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전강의실] 11.보현행원품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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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전강의실] 11.보현행원품 강의
  • 광덕 스님
  • 승인 2008.01.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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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에 밝은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아무리 무거운 죄라도 참회하면 소멸된다.

 어둠에 밝은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아무리 무거운 죄라도 참회하면 소멸된다.

 

참회업장章

경문
 선남자여, 또한 업장을 참회한다는 것을 보살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내가 과거 한량없는 겁으로 내려오면서 탐내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으로 말미암아 몸과 말과 뜻으로 지은 악한 업이 한량없고 가이없어 만약 이 악업이 형체가 있는 것이라면 끝없는 허공으로도 용납할 수 없으리니 내 이제 청정한 삼업으로 멀리 법계 진수세계일체불보살전에 두루 지성으로 참회하되 다시는 악한 업을 짓지 아니하고 항상 청정한 계행의 일체공덕에 머물러 있으오리다]하는 것이니라.
 이와 같이 하여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면 나의 참회도 다하려니와 허공계와 내지 중생의 번뇌가 다함이 없으므로 나의 참회도 다함이 없어 생각생각 상속하고 끊임이 없되 몸과 말과 뜻으로 짓는 일에 지치거나 싫어하는 생각이 없느니라.


 [업](業 )업장이라 할 때는 업으로 인하여 생긴 장애를 말한다.
 원래 업이란 행위. 소작(所作'의지에 의한 신심의 활동. 의지에 의한 신심의 생활을 의미한다.) 이와 같이 업은 몸과 마음의 활동인 까닭에 업은 몸과 입과 뜻으로 짓게 되므로 신'구'의 三업이라고도 한다.
 어떤 일을 하려고 생각한 것은 의업(意業)이고 그 의지를 신체적 동작이나 말로 표현하여 밖으로 나타낸 것은 신업과 구업이 된다. 업을 의지의 활동인 사업(思業)과 사업 다음에 나타나는 사이업(思已業)의 二종으로 나눌 수 있는데 사업은 의업이고 사이업은 신업과 구업이 된다. 선'악 간에 업을 지으면 그에 상응하는 괴로움이나 즐거움의 과보를 받는다. 이것을 업인(業因)에 의하여 업과(業果)가 생겼다고 한다. 비선(非善) 비악(非惡)인 무기업(無記業_에는 업과가 나오지 않는다. 업을 몇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총체적으로 인간 일생의 과보를 가져오는 업, 즉 인간계나 축생계에 태어나게 하는 강한 힘이 있는 업을 인업(引業'衆生五趣)이라 하고 인간계에 태어난데 대하여 낱낱의 구별을 주어서 개체를 완성시키는 업을 만업(滿業) 또는 별보업(別報業)이라고 한다. 인업의 과보를 총보(總報)라 하고 만업의 과보를 별보(別報)라고 한다.
 또한 업에는 산하대지와 같이 많은 생물에 공통하는 과보를 가져오는 공업(共業)과 낱낱 생류의 신체와 같이 낱낱 생물의 고유한 과보를 가져오는 불공업이 있다.
 다시 업에 의하여 과보를 받는 시기에 대하여 순현업(順現業) 순생업(順生業) 순후업(順後業)의 삼시업(三時業)이 있다. 금생에서 지은 업을 금생에 받는 것은 순현업이고 내생에 받는 것은 순생업이며 그 다음에 삼생이후에 받는 것을 순후업이라 한다.
 이 삼시업은 과보를 받을 시기가 정해져 있으므로 정업이라 하고 이에 대하여 시기가 정해 있지 않은 것을 부정업이라 한다.

 

 

 

1.업장이라는 것
 이 주에서 말한 바와 같이 업은 이것이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다. 행위라면 행위를 하는 본체의 작용이니 행위의 본체가 참진리에 근거한 것이라면 그 행위는 마땅히 영화로울 수 밖에 없다. 그런데도 오늘날 업이라 하면 기피하여야 하는 것이고 소멸하여야 되며, 내지 업보니 업장이라 하여 우리의 생활을 가로막고 생명의 발전에 어두운 그림자로 여겨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업이라는 인간행위가 참된 인간본성, 즉 본원진리에서 벗어난 착각된 자아를 본체로 하는 행위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본자성을 잊고 자성을 어긴 행위는 그 모두가 업으로서 인간본분과 어긋난다.
 인간본분이 원래로 무한하고 원래로 일체와 더불어 조화되고 무한한 창조와 환희가 원래로 거기에 있는 것인데 이러한 인간본성을 어기고 착각을 일으켜 그릇된 자아를 설정하는 데서 문제의 발단은 있는 것이다. 본연청정한 자성을 어긴데서 나온 행위는 모두가 업이다. 이 업에서 나오는 것은 유한이며 변멸이며 대립이며 부조화며 불행과 불안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그러므로 업의 본질을 형성하는 행위 자체는 실로 허물될 것이 없으며 그 행위의 뿌리의 뿌리를 살펴보면 청정자성의 반영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업을 기피하고 두려워 하여 행위를 멈추거나 활동을 회피한다는 것은 이것도 진리에 어긋나는 것이며 업에서 벗어나는 도리가 아니다. 활동이나 행위에 허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착각된 자아를 본체로 삼고 있는 그릇된 지견이 허물인 것이다. 그러므로 지견을 바르게 가지고 왕성한 행동으로 바른 지견을 나타내는 것이 업을 정화하는 것이며 해탈을 성취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청정자성을 미혹하여 망녕된 마음으로 망녕된 자기를 세우고 망녕된 지견을 일으키는 중생의 모든 생각이나 행동은 이것이 업이 되어서 인간을 구속하고 어리석게 만들고 고난과 불행을 가져온다. 먼지를 파헤칠수록 먼지는 크게 일고 먹물은 풀수록 더우 짙어지는 것처럼 중생들의 왕성한 행동들은 어차피 왕성하게 업의 굴레를 장만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지장경에 이르기를 「중생이 자욱 자욱 죄를 짓는다」한 것도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업장이라는 것이 우리의 본분을 구속하고 우리의 활달하고 넉넉한 복을 제한하는 것이므로 업은 바로 죄와 상퉁하는 것이니 업이 소멸될 때 죄가 소멸되고 죄가 소멸될 때 복이 생기는 것이다.

2. 죄란 무엇인가
 망녕된 자아를 집착하는 결과는 인간이 본래로 갖추고 있는 덕성이 올바로 발휘되지 못하는 결과 자비심도 지혜도 어두워지고 가리워져서 삐뚤어지게 나타난다. 자성이 병든 그릇된 상태에서 나오는 중생심이 이른바 삼독(三毒)이니 탐심(貪心)' 진심(瞋心)' 치심(癡心)이다. 이 삼독심이 마음의 주인이 되어 그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튀어 나온다. 이래서 삼업이 형성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성을 잃은 삼독심의 파동으로 나타나는 행동은 그 모두가 죄행이다. 몸으로 범하고 말로 범하고 생각으로 범한다. 무한한 지혜와 자비가 가득하고 일체법'일체중생'일체진리가 자기와 더불어 동일한 진리인 것을 어기는 행들이 나오는 것이니 그 모두는 바로 죄다. 몸으로 범하는 죄로는 대표적인 것이 살생(殺生)' 투도(偸盜)' 사음(邪淫)이고 입으로 범하는 죄의 대표적인 것은 기어(綺語)'망어(妄語)양설(兩舌)'악구(惡口)이며 뜻으로 범하는 죄의 대표적인 것은 탐심'진심'치심이니 이래서 신구'의 三업에서 十악을 짓게 된다.
 도대체 죄란 무엇일까? 그것은 자성진리를 어긴 상태다. 원만청정한 자성을 외면한 상태다. 바꾸어 말하면 밝음을 등지고 어둠을 붙잡고 있는 상태이며 참으로 큰 자기 본신(本身)을 잊고 허망한 그림자의 한 부분을 집착하고 있는 상태다. 이와 같이 죄는 자성을 외면하고 진리를 등진 상태이므로 그 죄를 소멸시키는 방법은 바로 자성으로 돌아오고 진리 앞에 돌아서는 것이 죄를 소멸시키는 근본방법이 되는 것이다. 죄는 어둠이요 자성 진리는 태양같은 밝음이다. 태양 앞에 어둠을 드러내고 어두운 곳에 밟은 빛을 비치는 것이 어둠을 없애는 방법인 것처럼 역시 죄도 자성진리 앞에 순순히 그 모두를 드러내는 데서 소멸된다. 만약 자기의 허물을 스스로 붙들고 어두운 상태를 고집하며 진리 앞에 돌아서 뉘우칠 줄 모른다면 죄의 어둠은 피할 수 없고 죄의 대가도 피할 수 없다.

3. 참회는 무엇인가
 어둠에 밝은 빛을 비추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아무리 무거운 죄라도 참회하면 소멸된다. 만약 죄업을 소멸시키지 아니하면 언제나 가슴 속에 어둠을 안고 있는 사람처럼 그의 마음은 어리석고 불안하고 고통스러우며, 그의 몸과 그의 생활환경에는 부조화와 불행과 액난이 몰아온다. 죄의 대가는 무지며 불행이며 죽음이다. 그러므로 중생은 모름지기 참회하여 죄를 소멸시키고 가슴속 가득히 진리광명과 은혜로운 복덕을 담아야 한다. 죄는 자기가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다. 또 죄인줄 모르고 범한 것도 있으며 알고 범한 것도 있다. 기억에 있는 것, 기억에 없는 것, 금생의 죄, 머나먼 과거생에 지은 죄 등등 가지가지다.
 만약 자기생각에서 기억에 있는 것만을 헤아려 허물로 인정하고 그밖에 많은 죄가 있는 것을 참회 할 줄 모른다면 그는 역시 눈을 가리고 밝음이 오기를 기다리는 자이다.
 참회하는 방법에는 고래로 두가지 방법이 있다. 사참(事懺)과 이참(理懺)이다.
 사참이란 자기가 지은 허물 하나하나를 들어내어 자기의 잘못을 뉘우치고 다시는 범치 않을 것을 다짐하는 것이고, 이참은 죄를 지은 자와 죄의 근본을 비추어보아 죄의 죄상이 끊였고 죄를 진 업이 공한 것을 알아서 자성이 청정한 것을 요달하여 한점의 허물도 보지 않는 이것이다.
 보현행원의 참회는 어떠한가? 경에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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