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거룩한 진리(사성제)가 인간을 그 바탕으로부터 개조하고자 한 의도는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의 성격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었을 때, 부처님께서 인간의 괴로움과 고뇌(苦惱)가 어떻게 해서 설립하는가를 고찰하여 그 원인을 추구한 十二인연(因緣)이었습니다. 十二인연은 존재의 기본적인 구조를 열두 가지로 구분하여 계열화(系列化)한 것으로 불교의 근본 교리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 十二인연을 차례로 고찰하고 다시 그것을 역순(逆順)으로 고찰한 뒤에 인간이 인간의 조건인 괴로움에서 해탈하기 위해서는 이 十二인연을 고찰해야 한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이것을 연기설(緣起說)이라고 하는데 이 연기설은 불교의 근본교리로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 고찰하는 것입니다. 연기설이 자신을 위한 것임에 대하여, 이것을 쉽게 남을 위해서 설한 것이 네가지 거룩한 진리인 사성제입니다.
「비구들아, 연기란 무엇인가. 비구들아, 무명(無明)을 반연(緣)하여 행(行)이 생기고, 행을 반연하여 인식(識)이 생기고, 인식을 반연하여 명색(名色)이 생기고, 명색을 반연하여 〔눈· 귀· 코· 혀· 몸(身=肉體) 뜻(意=心)등의〕여섯 가지 대상〔六處〕이 생기고, 이 여섯 가지 대상을 반연하여 감촉(觸)이 생기고, 감촉을 반연하여 감수(感受=受)가 생기고, 애욕(愛)이 생기고, 애욕을 반연하여 집착(執着=取)이 생기고 집착을 반연하여 존재(有)가 생기고 존재를 반연하여 생(生)이 생기고, 생을 반연하여 늙음과 죽음과 근심(愁憂)과 슬픔과 고뇌(苦·惱)가 생긴다.」
이와 같은 연기는 다시 차례로 무명이 없어지면, 행이 없어지고, 행이 없어지면 인식이 없어지고, 인식이 없어지면 명색(名色)이 없어지고 명색이 없어지면 우리의 감각기능이 파악할 여섯 가지 대상이 없어지고, 그 대상이 없어지면 감촉할 것이 없어지고, 감촉할 것이 없어지면 감수할 것이 없어지고, 감수할 것이 없으므로 애욕이 없고, 애욕이 없는 곳에 집착도 존재도 생도 없어져 끝내는 근심과 슬픔과 고뇌가 없어진다는 정연한 논리를 전개합니다.
이같이 논리적인 연기에 비하여 四성제는 논리적임과 동시에 실력적이며, 이 실천에 더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논리에 그치지 않고 실천에 중점을 두고 있는 점이 사성제의 본질이며 十二인연의 연기설(緣起說)에서 볼 수 있는 인간의 본질을 개혁하고자 하는 의도가 거기에 있습니다.
부처님의 전기에 의하면 부처님께서는 성도(成道)하신 뒤, 명상에 잠겨 스스로의 깨달음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이 때 부처님은 十二인연의 연기의 도리는 매우 어려워 세상 사람들이 이해하기가 어려울 뿐 아니라 이것을 설하였을 때, 도리어 세상 사람을 혼란에 빠트리지 않을까 걱정을 합니다. 이러한 부처님의 고민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만, 여하튼 그 때, 범천(梵天)이 나와 부처님에게 사뢰기를 그래도 알아듣는 몇 사람은 있을 것이니 그들을 위해서라도 설해 줄 것을 간청하였습니다. 또 만약 그나마 설하지 않는다면 세간은 더욱 타락할 것이라고 범천은 말합니다. 범천의 이 같은 청을 듣고서 고안(考案)된 것이 이 四성제입니다.
四성제의 내용 가운데서 괴로움의 내용, 즉 고성제에 대해서는 지난 7월호에서 언급을 하고 경전의 말씀도 인용하였으므로 지금은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괴로움의 원인 즉 고집제(苦集諦)에 대해 경전의 말씀을 듣기로 합니다. 부처님께서 처음으로 四성제를 설하신 것을 초전법륜(初轉法輪)이라고 하는데 이 초전법륜을 다룬 전법륜경(戰法輪經)은 이렇게 설하고 있습니다.
「비구들아, 윤회전생(輪回轉生)으로 이끌고 기쁨과 탐욕을 수반하며, 이르는 곳마다 즐기고자 하는 갈애(渴愛)는 괴로움이 생기는 원인에 관한 거룩한 진리〔苦集聖諦〕이다.
또 비구들아, 갈애를 남김없이 떠나고 없애고 버리고 벗어나 집착이 없어지는 것은 괴로움을 없애는 거룩한 진리〔苦集聖諦〕이다.
또 비구들아, 바른 소견〔正見〕,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행동〔正業〕, 바른생활[正命], 바른정진[正精進], 정법을 바르게 기억하는 것[正念], 바른 선정[正定]이라고 하는 여덟가지 바른 길[八正道]은 괴로움을 없애는 길에 관한 거룩한 진리[苦滅道聖諦]이다.
불교는 이와 같이 괴로움의 원천과 그 성질을 가르칠 뿐 아니라 그 종결(終結)과 그 종결에로 나아가는 길까지도 제시합니다. 즉 四성제의 앞의 둘, 고성제와 고집성제는 고(苦)의 원인과 성질을 논리적으로 규명한 것이며, 뒤의 둘, 고멸성제와 고멸도성제는 실천입니다.
부처님께서는 四성제를 설하신 다음, 부처님 자신은 첫째 四성제가 그릇되지 아니한 진리임을 논리적으로 바르게 알고, 둘째 그 논리를 따라 적절한 실천태도(實踐態度)를 취하고, 셋째 그 실천을 다하여 이론과 실천이 일치하여 체득함으로써 비로소 부처가 되었다고 설하셨습니다. 이것은 불교의 가르침을 먼저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그 다음에 그 이론을 따라 바르게 실천하며 그리하여 최후에 그 실천이 완성되어 이론과 실천이 일치하였을 때 이상적인 인격 즉 부처가 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여기에 서구의 많은 사상가들이 인간의 본성은 바꿀 수 없다고 한데 대한 반론(反論)의 근거가 있습니다. 또 「올―덴 베르그」가 불교는 인간을 괴로움에서 해방시키고자 하면서 괴로움만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고 한 말이 불교의 한 단면만을 본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올―덴 베르그」는 불행하게도 四성제의 앞의 둘, 즉 고(苦 )의 원인과 성질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만을 보았지 다음의 둘, 괴로움을 없애는 실천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대사상을 대표하는 한 예로 「까뮤」의 작품들에서 보이는 부조리(不條理)에 대하여 「무니엘」이 지적한 말을 여기서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니엘」은 「인간이기 위해서는 부조리를 살지 않으면 안 된다고 결의한 인간의 끊임없는, 그리고 집요한 의지」를 「까뮤」는 말하고 있다고 했습니다만, 이 의지가 현대사상 특히 실존철학(實存哲學)의 의지라고 한다면 그 의지는 노상 절망 할 뿐이며, 또 그렇게 「까뮤」의 작품들은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앞에서 四성제를 살펴본 바로는 극한 인간의 의지가 머리를 돌려 四성제의 진리를 체득하고 실천한다면 「까뮤」가 「시지프스의 신화」에서 「부조리한 인간은 해방된 인간이 아니며 포위된 인간이다」고 한, 그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고 따라서 해방된 인간이 될 것입니다.
여기에 현대사상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불교는 어떠한 사상을 갖고 있으며, 어떠한 존재의 의미가 있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해답이 있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