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오돈수인가, 돈오점수인가?]
성철큰스님이 종정으로 계실 때 돈오돈수를 말씀하셨다가 큰 낭패를 당하셨습니다. 대부분 보조 스님 이후 깨침의 경지는 돈오점수지 왜 돈오돈수냐시며, 심지어 그 분의 제자 되시는 환속한 속가 어느 분에게서는 '스님은 깨치셨느냐?'는 말씀까지 들으셨으니까요!
큰스님이 말씀하신 돈오의 '오'는 해오가 아니라 증오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것도 증오의 제일 마지막 단계를 이름하신 것이고, 이런 경지에서는 닦는 것이 있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다시 말해 '닦을 필요가 있는 깨침'은 '아직 깨친 것이 아닌 것'이지요! 그러니 점수가 필요한 '오'를 가지고 함부로 남 앞에서 '깨쳤다 소리하지 말라'는 것이 돈오돈수를 말씀하신 큰스님의 속뜻이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분들이 자꾸 '해오'를 '완전히 깨친 것'으로 착각해 돈오점수를 말씀하시니 큰스님도 여간 근심이 깊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부처님만이 가지신 능력인 18 불공법에 보면, 무부정심(無不定心)이란 것이 있습니다. 부처님께선 항상 선정에 들어 계시므로 일상 어느 행동 하나 선정을 여읜 것은 없다, 는 뜻입니다. 바로 이것이 닦을 필요가 없는 돈오돈수의 경지입니다.
평소 안 뛰어 본 사람에게는 십리 길도 먼 길이지만, 매일 수십리를 뛰는 마라톤 선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마라톤 선수가 아침에 일어 나 십리 길을 뛰는 것은 그냥 일상사입니다. 뛰지 않는, 훈련 안 된 분들에게나 고통인 것입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경지는 처음이나 나중이나 똑 같았습니다. 처음에는 깨달음의 내용이 깊지 못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 진 것이 아니라, 처음이나 나중이나 깨달음의 깊이는 일여(一如)하셨던 것입니다. 오히려 중생의 근기가 아직 성숙되지 못하셔서 설법의 수준을 낮추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세월이 지나면서 깨달음의 깊이가 깊어졌다, 또는 전에는 답을 못했던 질문에 답을 한다, 하는 것은 닦을 것이 있었던 깨달음입니다. 이전의 깨달음은 완전치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해오의 한 소식만 가지고도 증오의 깨달음을 모두 이룬 듯, 수행을 멈추며 오도송을 읊고 윤회는 끝났다고 온 천하에 말씀하시는 분들이 적지 않은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큰스님이 비난을 무릎쓰고 돈오돈수를 그처럼 주장하신 이유도 바로 여기 있다고 생각합니다. 해오의 깨달음을 가지고 '깨쳤다'라고 하지는 말라, 는 것입니다.
닦을 바가 있는 깨달음은 사실은 깨달음이 아직은 아닌 것이니, 섣불리 견성했다며 남의 스승 노릇하려 들지 말라는 경책의 뜻이 숨어 있는 것입니다. '깨치고 닦는 것'이 아니라, 정말 깨치고 나면 닦을 것이 없는 것, 즉 '닦을 바가 없을 때까지 닦여진 것'이 증오의 경지입니다.
적어도 깨침의 경지는 그만큼 함부로 생각할 게 아니오, 그만큼 겸허해야 하는 것이 수행자의 마음가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저같은 범부에게는 사실 돈오돈수니 돈오점수니 하는 것보다는, '점오점수' 가 가장 제격인 것 같습니다. 단박에 깨칠 것도 닦을 것도 없는 그런 경지는 언감생심이라! 저는 감히 꿈도 꾸지 않습니다. 또는 점차 닦더라도 단박에 깨친다는 것도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살아가며 일상사에서 조금 깨닫고, 그 작은 깨달음을 생활 속에 조금씩, 그리고 점차적으로 실증해 가며 보리의 싹을 피워 나갈 뿐입니다.
그것이 저같은 범부에게는 딱 알맞는 수행 체계이며, 또 그러다 보면 금생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반드시, 저에게도 부처님과 같은 대각의 인연이 오지 않겠습니까? 저는 그렇게 살아가고 싶습니다.
불자님들,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그냥 '점오점수'하지 않으시렵니까???...
이 종린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