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가지 사문]
부처님은 아마 말법 시대에 사문을 빙자한 타락한 군상을 예상하셨나 봅니다. 어느 때 왕사성의 영축산에 계실 때 제자 가섭에게 <네 가지 사문>에 대해 말씀을 하십니다.
부처님 말씀에 따르면 사문에는 네 종류가 있는데, 겉모양만의 사문, 겉으르는 그럴 듯 하지만 사실은 남을 속이는데 불과한 사문, 명예와 칭찬을 구하는 사문과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문이 그들입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겉모양만의 사문>은 이런 분들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머리를 깍고 가사를 걸치고 바리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행동과 말과 생각은 전혀 사문답지 못하니, 탐욕스럽고 게으르고 파계를 개의치 않습니다.
<겉으로는 그럴 듯 하며 남을 속이는 사문>은 여기서 한 단계 나아가 말수도 적고 겸허하여 얼핏 보기엔 여법한 수행자 같습니다.
그러나 이런 밖으로 들어난 모습은 오히려 신도들을 속이기 위한 방편일뿐, 마음은 탐욕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어떡하면 시주를 한 푼이라도 더 받고 신도들에게 그럴 듯한 스님으로 대접받을까 하는 생각만 가득 찬 채 작위적으로 여법한 수행을 하는 것처럼 연출하시는 분들이 이런 사문입니다.
<명예와 칭찬을 구하는 사문>이란 계율도 잘 지키고 공부도 열심히 하고 법문도 잘 하시지만, 사실은 마음 속에 명예욕이 가득합니다.
비록 재물욕은 없다 하더라도 오로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계율이요 공부인 것입니다.
<진실하게 수행하는 사문>이란 일체 세상사에 바라는 것이 없이, 열반조차 바라지 않고 오로지 진리를 귀의처로 삼은 채 청렴하고 여법한 수행만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이미 청청한 업을 지으셨으므로 윤회에 얽메이지도 않고 또한 모든 존재의 본성이 열반인 것을 알아 열반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이렇게 <진실한 수행>에 의해서만 사문의 덕행이 갖춰 지는 것이지, <이름만의 수행>으로는 그렇게 될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참으로 부처님의 이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야 할 것입니다. 절에 가더라도, 선지식을 만나더라도 우리의 안목이 있어 이런 진실치 못한 사문들에 속지 말아야 합니다(선지식을 '의심'하는 것과 '식별해 내는 안목'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입니다!).
제 도반 중에도 참으로 훌륭한 스승을 만났다고 환희하신 분이 계신데, 그 분의 스승께서는 나중에 말씀드리기도 곤혹스러운 죄로 검찰에 구속되십니다. 이 분은 중생 교화 차원에서 신도 분의 번뇌(?)를 섭수하셨다고 주장하시나, 범부가 보기에는 시중잡배와 별로 다르지 않은 죄목으로 그런 수모를 당하십니다.
오늘 신문에는 어느 유명 사찰의 주지 스님께서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죄목으로 구속되신 기사가 납니다. 이 분의 스승님은 또한 우리 나라에 존경받는 큰스님이시니, 어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답니까!
또한 이 스님(?)은 법납이 불과 10 여년 밖에 안되시는, 이제 겨우 38 세의 젊디 젊은 스님이신데, 아니 그 법납, 그 연령이면 세속에서도 한창 일할 때요 승가에서도 공부에 불을 밝힐 땐데, 이 분은 출가한 지 8년도 안 되어 유명 사찰의 주지부터 하셨다니 참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속가의 못 난 모습이 절 집안에서도 있었던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정말 다른 분들 보기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겉모양만 사문, 명예만 구하는 사문이 행세하는 것은 결국 우리의 눈이 밝지를 못한 까닭입니다. 우리 재가불자들이 공부를 안 하니 그런 사문들의 행색을 밝혀 내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 분들을 탓하기 앞서 우리 스스로가 부처님 전에 깊히 참회할 일입니다.
불자님들!
부처님의 가르침을 마음에 깊이 새깁시다!
그리하여 오늘 같은 소식에 너무 실망들 하지 마시고, 우리 스스로 더욱 더 정진하여 우리 스스로가 이 세상의 등불이 되어, 못난 분들이 스스로 뉘우치게 하고 어둠을 밝히시기를, 여러 불자님들과 함께 부처님께 발원 드려 봅니다...
나무석가모니불
나무아미타불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이 종린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