’자로 된 집채에 부엌이나 외양간 따위를 직각으로 이어 붙인 집) 양식으로 된 복천선원을 큰 얼굴로 극락보전과 산신각, 나한전, 선원 요사채가 단아하게 이마를 맞대고 있다. 그 중에서도 스산한 내 마음을 오래도록 잡아끈 것은 ‘品’자 형 6단 돌축대였다. 복천선원 마당 밑까지 이불을 개켜 올린 듯 크고 작은 석재로 단정하게 쌓아올린 담장 축대(높이 210cm)는 내 마음의 허드레를 한 단 한 단 켜켜이 장롱 안으로 개켜 올렸다.
선방 댓돌 위에 가지런히 놓인 스님들의 고무털신도 우울한 마음넝쿨을 포근하게 했다. 복천암의 그런 실뿌리가 고려 말 비운의 왕 공민으로 하여금 이곳을 찾아 혼곤한 마음을 맑게 추스르게 했을까. 조선의 풍운아 세조도 조카를 죽이고 얻은 마음병을 씻고자 사흘 동안 이곳에 머무르며 스스로 마음 법을 물었을까.
마음의 한파를 녹이다
사시(巳時) 방선(放禪)을 틈타 월성 스님께 청을 넣었다. 연일 새벽부터 계속하는 입선(入禪)으로 굳어진 하체를 풀기 위해 반신욕을 하다 뜬금없이 손을 맞은 월성 스님은 허물없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추운데 오느라고 고생 많았습니다.”
“결제철인데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큰스님께서는 언제부터 이곳에 주석하셨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한 30년 된 것 같아요. 그런데 나는 큰스님이 아니에요. 어디 밥 얻어먹을 데가 없어 여기 얹혀 있을 뿐입니다.”
“예전부터 마음 아픈 사람들이 복천암을 자주 찾은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복천암에 고승석덕(高僧碩德)이 많이 주석하니까 자문을 받고 마음을 의지하고 싶어 그런 것이 아닌가 싶어요. 세조가 이곳에 와서 기도하고 간 것은 수양대군 시절 훈민정음을 만들 때 인연을 맺은 신미(信眉) 대사가 복천암에 주석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월성 스님은 신미 대사와 세조와의 각별한 인연과 훈민정음 창제에 얽힌 비하인드 스토리를 여섯 가지 정황 증거를 들어 자세히 풀어 놓았다.
신라 성덕왕 19년(720) 의상 대사의 제자인 진정(眞定) 스님에 의해 개창된 복천암은 월성 스님의 강(講)처럼 몇 차례의 중건 과정을 거쳐 신미 스님이 주석하던 조선 세조대에 가장 크게 번창했다. 그것은 세종이 훈민정음 창제를 하던 시절, 승려 가운데 유일하게 집현전 학사로 들어간 신미 대사와 수양대군 시절의 세조가 훈민정음 창제를 주도하면서 깊은 인연을 맺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뒷날 어린 조카(단종)를 무참히 죽이고 왕위에 오른 세조는 병든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안정을 얻기 위해 온양온천에 순행간다는 것을 핑계로 복천암을 찾았다. 그리고 신미 대사를 뵙고 3일 동안 법문을 들으며 기도를 올린 후 마음이 편안해졌다.
법주사에서 복천암으로 오르다보면 중간께 계곡에 목욕소라는 작은 못이 있는데 이곳에서 세조가 목욕을 하고 피부병이 낳았다는 이야기도 그런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또한 오대산 상원사에도 복천암과 흡사한 이야기가 전해오는데, 그 까닭 역시 신미 대사의 청으로 세조가 상원사 복원자금을 대준 뒤 낙성식 때 신미 대사의 청으로 상원사를 직접 찾은 데서 비롯됐다.
월성 스님과 나의 이야기는 다시 복천암으로 돌아갔다.
“스님, 극락보전 옆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왜 복천(福泉)이라 했는지요?”
“그냥 물맛이 좋기 때문이지요. 물맛의 본질은 아무 맛도 없는 것입니다. 쓰지도 떫지도 않고 무맛인 것이 최고로 좋은 물입니다. 300m 암반 밑에서 흘러나오는 복천 샘물은 아무리 가물거나 홍수가 져도 항상 깨끗한 물이 나와요. 지금 복천암에 열다섯 명이 사는데 하루에 꼭 그 열다섯 명이 먹고 살 만큼씩만 물이 나옵니다.”
그러고 보니 사시 공양 때 먹었던 밥맛이 떠올랐다. 조·현미·검정콩· 찹쌀·검은쌀·향미쌀에 기장을 섞어 지은 잡곡밥과 들깨를 갈아 깻잎과 양송이버섯을 찢어 넣고 끓인 감자탕 맛이 맑고 담백하면서도 고소했다. 입안에 착착 달라붙었다. 물맛이 좋아 복천암 밥이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맛있다는 공양주 보살의 자랑이 빈말이 아니었다.
진정 “도는 사람을 멀리 하지 않으나 사람이 도를 멀리 하고, 산은 세속을 여의지 않으나 세속이 산을 여의는(道不遠人 人遠道 山非俗離 俗離山)”것일까.
“어이쿠, 내가 또 내 꾀에 속았네.”
서둘러 말끝을 닫고 선방으로 향하는 월성 스님의 표표한 뒷모습이 알싸한 햇볕이 되어 내 마음의 한파를 녹여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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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영 _ 1986년 서울신문에 시와 2007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각각 당선되었다. 시집으로 『수렵도』, 『퍽 환한 하늘』 ,『아무도 너의 깊이를 모른다』 등과 동화책으로 『아름다운 철도원 김행균』 ,『발가락이 꼬물꼬물』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