①일본 유학
앞서 나는 포교사가 되었다가 다시 기도 차 오대산에 갔던 일을 말한 적이 있다. 그때 스님께서 받아주시지 않아서 나는 다시 되돌아 왔다. 그리고 주위를 살펴보니 조용히 생각하니 아무래도 새로운 학문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경도 열라하고 약간의 참선흉내도 보았지만 새로운 학문은 포교상 필요했다. 주위를 돌아보니 모두들 불교전문 학교에 가고 있었다. 범어사의 김 어수, 고운사의 우 덕수, 서 재균, 통도사의 이 서, 김 수성, 강유문씨 등 모두가 그렇다. 그래서 일본으로 유학하기로 마음먹었다. 경도에 있는 임제대학에 들어갔는데 거기에는 이미 유 종묵씨가 와 있었고 그 때 함께 공부하던 한국 스님들은 선암사의 임 취봉, 최 재순, 한 상정, 그리고 나였다. 그 때 시절에 우스운 이야기 하나를 기억나는 대로 적어본다.
그때는 내 나이 설흔 두 살. 한참 바람피우고 장경 열람도 하고 고운사 포교사도 지낸 다음이었다. 묘심사는 기숙사였는데 나 혼자 그곳에서 지냈다. 마루방에 꿇어앉아 지내느라고 눈물도 많이 흘렸다. 그러나 이것을 못 견딜까 보냐 하는 오기로 끝끝내 잘 견뎌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때의 학장은 그 고또오 스이강(後藤瑞岩) 박사였다. 독일유학을 한 철학박사다. 위풍이 당당하고 인물도 잘났다. 노사로서는 정평이 있는 분이며 안목이 있는 것으로 내외에 통하였다. 그런데 매 일요일이면 강당에 모여서 특별강의를 하였다. 약 五백명은 모였다고 생각되는데 그 자리에서 자주 한국 사람을 희롱하는 말을 했었다. 한국 사람은 글을 읽을 때 학생은 끄덕끄덕 좌우로 흔들고 선생은 앞뒤로 흔들흔들 흔든다고 하면 학생들은 일제히 깔깔대고 웃었다. 증도가(證道歌)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강의나 할 것이지 어째서 우리 한국 사람을 건드리는가. 나는 적개심이 솟아올랐다. 그런데 그런 한국사람 조롱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한국의 선지식이라 하는 보조(普照)스님은 견성을 못했다는가, 서산(西山)스님도 별 것이 아니라든가 하고 비방을 하는데는 견딜 수 없었다. 그렇지만 상대가 학장이요, 노사다. 가까이 말을 붙여볼 사이가 못된다. 마음 속으로는 울울하였지만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통쾌했던 一할
그런데 三월달에 개학해서 五월이 되니 마침 때가 왔다. 그때는 「셋싱(接心)」이라 하여 용맹정진하는 때였다. 그리고 독참(獨參)이라 하여 방장화상(方丈和尙)께 직접 대면하여 문답하게 됐다. 대중을 대표하는 입승이 종을 치면 한 사람씩 차례로 방장실(方丈室)로 들어간다. 창문 앞에서 한 번 절하고 안에 들어가서 반배(半拜)한다. 그리고 방장스님 앞에 엎드려서 말씀을 기다리는 것이다. 말하자면 단독 면담이다. 말이 끝나면 줄을 당기고 종소리가 쨍 나면 그만 학자는 물러가고 다음 사람이 들어오는 것이다. 몇 번인가 쨍쨍 종소리가 나고 내 차례가 되었다. 나도 격식대로 一배하고, 또 들어가서 반배하고 노사의 말씀이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고또오(後藤)노사의 말이 떨어졌다. 이 노사의 안목이 어느 정도인가 직접 대질할 절호의 기회다
『자네는 어떤 화두로 공부하는가?』
『저는 화두가 없습니다.』
『자네 왼쪽 손의 소리[隻手(척수)의 音聲(음성)] 를 들었는가?』
나는 노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맹연히 일어나 방바닥을 탁 치며 『악!』하고 벽력같은 할을 했다. 점잖이 앉아 있던 노사가 놀라 벌떡 나가자빠지는데 나는 연거푸 앞으로 한걸음 나가며 또 한번 힘껏 손바닥으로 땅을 치고 벽력같은 할을 했다. 노사는 벌떡 나가 자빠졌다가 일어나 급히 방울을 흔든다. 나는 위세 당당히 방장을 물러나 제자리에 왔다. 내 속에는 당당한 자신이 용솟음치고 있었다. 독일 유학을 하고 철학박사고 학장이고 노사이지만 이 법문에 들어서서는 별 도리 없구나 싶었다. 어째서 급히 방울 흔들기가 바쁘단 말인가. 그때에 방망이 하나를 나에게 안기지 못하였던가.
사실 그때에 전광석화처럼 들어 닥치는 나의 일격 앞에는 설사 임제(臨濟) 덕산(德山)이라도 기겁을 했을 것이다. 그 일이 있은 후, 유나(維那―대중의 기강을 잡는 책임자)가 나를 불렀다.
『그대가 참선을 했는가? 깨친 바가 있는가?』『좀 깨달은 바가 있다.』
『그러나 노사 앞에서 그렇게 하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에서는 방장 앞에서 그렇게 소리 지르는 법이 없다.』하며 나를 책망해 왔다. 그러나 유나의 이런 말씀에 굴할 내가 아니다.
『법이 그런거요. 본래 그렇게 되어 있소.』나는 위세당당 해부쳤다. 이번에는 유나가 사정조로 나왔다.
『앞으로는 주의하고 그런 일이 업으면 좋겠다.』나도 그쯤에서 타협을 했다. 『잘 알았다.』했다.
③是法平等(시법평등)
그 일이 있은 뒤 나를 둘러싸고 많은 사람이 모여들었다. 모두가 장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다. 하는 말이 『야 조군, 대단하다. 참말로 깨달았대……. 놀랍다.』하며, 혹자는 무섭다고까지 말을 한다. 또 깨달은 사람이라고 모여들어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고 내 손을 만지기도 하였다. 장하다고 악수 홍수도 받고 차도마시고……한동안 사람들이 찾아와 야단이었다. 나를 마구 추켜세우는 것이다. 그 무렵에 내 나이 또래의 아다찌(足立)라는 학생이 있었는데 나와 아주 친구가 되었다. 어느 암자의 주지를 하고 있었는데 나의 말이라면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해서 정말 나에게 충직한 벗이 되었다. 어딜 가나 함께 가고 크고 작은 일은 모두 대신 해냈다. 내가 덕도 많이 보았고 고마운 친구였다.
그 일이 있은 후 고또오 학장은 법상에 오르면 꼬박꼬박 선문제창(禪門提唱)만 하였다. 다시는 한국 사람이나 한국 스님 조롱을 하지 않았다. 참 통쾌했다. 일본선(日本禪)만이 제일이고 한국은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썩은 자부심을 단단히 혼내준 셈이다. 지금 생각만 해도 통쾌 통쾌다. 그러나 한편에 나에게 충고를 해주는 사람도 없진 않았다. 유 종묵씨의 경우 나에게, 너무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런 말에는 지지 않았다.
『그런 말 하지 마시오. 그것은 중생이 하는 소리요. 진리는 무가애(無罣碍) 무가애요. 무유공포를 모르시오?』 『그렇지만 저쪽은 노사가 아닌가. 초학자가 그러면 안 된다.』 『무엇이 초학이요. 是法平等無有高下[이 법이 평등하여 고하(高下)가 없다]라 하지 않았소. 그런 말들 그만 하시오.』 나를 위해서 해주는 간곡한 충고였지만 나는 사정없이 뻣댔다. 사실 법으로 봐도 추호의 허물도 없고 나 자신을 돌이켜 봐도 추호의 허물도 없고 나 자신을 돌이켜 봐도 조금도 거짓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 한국 사람을, 그리고 우리 선조사스님들을 조롱하던 콧대를 박살낸 것이 얼마나 속 시원한지……나는 걸릴 것이 없었다.
그 후는 저분들의 살림살이 밑천을 다 본 터이라 내 속이나 차리고 조용히 공부나 했다. 그러다가 二년이 지나 통도사 학교를 부흥시킨다고 빨리 들어오라는 독촉을 받고 더 있어서 뭐하겠나 싶어 돌아왔다. 이것은 나의 젊은 시절의 만용의 한 토막으로 웃어 넘겨주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