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죽어야 자식이 산다]
아이들이 사춘기에 이를 때면 자아 의식이 강하게 싹틈과 동시에 부모로부터의 독립을 시도합니다. 이 때 부모와 자식 사이에는 많은 대립과 갈등이 심화됩니다.
아이들, 특히 아들의 경우에는 아버지와의 갈등이 당연한 것입니다. 대개 아들은 아버지가 우상(偶像)인 경우가 많은데, 아이의 자아가 성숙되기 위해서는 아버지와 한 번은 부딪쳐야 합니다. 아무리 그동안 좋은 부모고 존경하던 아버지라 하더라도, 적어도 한 번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아버지를 뛰어 넘어 봐야 합니다. 그래야만 정말로 아이들은 성숙되는 것입니다.
즉, 부정하던 아버지의 모습은 길고 긴 방황과 부정 끝에 다시 대 긍정으로 돌아 오게 되며, 이 과정에서 아이들의 정체성과 자아는 한없이 눈부시게 성장합니다.
그런데 만약 이런 과정이 아예 없거나 있더라도 부모에 의해 강하게 거부되면은 아이들의 정체성과 자아는 아예 성장을 정지하게 됩니다.
어른이 되어서도 부모에게 의존적이며 부모님의 말이라면 거역을 못하고 쩔쩔 매는 유아적인 성인들의 모습은, 청소년기의 바로 이런 자아와 정체성 확립의 시기를 제대로 보내지 못한 탓에 기인합니다.
이렇게 되면 모두가 불행해집니다. 얼마 전 아버지를 살해한 어느 중년의 대학 교수의 이야기도 이런 원인이 있었을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아이가 청소년기에 이르면, 부모는 죽어야(?) 합니다.
부모가 그 자리에 있으면 처절한 싸움 밖에 날 것이 없습니다.
아이는 부모를 뛰어 넘어야 성장하는데, 자신이 바로 서기 위해서는 부모를 넘어 뜨려야 하는데, 부모가 도중에 떡 버티고 서셔서 피해 주지를 않는다면 전투는 불가피한 것입니다.
여기서 서로를 오해하여 예의에 어긋나거나 섭섭한 언행들이 오고 가면 그야말로 끝장!입니다. 영화의 소재가 되는 이런 부자 간, 또는 모녀 간의 갈등은 다 이런 이유에서 기인한 것이 지나지 않습니다.
또 우리 부모들은 우리 자신의 욕심을 스스로 어느 정도 자제해야 합니다.
내가 잘 나려 하면 나의 자식이 못 자랍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부모가 어느 정도 못 나야 자식이 희망을 가지고 자라나는 것입니다.
내가 완벽하고 내 명예를 높이고 내 사업만 성공하려 들면 자식들은 점점 멀어져 갑니다. 부모가 좀 모자라는 점도 있고 그것을 아이들에게 인정도 하며 노력할 때 우리 모두가 힘차게 성장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부모는 뛰어난데 그런 부모만큼 뛰어난 자녀들을 보기가 그리 쉽지가 않습니다. 모두 부모가 자식의 기를 꺽고 성장을 막았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모님들이 아이를 무척 위하는 것 같은데 사실은 아이의 성장을 우리 자신이 막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을 키우려는 부모는 성장기가 되면 스스로 사라져야 합니다.
이 말은 문자 그대로 멀리 가라는 말이 아니고, 내 입장, 내 욕심에서 사라지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아이의 성장을 앞에서 부딪히거나 자꾸 이끌려 하지 말고 뒤에서 보고 지켜 주라는 이야기입니다.
내 욕심을 조금 자제하고, 그래서 사업이다 연구다 하면서 아이들이 나를 필요로 하는데도 내 시간이 없어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아이의 방황과 고뇌를 인정해 주고, 나도 그 시절엔 그랬다고 격려해 주어 행여나 가질지 모르는 죄책감에서 해방되게 하며, 아이들이 반드시 이 부모처럼 모든 고뇌를 승화 시켜 훌륭한 분으로 자라 줄 것을 믿고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아이들은 힘차고 믿음직하게 자라 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우리 아이들을 위해 나를 죽입시다.
내 욕심, 내 입장에서 모두 사라집시다.
그리하여 한없이 우리 아이들을 섬기고 공양해 드립시다.
아이들은 모두 우리를 찾아 온 작은 부처님들입니다.
우리가 내 욕심을 죽이고 이런 작은 부처님을 섬기고 공양할 때, 우리 아이 부처님들은 어느새 큰 부처님으로 자라나, 일체 모든 중생들의 밝디 밝은 등불이 될 것입니다...
이 종린 合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