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古寺의 향기] 미래의 희망, 미륵불 법주사(法住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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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 미래의 희망, 미륵불 법주사(法住寺)
  • 관리자
  • 승인 2008.03.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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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寺의 향기 / 충북 보은 속리산 법주사

 (1) 법이 머물고

 한 굽이, 두 굽이 감아돌 때마다 속진<俗>의 온갖 번뇌망상을 떨어버리고< > 넘으라는 듯 보은에서 속리산 법주사 가는 길은 열두 굽이의 「말티」고개를 넘어야 한다. 고개를 오르며 뒤 돌아만 보아도 연이은 여러 굽이의 고개길은 숨이 가쁘다.

 성스러운 피안(彼岸)의 세계, 법(法)이 머물고(住 ) 있는곳, 법주사를 찾는 사람에게 인간의 오만과 불손을 버리고 경건한 마음으로 참배하게 함이 아닌가.

 고개 정상에서 바라 본 새로온 세계, 언제 험준했더냐 싶게 평탄한 내리막 길에 평지가 계속이어짐은 사바세계를 어렵게 벗어나 해탈의 세계에 이르는 경지인가 한다.

 일찌기 1,400여년 전, 신라 진흥왕 13년(553)에 의신조사(義信祖師)가 천축(天竺:인도)에서 부처님 경전을 구한 후, 사찰을 창건하고자 하얀 노새에 경전을 싣고서 몇날 며칠을 걸려 이 길을 터벅터벅 걸었을 것을 생각하니, 지금의 우리는 너무 쉽게 이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송구하다. 저때의 열렬한 구도정신과 호법정진을 펼친 선인들의 거룩한 뜻이 가슴에 왈칵 와 닿는다.

 의신조사는 속리산 깊숙이 들어와 현 위치에 사찰을 창건하고 경전을 안치하였다. 부처님 경전<法>이 머물러 있다 <住>하여 사찰 이름을 법주사(法住寺)라 하였다 한다.

 의신조사의 개산이래 법주사는 진표율사를 비롯하여 영심, 도생, 자정, 신미, 수미, 정관, 벽암, 고한, 금오선사로 이어지는 숱한 고승의 출현으로 우리 민족 정신사의 뿌리를 이룩하는데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법주사의 맥박은 중생의 의지처로서 미래에까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저때에 조사스님들이 중생교화의 도량으로서 온갖 심혈을 기울여 이룩한 이 터전을 오늘날 우리는 어떤 뜻으로 찾고 있을까? 유희하기 좋은 관광지, 공원, 수행도량?…, 오늘의 우리를 다시 깊이 생각하게 한다.

 (2) 미륵신앙의 귀의처

 법주사를 중심하여 4km 반경으로 호(弧)를 그리면 북의 관음봉에서 천황봉으로 이어지는 봉우리, 계곡, 흐르는 물, 솟는 약수…… 그 사이 천연(天然)의 평지에 자리 잡은 법주사 ―

 개산이래 200여년 후, 진표율사와 영심(永深)대덕의 발원으로 퇴락된 사찰을 크게 중창하여 미륵신앙과 법상종의 근본 도량으로 면모를 일신한다.

 어느 때, 속리산에서 수도하던 영심, 융종(融宗), 불타(佛陀) 세 스님은 진표율사가 미륵불의 수기를 받고 널리 교법을 선양 한다는 소문을 듣고 율사를 찾아가 법을 구했으나 대꾸도 없었다. 세 스님은 복숭아 나무에 올라가 거꾸로 떨어지며 용맹히 참회를 하니 율사는 그제서야 미륵의 법을 교시하여 주면서 『내가 전에 속리산에 길상초(吉祥草)가 난 곳을 표시하여 두었으니, 그 곳을 찾아 절을 짓고 중생을 제도하라』하였다. 세 스님은 진표율사의 법을 받아 속리산에 돌아와 길상사를 세우고 점찰법회를 열고 중생교화에 힘썼다. 이 때에 지금은 초석만 남아있고 거대한 미륵불이 있는 자리에 용화보전을 짓고 장육 불상을 모셨다 한다. 그런데 여기에서 길상사와 법주사의 관계는 기록이 전하여지지 않고 사찰 규모로 보아 짐작할 뿐이다.

 임진왜란의 병화는 민족의 통한과 함께 법주사의 기록과 당우(堂宇)도 전소시켰다. 현존하는 대부분의 주요 목조 건물은 조선인조 2년(1624) 벽암선사(碧巖禪師)의 3창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3) 찬란한 정신문화 유산

 반도 내륙, 소백산맥의 중앙부에 위치한 속리산 법주사의 행정구역은 충북 보은군 내속리면이다. 속리산 일대는 1970년 3월 24일에 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법주사와 산내 암자는 사적 및 명승 4호로 지정될 만큼 많은 민족문화 유산이 남아 있는 곳이다.

 오늘날 법주사 역사를 더듬을 수 있는 기록은 조선 고종 10년(1873)에 편찬된 사적(事蹟)이 유일하다.

 법주사의 규모는 건물 60여동, 10여점의 석물(石物), 계곡의 70여개 암자가 있었다 한다.

 미륵신앙의 근본도량으로서 영심대사의 중창이후 용화전은 2층 35간의 큰 법당에 금신장육상이 모셔졌으나 조선조 고종 9년(1872)에 파괴되어 초석만 남아있다. 그 자리에 동양최대의 높이 33m의 미륵불이 1964년에 봉안되어 법주사를 굽어보고 있다.

 팔상전(捌相殿)은 5층 목탑으로서 창건당시 부터 있었으나 당시의 규모는 알 수 없고 신라 혜공왕 12년(776) 병진대사에 의해 1차 중수, 임란 때 불탄 것을 벽암선사가 복원하였고, 1968년 해체 중수하였다. (국보55호)

 또한 원통보전, 대웅보전, 사천왕문 등 여러 건물과 석물(石物)들이 있다. 신라 성덕왕 19년(720) 사찰 중창시 작품인 사천왕석 등(보물15호) 쌍사자석등 (국보5호) 석현지(국보64호), 통일신라 시대 마애여래의상(보물216호) 회견보살상, 무쇠솥, 돌그릇 여러개의 비와 부도 등 산내에 수 없이 많다.

 현재 산내에는 수정암, 복천암, 중사자암, 탈골암, 상환암, 상고암, 여적암 등의 암자가 있다.

 (4) 거룩한 법의 계승

 신라의 불교를 중흥하고 오늘날 한국 불교의 깊은 맥이 이어오는 진표율사와 그 유법은, 저때에 신라에서 법주사를 중심으로 꽃 피우고 장엄한 우리 정신문화를 형성하고, 굳건한 민족의 정신을 함양해 왔다.

 세월은 흘러 수 많은 성자가 오고가고, 지난날의 성세는 잃었어도 오늘날 법주사는 거룩한 유법을 빛내고자 선원, 강원에서는 정진과 학업에 100여명의 스님들은 푸른 눈을 밝힌다. 이러한 수행과 열강의 힘은 조계종 종단의 미래에 굳건한 토대를 형성하고 있다.

 진표율사의 유법을 받들어 큰 사명을 펴나가는 주지 월탄(月誕) 스님과 대중스님들에게 기대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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