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순례기] 중국 5 낙산 대불사, 아미산 만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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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순례기] 중국 5 낙산 대불사, 아미산 만년사
  • 관리자
  • 승인 2008.01.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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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국토 순례기 (중국사찰기행 5) 四川省 樂山 大佛寺와 娥眉山 萬年寺

1991년 8월 3일(토) 개임

어젯밤에도 비가 왔는데 아침엔 씻은 듯이 갰다. 정녕 희한한 성도의 날씨여서 공연한 걱정을 삭혀 주었다.

7시 금후회관 마당에 모인 세미나 회원들은 마치 소풍을 떠나는 가뜬한 차림으로 각각 4대의 버스에 나뉘어 탔다.

성도평야를 달려 10시에 미산(眉山)에 도착, 북송(北宋)의 대문호 소순(蘇洵)과그 이들 소식(蘇軾 : 蘇東坡)과 소철(蘇轍)의 사당인 삼소사(三蘇祠)에 들어가 그 영상에 재배를 올렸다. 워낙 소식(蘇軾)의 옛집이라 짐짓 구석구석을 두루 살피고 연못가의 동파 좌상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특히 교묘히 꾸민 목가산당(木假山堂)이 퍽 바자로웠다.

진작 문화혁명 때 개개졌을 줄로 알았는데, 손을 덜 탄데다 걸맞게 간수된 아담한 삼소사 (三蘇祠)였다. 뒤꼍의 대숲 길을 걸으며 『적벽부(赤壁賦)』를 응얼거리니까 남경사대 상국무(常國武) 교수가 따라 읊는다. 음은 달라도 성조가 비슷해 자못 흥겨웠다. 비림(碑林)에는 거의 복사의 복각이었지만, 그런대로 솜씨가 호젓해 진적 못지않았다.

거기서 나와 다시 버스로 12시 반에 낙산(樂山) 대불사(大佛寺)에 도착, 자그마치 75m의 대불좌상을 우러러 보기 위해 사다리 계단을 오르내리며 보아하니 하도 엄전해서 합장도 잊고 감탄했다. 능운산(凌雲山) 기슭의 바위 벼랑을 통째로 깎아 쪼아내길 무려 백년만인 서기 803년에 완성했다는데, 두상의 지름이 10m인 대불이다. 문득 우리나라 월악산 입구의 균형 잃은 미륵상이 상기되어 지레 머리가 숙었다. 더욱이 민강과 청의강과 대도하의 3강의 범람을 막기 위해 조소해서 영험을 보았대서 더했다.

2시 대불사 찬 청에서 점심을 들고 동파루(東坡樓)를 거쳐 문화혁명 당시 인민 시성으로 받들린 두보를 숫제 반동과 지주로 매도하고 이백으로 바꾼 문제의 저서 『이백과 두보』(1971년간)의 저자 곽말약(郭沫若)의 고향이 저 강 건너라서 하염없이 바라다보았다.

이윽고 산마루의 13층 백탑(白塔) 법당 앞에서 예불을 올렸다. 그런데 관광객은 줄을 이어도 예불자는 드물다. 소지와 분향하는 이가 없어 다소 안쓰러웠다. 대불사에서 내려와 청강의 유람선을 타고 낙산 건너로 가다가 강심에서 5분 동안 쉬어 대불의 참모습을 바라보며 사진을 찍으란다. 한결같이 합장을 하며 탄성을 올린다. 실로 거대한 대불은 거룩하였다.

배에서 내려 6시 반에 아미산(娥眉山) 호텔에 도착. 7시 식사에는 국수가 나와 요기를 하고 여지(荔枝)를 들고 내일의 아미산 등반을 등반에 대비해서 일찍 잠에 들었다.

1991년 8월 4일(일) 개임

엊그제 남경사대 종진진(鐘振振) 교수가 자못 걱정이 되는 듯 3천 미터가 넘는 고산이니 노사(老師)는 호텔에서 쉬라는데, 예까지 와서 천하 명산이요, 중국4대 불교 명산인 아미산을 바라보기나 하다니, 두시『망악(望嶽)』의 결구를 적어 각오를 엿 뵈었다.

그러나 내심에 걸려 발바닥에 비누칠까지 하고 두터운 털양말을 덧신고, 내복에다 윈드자킷까지 입고 차비를 갖추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버스로 3천 미터까지 오른다는 바람에 실소를 했다. 버스는 힘이 겨워 붕붕거리며 10시 2천 미터 지점인 보국사(報國寺)에 잠간 쉬었다가 다시 오르기 시작. 밖의 온도와 차가 있어 입김이 서린다. 게다가 여기부터 포장이 덜된 가파른 S자 길이라 덜거덕 거리기는 해도 산하에 펼쳐지는 운무(雲霧)로 해서 검푸른 상록의 숲이 명멸(明滅)하여 장관을 이룬다. 게다가 고사목(枯死木)이 즐비하여 고산지대가 분명했다.

정상 가까이에서 차에서 내려 케이블카를 타고 올랐다가 다시 조금 걸어서 해발 3,077미터의 금정(金頂)에 다다랐다.

구름과 안개가 범벅이 된 찬바람이 뺨을 친다. 윈드자킷의 아마위를 썼다. 공안원이 입는 솜 오버를 무료로 빌려주는데 구질스러워 아예 사양했다. 햇볕이 따갑게 쪼여 모두 양지 편으로 몰리는데, 나는 금정 법당으로 들어가 삼배를 올리고이어『금강경』을 외웠다. 그리고 나눠준 도시락을 들었다. 여기에도 자본주의의 밀물은 사무쳐 있었다. 온갖 행상이 득실거린다. 심지어 길들인 원숭이를 갖고 나와 기념사진을 찍으라 하는가 하면, 손수 캔 약재를 사라고 조른다.

자유시간이 넉넉해서 이왕이면 정상(3,099m)까지 오르자고 해도 피곤타며 선뜻 나서는 이가 없어 나도 포기치 않을 수 없었다. 알고 보니 종 교수는 젊은 사천대(四川大) 학생과 같이 갔다 왔다고 해서 매우 섭섭했다.

다시 운무가 몰려온다. 아래가 전혀 보이지 않고 마치 산 위에 두둥실 떠서 사뭇 천상에 떠있는 격이었다. 글쎄 비를 맞지 않는 것만 이라도 다행이란다. 딴은 설악산 대청봉에서 종종 맞는 높깊은 산중의 날씨다.

이윽고 다시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는데 여우볕이 쪼여 구름과 구름 사이를 잠간 비친다. 찰나의 기현상이었다. 그런데 아래에서는 소낙비가 몰려온다.

이어 버스로 바꿔 타고 내려오는데 왼쪽 앞바퀴가 터져 질겁했는데, 어쩌면 함께 온 버스는 본체도 않고 달려가 우리는 차안에서 1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타이어를 바꾸는데 잭이 얕아서 바퀴 밑을 파고서야 비를 맞으며 스페어로 갈아 끼웠다. 그냥 앉았자니 하도 무료해서 이백의 『아미산월가(娥眉山月歌)』를 응얼거리니까 옆자리의 종 교수가 이만한 것이 천만 다행이라며 깍지를 껴서 치킨다. 아미산은 이상하게도 초입에나 물이 있고 폭포도 있다. 그래서 소문 보다는 경관이 못해 차라리 우리 설악산만 못하다.

보국사에 내려와서 먼저 온 차와 합류해서 만년사(萬年寺) 주차장에서 내렸다. 우거진 아름드리 삼송(杉松)의 싱그러운 내음이 물씬한 길을 걷자니 불현듯 피로가 왔다. 더구나 우악스런 젊은이들이 남녀(藍輿)와 같은 것을 둘이서 앞뒤에서 어깨에 메고 자꾸 타고 앉아 가란다. 『부요(不要)』를 외쳐도 짓궂게 덤빈다. 그런가 하면 물건을 팔라고 지근덕거리고, 토산품과 약재를 사라고 보챈다. 진작 젊은 행상을 조심하라는 당부가 있어 협낭과 카메라를 챙기고 타박타박 걸어 올랐다. 문득 해남의 대둔사❲大興寺❳입구를 연상했다. 게다가 나무숲에서는 매미소리가 귀를 찌른다. 그런데 야릇하게도 종소리와 같이 들린다.

물어보니 매미가 아닌 비를 부르는 청개구리 소리란다. 따분한 1킬로를 걷자니 웃옷을 벋었는데도 땀이 비 오듯 한다. 내복을 입어서 더하다. 하염없이 『천수경』을 외우면서 오르는데 멀리서 애끊는 원숭이 소리가 들린다. 그래서 가이드북의 극성스런 원숭이 사영을 읽어 더욱 주위를 경계했다. 글쎄 카메라를 날름 채가는 원숭이니 말이다.

실로 지루하기 그지없는 만년사 입구 길이었다. 더우니까 더욱 짜증이 났다. 드디어 단청한 불당이 버텅(층계) 위로 보인다. 덩달아 종소리가 땡땡 들린다. 중국에는 목탁을 치지 않고 항아리와 같은 종을 작은 망치로 친다.

우람스런 무량전(無量殿)에 들어 가보니 청동으로 주조한 거대한 보현보살이 하얀 코끼리를 타고 앉았다. 요란한 장엄으로 그 위엄이 더했다. 남경사대 공손히 합장하고 『반야심경』을 외우고 있어, 나 역시 삼배를 하고 독송을 했다. 일행이 야릇한지 괄목상대(刮目相對)한다.

워낙 중국의 법당은 신을 신은채로 단에 모셔진 불상을 끼고 돌면서 경건히 나들게 돼있어 편할 뿐 아니라 입구에서부터 돌아가게 마련이라 일단 불상 앞을 지나게 되어 있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저만큼 앉아 계신 부처가 아니어서 자연 신심을 돋우고 또한 접근이 쉬워 신심을 자아내게 꾸며졌다.

아미산 정상의 금정에서도 그랬지만 이 만년사에서도 외지의 관광객이 태반이어선지 소지도 분향도 심지어는 고작 쳐다보기나 할 뿐이니 모름지기 사회주의의 모진 굴레 탓인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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