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에도 단계가 있다]
우리는 흔히 '깨쳤다'라고 하면 부처님과 똑같이 깨달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깨달으면 부처'라는 말대로 그 분은 '부처를 이룬 것(成佛)'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깨닫는다고 그 즉시 성불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서 말하는 깨달음을 얻는 이와 부처님의 경계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것은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깨쳤다고 모두가 다 부처는 아닌 것입니다. 마치 우리 일상 생활에도 모든 것에 등급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호텔도 일반 호텔도 있고 무궁화 다섯 개 짜리 특급 호텔이 있는 것처럼, 비행기 좌석도 이코노미가 있고 VIP 석이 있는 것처럼, 자동차도 소형이 있고 대형 고급차가 있는 것처럼, 의사도 의대를 막 졸업한 분도 있고 전문 경력만 수십 년 된 분이 있는 것처럼, 깨달았다고 모두가 부처님같은 경지는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깨친 분 중에도 퇴락하는 분도 계시고 깨친 분 중에도 지혜가 밝지 못하고 원만한 삶을 살지 못하는 분도 계시는 것입니다. 그 분들의 깨침이 아직은 미완의 깨침이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같은 완전한 대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잘 알아야 합니다.
깨달음은 크게 해오(解悟,이치로 깨닫는 것)과 증오(證悟, 실지로 몸으로 증명되는 깨우침)의 두 가지가 있고, 각각의 경우도 깨달음의 깊이에 따라 여러 단계로 나눠집니다.
해오는 증오에 들어가기 전의 단계입니다. 해오의 단계에서는 아직도 번뇌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을 멈추거나 소홀히 하면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범부의 경지에 떨어질 수 있습니다.
증오는 이런 퇴락이 없습니다. 다만 증오의 세계에도 깊고 얕은 단계가 있어 증오의 첫 단계에서 맨 마지막인 구경각에 이르기까지에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요된다고 합니다.
보통 증오의 첫 단계까지 오는 데에도 일 아승지겁이 걸리고, 이후 증오를 완전히 하는 데까지 다시 두 아승지겁이 소요되므로 흔히 성불하는데는 삼 아승지겁이 걸린다고 하는 것입니다(화두선에서는 화두 깨치는 순간 이 삼아승지겁을 뛰어 넘어 바로 성불의 경지에 이른다고 하지요).
무착보살같은 분도 해오의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고, 세친 보살 같은 분이 겨우 증오의 초지에 이르렀다고 하니, 완전한 깨달음이란 얼마나 어렵고 험한 길인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조사 어록이나 선문답에서 보이는 '깨쳤다'는 것은 대부분 해오에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많은 깨친 조사스님들이 산에서 안 나오시고 탁마를 하시거나 저자 거리에서 만행을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깨쳤다는 이야기가 한 스님의 일대기에 한두 번이 아니고 여러 번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육조 스님만 하더라도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처음 한 소식 크게 깨치시지만, 구경의 깨침은 오조 홍인 스님을 만나 가르침을 듣고서야 마침내 이루시게 됩니다).
깨달음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그러니 깨친 분들에 속지 말고, 우리 스스로는 그 어떤 소식을 얻었다 하더라도 함부로 아는 체 하지 맙시다.
아무리 큰 깨달음 얻었다 하더라도, 부처님 깨침에 비하면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한 것! 나의 공부가 끝난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무얼 좀 알았다 한들, 부처님의 그 광활한 오도의 경지에 비하면 우리가 깨달은 것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저 부처님 무량광명을 잠깐 쬔 것에 불과할 뿐, 우리는 깨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깨침의 소식이 올 때마다 우리가 할 일은, 남에게 알리고 내 경계를 자랑하며 중생을 어리게 볼 것이 아니라, 오로지 스스로를 살펴보고 자중하며, 그저 오늘도 내일도 일체 중생을 섬기고 공양할 뿐입니다.
우리 모두 부처님께 작은 정성 공양 올립시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이 종린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