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님의 학문과 사상을 논한다는 것은 아직 시기가 이른 것 같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스님의 높은 학덕을 경솔히 다룰 계제도 아니기에 여기서는 스님이 남기고 가신 법음을 되살려 보는 데 그치고자 한다.
스님은 잘 알려진 사실대로 어려서 이미 기초학파의 마지막 거유인 면암 최익현 선생의 문중에서 한학을 통달하시고 불문에 들어오셨다. 한학이라고 하면 한문이나 통달했다고 생각되어지는 경향이 있으나, 기실 스님은 유교경전인 사서삼경을 중심으로 13경을 두루 편람하셨고 그 중에서도 노장 사상과 역경에 관하여 해박한 지식과 일가견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하여 노장은 공부하려는 일반 지식인들이 한 그룹을 형성하여 1974년 부터인가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강의실을 빌려 매주 한번 강의를 해 주시기로 했다.
그때 장자의 남화경과 선종영가집을 함께 강론하셨는데 당시에 필자는 그곳에서 자주 뵙고 남화경과 영가집을 썼는데 장자의 글귀를 그냥 외우시고 판서를 하시곤 하셨다. 그때 스님의 그 기억력과 박식에 감탄을 하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여하간 스님께서 유.불.선 3교에 통달하셨다는 말을 그때 확인할 수 있었으나 유교 중에서도 성리학쪽 보다 역경과 더불어 장자의 남화경을 더욱 좋아하시고 그에 대한 관심이 깊으셨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것은 아마 장자의 사상이 불교사상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다른 어느 중국사상보다 깊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 되어진다.
특히 스님께서는 장자의 “지인은 자기가 없고 신인은 공업이 없으며 성인은 이름이 없다.”라는 말에 언제나 도와의 합일을 강조하셨다. 즉 지인이나 신인이나 성인은 바로 절대적인 행복을 달성한 사람이다. 그는 세간사의 잡다한 구분을 초월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와 세계, 아(我)와 비아(非我)의 구분도 초월하였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행복하다. 그는 도와 합일되었기 때문에 자아가 없다. 도는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도 하지 않는 일이 없다. 도는 아무 것도 하지 않기 때문에 공적이 없고, 성인은 도와 합일되었기 때문에 공적이 없고 천하를 다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다스림은 백성을 그대로 있게 두고 자기의 타고난 능력을 충분하고도 자유롭게 발휘할 수 있도록 한다. 도는 이름이 없기 때문에 도와 하나가 된 성인도 이름이 없다. 이와 같은 장자의 성인관을 가장 높이 보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스님께선 결국 장자도 역시 부처님의 세계에 미치지 못하고 있다고 보셨다. 그리고 장자나 그밖에 제자백가의 사상을 인용하여 말씀하시더라도 그 뜻은 불교를 알기 쉽게 이해시키기 위한 방편이었다.
2.
스님은 흔히 대학승이라고 부른다. 때로는 교학승이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이는 아직 불교 교단의 선교에 대한 이해가 확연하지 못하고 피상적인 이해에서 오는 것 같기도 하다. 또한 스님께서 신화음경을 번역하시고 사집과 보조법어를 번역하신 계기로 인하여 교학의 대가로 불려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스님의 이러한 해박한 경전의 지식과는 다르게 오히려 선을 말씀하시는 경향이 많으셨고, 실제로 선사의 기풍을 간직하시기도 했다.
스님께서는 관법을 많이 말씀하셨다. 특히 정관, 환관, 적관을 공.가.중.상관으로 자세히 설명하시고, 부처님때로부터 천 여년이 지나니 사람들의 근기가 약해져서 여러가지 분별심과 나쁜 지견을 일으켜 깨달아가는 법에도 여러가지 방법이 더해갔다. 참선법이 가장 체계화되고 조직화된 것은 중국 당나라때인 대혜스님 당시라고 하겠다. 대혜스님은 참선의 가장 착실한 방법으로 화두를 보라고 가르쳤다. 화두는 온갖 분별과 지견이 끊긴 알맹이 법이다. 조사들은 이 화두를 뚫어내고 깨친 것이다. 화두를 보는 간화선 밖에 화두를 보지 않고 참선하는 묵조선도 있다. 교리적으로 들어가는 관법은 묵조선과 일맥상통한다. 참선은 반드시 화두를 보는 간화선이어야만 한다고 고집할 것은 없다고 본다. 교법에 의한 관법으로도 깊은 도리를 깨칠 수 있으며 묵조선법으로는 깨친 조사가 실로 많다. 그것은 중생 근기가 각각 다르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선에 대한 태도도 중생 근기에 맞는 것에 역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간화선만이 꼭 참선으로 보지 않으므로 교에 의한 공부도 관법으로 묵조선과 일맥상통한다고 보시고 있는 것이다. 이는 확실히 선에 대하여 전통적 보수성에 입각한 선맥보다 오히려 근기에 맞는 공부방법을 역설함으로서 개방적인 모습을 볼 수 있다.
스님께서 보조선사와 육조단경을 번역하시었는데 이는 선교 일원사상을 잘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스님은 선이나 교나 모두가 불성을 찾아들어가 깨치는 것임에는 변함이 없다고 보신 것이다. 선이나 교나 모두가 한 부처님의 두 개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는 부처님의 말씀인 것이다. 여기에 어디 둘이 따로 있을 수 있을 것인가? 그러기에 스님께선 어느 하나를 고집하시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스님께서 조선사의 입장에서 전통적인 납자의 제접을 어떻게 하셨는지 필자는 알지 못하고 있다.
여하간 우리는 이제 스님께서 선교일원의 사상을 간직한 것으로 보여짐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참선법문은 금학리에 비유하고, 교리는 이에 비유하여 삼짐에 불과하다. 인생에 가장 귀한 것은 정법을 만나는 일이다. 정법을 만났으면 결코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 금생에 해탈문중 큰 보배를 꼭 잡아야 한다. 라고 말씀하시어 참선문을 높이 보고 있기도 하다.
3.
끝으로 우리는 스님의 사생관을 살펴보고자 한다. 이 세상에 사람으로 태어난 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삶과 죽음이다. 불교에서의 생사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 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고 계신다. 마음은 생사가 없다. 마음이란 것은 나온 구멍이 없기 때문에 죽는 것도 또한 없다. 본래 마음이 나온 구멍이 없음을 확연히 갈파한 것을 도통이라고 말한다. 도인, 성인은 굳이 오래 살려 하지 않는다. 죽는 것을 헌 옷 벗는 것이나 한가지로 생각한다. 세상사람들은 옷을 자기 몸으로 안다. 그러니까 죽는다. 그러면 도인이나 성인은 무엇을 자기 몸으로 아는가 몸밖의 몸,육신 밖의 육신을 지배하는 정신, 시공이 끊어진 자리, 그것을 자기 몸으로 안다. 부처님이랑 바로 이 자기를 가르쳐 주기 위해 오셨다. 이 세상 한 마당 삶이 꿈이란 걸 가르쳐주기 위해 온 것이다. 우주의 주체는 나다. 내가 우주를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생사는 본래 없는 것으로 죽는다는 것은 이 육체를 옷으로 여기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옷을 훌쩍 벗어버리려는 그 마음의 나온 자리가 본래 없는 것을 알 때 영원한 삶이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하나의 꿈이다. 이 꿈을 꿈인 줄 알면 거기 삶도 죽음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지금까지 탄허스님의 학문과 사상이라는 제목으로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으로 개괄적으로 해석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어로 표현된 것일 뿐이다. 본래 도는 언어를 떠난 것이요, 형체도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