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 사상은 한 부처님 사상이지만 역사가 흐름에 따라 논사[學者]들의 주석과 해설이 다양해지고 또 그에 따르는 중생들의 근기가 다양하여 이들에게 설득력 있는 표현이 불가피하게 요청되었다.
이와 같이 불타의 사상에 주석과 해설을 달리 하는 논사들이 많이 나타남에 따라 교단의 분열이 있게 되었고 그에 따르는 교도들의 분열도 불가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것을 이른바 부파불교(部派佛敎)시대라고 부르며 동시에 후세의 대승불교에 비하여 그 교리의 설명과 실천이 극히 소극적이므로 이를 또한 소승불교라고 후대 학자들이 이름을 붙여 불러 왔다.
그러나 이들 부파불교 시대는 이론불교를 발달시킨 시대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왜냐하면 사실상 이 시대에 극히 소승적이지만 대승불교가 나타날 수 있는 모든 기본사상은 이때 거론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불교에서 경(經) 율(律) 논(論) 삼장(三藏)이라고 할 때 논장은 이때에 저술한 서적들이 효시가 된 것이다. 지금도 우리가 소중하게 여기는 소승논장(小乘論藏)격인 품류족론(品類足論)과 식신족론(識身足論) 등 육족론(六足論)이 엄연히 전해오고 있다. 이를 보더라도 이 시대에 얼마나 학구열이 많았는가를 가히 짐작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도 충분히 연구되어져야 할 것이다.
이들 육족론의 사상은 A.D. 四세기경 세친보살(世親菩薩)이 소승론의 대표격이라고 불리는 구사론(俱舍論)을 저술할 때도 기본적인 근저가 되었던 것이다. 특히 심식(心識)사상을 예로 하더라도 원시불교에 비하여眼識 耳識 鼻識 舌識 身識 意識등을 매우 적극적으로 분류하였다. 그리고 우리 인간의 심성도 매우 합리적으로 설명하였고 이른바 심리의 작용[心分]설도 품류족론(品類足論)등에 정연하게 설명하여 있다. 동시에 大衆部의 根本識등의 사상은 후세에 아라야식(阿賴耶識)을 중심한 라야연기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 부파불교 또는 소승불교의 심식사상을 중심한 인과사상과 윤회사상으로는 인간의 현실생활과 사후의 윤회사상을 합리적으로 설명하는 데는 그 이론이 매우 부족하였다. 여기에는 항상 대혁신적인 사상개혁이 필요로 하고 있었으며 동시에 소승의 사상을 대승적으로 개혁해줄 대논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던 중 A.D 四世記頃(佛滅九百年) 북인도 간다라(Gandhara)국의 수도인 푸루사브라(purusapura)에서 부친인 코시카(KausiKa)와 모친인 비린지(virinci)의 부부사이에서 무착(無着:Asanga)이라는 대성자가 탄생하였다. 무착은 대소승의 저서를 많이 남기고 이론가로 유명한 세친(世親:vaubandhu)과 비린지발바(virincivatsa)등三兄弟中맏형으로서 일찌기 깨달은 바가 있어 부파불교의 하나인 화지부(化地部)에 출가 하였다.
그는 성품이 대근기였으며 머리가 명석하여 열심히 수도하는 동시에 소승의 경론(經論)은 물론 대승의 경론까지도 탐독하였다. 여기서 대승의 교리라고 할 때 무착보살보다 약 三百년전에 출세한 용수보살이 지은 논서등이 포함된다. 무착보살은 소승불교의 사상을 다 연마하였으나 마음에 흡족하지 못하고 고민한 끝에 심지어는 자살까지 기도하게 된다. 요행히 빈두로(pindola)아라한에 의하여 구제받는 등 사상적인 방황이 극심하였다. 그는 결국 미륵신앙을 통하여 안식처를 얻고, 일광정(日光定)이라는 선정을 많이 닦아 훌륭한 道의 경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상과 같이 철두 철미하게 수도함과 동시에 대소승의 교리를 연구한 무착보살은 우연히 아유다국(阿兪陀國)에 이르러 유식사상의 기본이 되는 해심밀경(解深密經)과 능가경(楞伽經)등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기서 그는 라야연기(賴耶緣起)의 진리를 크게 깨닫게 되며 종래의 부족한 불교사상을 대폭적으로 개혁하게 된다.
무착보살은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부파불교등 소승불교의 기본적인 이론을 대승적인 유식(唯識)사상으로 개혁한 것이다. 우선 심식사상의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소승불교는 우리 인간의 마음을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 의식등 육종으로 분류하여 설명하였다. 그리고 第六의 의식(意識)이 중심하여 인간생활이 실현되며 사후(死後)에도 윤회의 주체가 되어 다음 생(生)의 과보를 받게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의식은 우리의 경험의 세계에서도 의식불명등 단절이 많은 심체(心體)로서 영원부단한 윤회의 주체로 인정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다시 말하면 소승의 업감연기론(業感緣起論)에 있어서 업력이 과보를 초래할 적에 그 업력을 싣고 갈 주체가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현실생활도 불타의 유심(唯心)사상을 충분히 설명하는데 부족하였다. 또한 우리의 마음이 움직이는 데는 객관[境界]이 우선한다는 색본주의 (色本主義)는 더욱 유심사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상과 같은 소승불교의 소극적인 이론을 대승적으로 보완하는데 공헌한 분이 곧 무착보살이다. 다시 말하면 무착보살은 유식사상의 창립자이다. 물론 경전에 없는 사상을 자의로 창립한 것이 아니라 불타의 근본사상에 입각하여 정연하게 이론화한 것을 말한다.
그는 첫째로 소승에서 말하는 안식, 이식, 비식 설식 신식등 전오식(前五識)은 인간이 오관을 통하여 객관계를 감수하는등 단순한 정신생활의 마음의 체성으로 생각하였다. 그리고 제 육의 意識은 인간의 내심에서 나타난 사유생활의 마음으로 과거를 회상하고 반성하며 미래의 계획등 사유정신의 근본체로 인정하였다. 그러므로 전오식을 통활하고 명령하며, 또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나타나는 정신생활과 더불어 심지어는 꿈속에서 방황하는 내심까지도 의식의 작용으로 생각하였다. 그 밖에 소승에서는 감히 생각지도 못하였던 제 칠 말라식(第七末那識)과 아라야식을 더 첨가하여 중생의 무명계(無明界)와 일거수 일투족이 오직 식에 의하여 전개된다는 유심도리를 효과적으로 이론화한 것이다.
즉 제 칠 마라식은 중생이 현재도 죄를 짓지만 최초에는 무엇이 무명을 일으켰으며 삼계에 윤회토록 하였는가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되는 마음의 체성이다. 다시 말하면 말라식에 의하여 아집(我執)과 법집(法執)등 근본무명을 일으키게 되며 이로 인하여 세세생생 업을 지으며 윤회하게 된다는 것이다. 다음으로 제 팔 아라야식(第 八 阿賴耶識)은 앞에서 말한 칠종의 심식(心識)을 관장하고 지속시키는 생명의 주체이다. 이 식에 의하여 우리의 정신생활은 물론 육체적인 행동도 나타나며 모든 인과법도 전개된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소승불교의 색본주의에 비하여 이는 완전한 유심주의인 것이다.
유식이라고 할 때 식은 전체의 식을 칭하기도 하지만 그 비중을 논한다면 제 팔 아라야식을 말한다. 그러므로 아라야식의 이름을 따서 라야연기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 識은 또 우리 인간의 생활을 관장하고 현실생활을 창조하는 주체가 됨과 동시에 사후의 현실과 과보까지도 받는 주체가 되기도 한다.
이상으로 간단하게 무착의 사상을 소개하였다. 역사적으로 볼때도 소승은 너무나 실유(實有)사상에 치우쳤고, 이들 실유사상을 타파하기 위하여 용수보살이 中道的 空思想을 내세웠다. 그러나 후세에 공사상을 추종하는 학자들이 용수의 근본사상을 망각하고 치우친 공사상에 몰두하므로 심지어는 허무주의적 입장에까지 몰고 간 위험이 뒤따랐다. 이를 시정하여 유(有)와 공(空)을 모두 흡수하여 진실한 중도사상을 창안한 것이 바로 유식사상이다. 즉 라야연기의 근본취지는 중도적 진리에 입각하여 생활하도록 가르치는데 있다.
이와 같이 무착은 종래의 사상을 총정리하여 유식사상을 창안한 것이다. 그의 저서로는 섭대승론(攝大乘論), 현양성교론(顯揚聖敎論), 대승아비달마집론(大乘阿毘達磨集論) 등이 있는 바 연구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다음으로 무착의 대를 이은 것은 바로 그의 친동생인 세친(世親)논사이다. 세친은 그의 형인 무착에 의하여 대승에 귀의한 뒤 구사론 등 소승교리를 전술한 것에 못지 않게 유식사상을 연구하였다. 그는 무착의 섭대승론 등을 총정리하여 유식삼십론(唯識三十論)과 대승백법명문론(大乘百法明門論)등 을 저술하였다. 현재 유식사상을 대부분 五位 百法으로 설명한 것도 이에 의한 것이다. 사실상 무착과 세친은 교리발달사적으로 가장 중요한 시기의 인물로서 이들의 논리를 연구하지 않고서는 대승교리를 논리적으로 설명하기에는 힘들 것이다.
세친의 논서중 유식삼십론은 중국의 규기(窺基)법사가 일만가지의 진리가 一字에 포함하고, 일천가지 교훈이 一言에 구비되어 있다(萬象合於一字千訓備於一言)고 극찬하였듯이 모든 유식사상을 三十領에 다 담은 명문이다. 그러나 세친의 삼십론은 너무나 어려워서 일반 대중은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이에 대한 많은 주석가(註釋家)가 나오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에 가장 훌륭한 열사람을 일러 십대론사(十大論篩)라고 한다. 호법(護法), 안혜(安慧), 난타(難陀)등 십대 론사는 삼십론에 대한 주석서를 각기 열권씩을 저술하여 도합 백권이 되었다. 즉 세친이 열반한 후 백년간은 이론이 더욱 발달한 시기로서 혹자는 무착과 세친시대의 유식을 원시유식학이라 하고 십대논사 시대의 유식학을 발달유식학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와같은 주석서와 여러 유식서적을 인도에 유학온 현장법사(玄奬法師)가 호법론사(護法論師)의 제자인 계현(戒賢)논사를 사사하면서 수집하여 중국에 돌아와 번역한 것이다. 십대론사의 주석서는 호법론사의 주석서가 중심이 되어 번역되었으며 이때 번역된 책의 이름이 성유식론(成唯識論)이라 이름한다.
성유식론은 무착의 섭대승론과 더불어 유식학연구에 없어서는 안될만큼 五位百法의 유식이론연구에 중요한 저서로 취급되어온 것이다. 이와같은 유식사상을 물려받은 현장의 제자인 규기법사는 유식사상을 이념으로 하여 법상종(法相宗)을 창립하였으며, 해심밀경(解深密經)과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을 위시하여 六經十日論을 소의경론(所依經論)으로 삼았다. 우리나라에도 신라시대의 원측(圓測)법사와 도증(道證)법사 그리고 태현(太賢)법사 등이 대대로 내려 오면서 활발히 연구하였다. 특히 원측법사는 중국에서도 누구에게나 존경을 받는 훌륭한 유식학자였다. 그리고 신라시대만 하더라도 불교를 연구하려면 반드시 유식학을 먼저 연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그 후에도 이것이 전통적으로 내려와졌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너무나 소홀히 한 점이 없지 않다. 이상으로 간단히 유식사상의 흐름을 소개하고 끝을 맺는다.
불교의 근본사상<11> 대승불교편
- 관리자
- 승인 2008.01.2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大乘唯識 思想의 흐름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