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억압과 분노
귀로에 고향을 다시 볼 기회가 생겼다. 근심에 찬 여로에서 행복한 순간이었다. 4살때 떠난 희미한 기억을 더듬으며 티벹??순후한 시골에서 태어난 것을 다시 한번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모택동 영도 하에 행복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중공이 얼마라 훈련을 시켰다 끔찍했다.
승려들만 정직하게 말했고 앞날을 걱정했다. 중공은 집단농장을 시작했고 농부들은 분개했다. 고승들은 중공이 앞으로 할 짓을 훤히 내다보고 있었다. 마을 지도자들도 중공식 개혁을 비평하며 탄압이 갈수록 격해진다고 했다.
나는 중공측에다 개혁은 하되 중공에서 하는 식으로 하지 말고 티??사람들의 여건도 참작하라로 했다. 여기는 북경보다 더 무례하고 가혹했다. 그들은 티??사람들을 무시했고 어떤 장성은 병력을 증강해서 무조건 복종시키고 말겠다고 했다. 장래가 암담할 뿐이었다.
그래도 연도마다 수십만이 몰려와 인사를 했다. 북경에 있을 때도 동북 티??사람들이 귀로에 들려 달라고 찾아 왔었다. 지진때문에 자동차 길이 닿으면 꼭 갔고 그렇지 못하면 수행한 고승들을 대신 보내면서 동포들의 적개심이 고조되는 현장을 많이 목격했다. 중공군도 이해 부족과 두려움에 격앙된 상태였다. 나는 그들에게 과격하게 하지마라 타이르고 우리 동포쪽에는 뭉쳐서 평화적인 방법을 모색하고 중공이라도 좋은 점이면 받아들이라고 했다. 이 충고는 바람 뿐이지 모두 폭력이라도 써서 대항하겠다는 심사였다. 북경에 가던 1년 전 보다도 더 적대감정이 사무쳐 희망이란 물거품처럼 느껴졌다.
중공이 새로 정한 국격으로 들어와 그들 사령부에서 며칠, 절에서 며칠 지냈다. 바로 여기가 지구해방위원회가 생길 곳이다. 위원이라고 만나니 모두 중공 지시대로 움직였고 사령관이 조종했다. 여기도 땅을 징발당한 농민들이 분노를 터뜨리는 하소연을 들려줬다. 폭력이 막 터질것만 같았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곳 주민들은 총기를 갖고 있었는데 중공준에 압수당하기 전에 대항할 것은 뻔했다.
여전히 동포들은 몰려와 나를 경배했다. 여러분의 애국심을 보게 돼서 기쁘다고 격려했다. 또 라사에서 잘못해 변방의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다고도 했다. 준비위원회가 활동하면 뭉쳐서 우리 땅이 다시 된다고 위로했다. 중공군 통치지역은 중공과 흡사했고 비관적인 면도 있었으나 한 편으로 한가닥 희망을 기대했다. 중공에는 사찰이 모두 폐허가 됐었다. 승려라고는 노인들 뿐이고, 절에 오는 사람들도 감시 때문에 없었다. 내몽고에는 학승들이 많다고 들었고, 북경서 내몽고 사람들을 만났다. 중공 젊은이들은 출가하기 싫어하고 종교단체로 공산주의 선전을 하고 있었다. 이런 풍조가 중공군 점령지구에 엿보였다.
한가닥 밝은 면은 티??사람들의 강한 신앙심은 섣불리 중공세뇌에 넘어가지 않는 점이다. 북경에는 몽고, 북한, 티??등지에서 온 소년들이 공산주의 집중교육을 받는데 티??소년들은 동화되지 안아 중공이 귀국시키기로 결정했다. 그들 중에는 라사에서 중공에 항거하다 20살도 못돼 죽은 사람, 더러는 인도로 망명했다.
북경에서 실패하고도 이곳 변방에서 또 그들의 공산주의 교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북경하고 마찬가지였다. 몽고에서 온 소년들도 불교를 버리지 않았다. 중공은 생후 몇 주일내의 티??유아들을 데려다 키워 보기도 했다. 이런 예를 보면 우리 젊은이들이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아 든든했다. 중공이 티벹??개통한 군사도로는 다니기에 위험했다. 비가 오고 강이 넘치고 낙석이 심하고, 한 번은 비오는 날 밤에 끊긴 다리앞에서 꼼짝 못하고 있을 때 바위가 바로 옆에 떨어지기도 했다. 중공군은 고함치고 갈팡질팡 하는데, 티??일행은 자동차 안에서 기도만 했다.
그날 낮에는 끊긴 다리를 대강 연결해 도강하려고 우선 사람이 맨 몸으로 걸었다. 자동차도 몇대는 성공했으나 소형 승용차가 빠지면서 다리는 다시 끊기고, 우리는 휴대품을 모두 남겨 놓은 채라서 상당히 고생했다. 라사로 귀환하고 별궁에 가보니, 밖에는 중공군이 야영하고, 안에는 종교행사가 조용히 거행되고 있었다. 우리 정부는 계속 관용으로 중공군을 대하고 있었으며 시민들도 참고 살았다. 시내도 평온했다.
동부의 비극적 생활을 모르는 탓이다. 아직도 그쪽의 분노가 딴곳으로 옮겨지지 않은 셈이다. 준비위원회가 더 악회되기 전에 일을 착수해야 할 것 같았다. 중공은 7시간 떠들던 부수상을 위원회로 파견하니 내가 마중하랬다. 우리 정부는 반대했으나, 체면차릴 때가 아니라고 타이르며 차라리 구슬러서 닥쳐올 문제들을 유리하게 이끄는 쪽이 이익이라고 설명했다.
1956년 4월 개회하자 나는 우리나라를 위한 마지막 희망이구나 싶었고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았다. 구성도 잘된 것 같고, 문서상으로 꼭 공산주의를 실천하라는 대목도 없었다. 티??쪽이 위원이 많아 우리 뜻대로 꾸려나갈 것도 같았다. 중공에서 관리제도를 도입하고 공산주의를 제외한 모방은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이 꿈은 이내 깨지고 말았다. 중공에서 본 제일 고약한 행패만 되풀이 했다. 지구해방위원회와 판첸위원회는 20명 모두 티??사람이지만 무용지물이었다. 이들은 중공측 지지를 위한 중공의 창작이니 중공 제안은 사사건건 찬성 뿐이었다. 여기에다 중공위원 5명을 합치니 회의는 티벹??껍질이고, 중공이 알이였다. 또 그 속의 알맹이는 티벹??중국 공산당 위원회가 흔들었다. 우리는 사소한 안건만 구경하는 들러리였다. 나는 의장인데도 할 일이 없었다.
각본 짠대로 일사분란하게 회의는 끝나고 웃음만 나왔다. 웃고 만 있을 수도 없는 문제가 중공이 나를 티??총수권자로 부추기고 회의를 주재시키는 데 있다. 위원회가 정부 기구를 조직한다니 모두 들고 일어났다. 지금까지 양보만 해 온 분노가 터졌다. 시내에서 공공연하게 항의 내용을 중공 당국에 전했다. 티벹??나름대로의 정부가 있으니 새 기구는 폐기한다는 결의였다. 중공은 일언반구 없다가 우리 정부에 집회금지를 시키지 않았다고 따지고, 나에게 까지 그 항의 내용을 무효로 하고, 앞으로도 그 따위 짓은 하지 말라는 포고를 강요했다. 나는 동의하고 시민은 불복했다.
1956년 초, 지금까지 없던 일이 터졌다. 시민 쪽에서 대표를 뽑았다. 라사는 이들이 움직였다. 정부하고도 충돌하고, 정부는 중공에 대항하는 것은 무모한 자살행위라고 말하면서도 스스로 무력함을 시인했다. 나도 가끔 달렸다. 시민 대표는 듣는 척 양보하고 물러 갔다. 나 개인을 봐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달라이 라마는 상징을 거역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을 보류하면서도 존경했다. 이 불행한 때 그러한 대표들이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이 대표들은 신년 행사를 중공에 항거하는 행사로 변용했다. 시가행진 때 유인물을 뿌리고, 중공은 물러가라고 했다. 티벹??티??사람에게 라고 외쳤다. 항상 하는 순서대로 중공군은 흥분해서 우리 정부에 항의했다. 준비 위원회 결의를 파기하고, 벽보 붙이고, 유인물 뿌린 대표 3명의 명단을 제시하며 체포하라고 엄포했다.
만일 정부가 거역하면 중공군이 직접 체포 심문한다고 통고했다. 우리 정부는 중공에 넘기지 않으려 세사람을 수감했는데 한 사람이 옥사하고 나머지는 절에서 탄원하여 석방한 뒤, 지금도 나와 인도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동부에서도 일이 터졌다. 준비위원회가 발족한 후 중공군 사령관이 지방유지 350명 앞에서 달라이 라마가 티벹??공산화를 준비가 되는대로 차차 하자는데 판첸라마는 곧 하자고 하니 지방유지도 양자 택일을 하라는 통고였다.
며칠 끌다가 100명은 내 의사(意思)라고 따르고, 40명은 판첸을 따르고 남은 숫자는 공산화 자체를 반대했다. 중공군은 알았다며 사진첩, 필기구, 화장품을 선사하고 해산시켰다. 한 달 안에 다시 부대안으로 인솔해 중공군들이 둘러싼 속에서 민주개혁을 즉시 단행한다고 선포했다. 끌려간 유지들은 그 민주화를 너무 잘 알아 보았고 싫다고 했다. 중공군은 보름간 부대안에서 구두로 동의할 때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교육을 받고 그것을 부락에 전하라고 시작 전날 밤 경비가 방심할 때 모두 도망쳤다. 집에도 갈 수 없게 된 이들은 유격대로 변했다. 무기가 필요하니 중공병기를 뺏는 전투가 벌어졌다. 산세를 잘 아는 터에 유격대가 유리했다.
1956년 상반기까지 상당한 공방전이 계속됐다. 나로선 상상밖의 일이었다. 유격대가 중공을 이길 수 없거니와 중공군이 유격대를 섬멸하기도 힘들다. 피차 세월이 가면 시달림은 아녀자만 당하기 마련이다. 나에게는 정말 복잡한 사태였다. 2년전 수상을 사임시킨 때 보다 더 악화된 형편이었다. 평화적으로 해결해 보려던 나의 의도는 허사가 됐고 준비위원회라는 웃음거리로 장래가 암담했다. 업친데 덥친다는 격으로 사람들이 달라이 라마를 의지 하지 않기 시작했다. 동부는 야만인으로 돼 가고, 중부는 폭력에 의지하려 들고, 아무리 말려도 더 이상 듣지도 않았다.
300년간 달라이 라마가 통치해 온 나라가 차마 견딜 수 없게 돼 갔다. 종교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달라이 라마는 이 나라의 지도자인데 백성들의 폭력감정을 제지 시키지 못하고 있었다.
중공은 내가 백성들과 괴리돼서 서로간의 의견대립이 심화될수록 바라는 바이고 저절로 내 통치력도 업어질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 정치면의 지도권이 그렇게 된다손쳐도 종교면의 달라이 라마는 어느 누구도 마음대로 못한다는 문제를 알았어야 했다. 나는 정치적 영향력이 없어져도 종교면 만은 좀더 충실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 나라에 있는한 정치문제를 회피할 수도 없다.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 이때 인도에서 초청이 왔다.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