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음악
우리의 감정 위를 물결쳐 흘러가는 노래들. 이것이 우리의 마음에 작용하고 행위에 작용하며 사회에 하나의 힘으로 작용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 불교에는 노래가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가. 의식과 수행과 전법과 사회의 교화를 위해서 불가불 개척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에 불교음악 현장의 증언들을 엮어 본다....<편집자주>
1.현실에 대한 자성(自省)을 겸하여
솔직하게 말해서, 아직은 우리 불교음악에 대해 뭐라고 말하고 싶지 않는 심정이다. 자랑할 것은 별로 없고
남부끄러운 일이 더 많기 때문이다.
맨주먹 기관인 불교음악연구원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혼자 북 치고 굉과리 치고 하다가, 76년 4월에 마침내 찬불가 100곡집을 내놓긴 하였으나, 그 중의 태반이,언젠가는 추려서 버려야 할, 그야말로 억지 100곡집이었다.
이어, 금년 (77년)봄에는 역사적(?)인 찬불가 디스크가 몇 장 나왔으나, 그 가운데 하나는 우리네 힘이 달려 [남]의 힘을 빌어야 하는 창피를 겪어야 했고, 우리네 힘만으로 녹음한 음반은 그 의의는 컸으나 그 수준이 미치지 못해 떳떳이 내놓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또 하나, 한국 악단의 중견 성악가 김화용씨의 힘을 빌어 출반된 <불교가곡집>은 서투른 합창연주가 끼어 그 체면이 심히 손상되었고, 편곡 또한 [남]의 힘을 빌은 흔적이 있어 아쉬움을 금치 못하는 바가 되었다.
이같이 [순수]를 지키자니 수준이 달리고, 수준을 지키자니 체면이 말이 아닌 우리네 실태였으나 그런데로 [내일]의 기반을 굳히는 데 적지 아니 공헌한 단체 또는 개인이 아주 없지는 않았다.
그 중에서도 효시는, 테너 김화용(金和勇)씨의 불교음악에의 참여였다. 그의 가식없는 참여는 불교음악의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만일 그의 발심이 진정(眞正) 발심이 아닌 가장(假裝) 발심이었다면, 그의 참여는 하나의 작은 뜻을 가져다 주는 데에 그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 사이, 전문가 특히 저명 연주가의 참여가 전무하다시피한 우리 불교음악계에 그만한 네임밸류를 가지고 서슴없이 뛰어든 그 하나의 사실만으로도 높이 평가할 만한 가치는 충분히 있다.
그러나 만일 참여의 동기가 불순했을 경우, 그 결과는 혼란과 알력을 가져다 주는 구실밖에는 아무것도 하는 것이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한두가지의 과거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음악은 어디까지나 순수해야 한다. 그것을 연주하는 사람이나 창작하는 사람 또한 어디까지나 순수해야 한다. 설사, 부처님 앞에서 합장조차 할 줄 모르는 자칭 불교 음악가가 우리 주변에 나타났다고 하더라도 만일 그의 마음이 순수하다면 우리는 그의 참여를 쌍수를 들어 환영할 것이다.
두번째로, 도선사 관세음합창단의 수차에 걸친 해외연주활동을 손꼽을 수 있으나, 여기에는 약간의 문제점이 없지 않다.
모든 행위는 그 동기가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은 그 결과이다.
동기에서 볼 때, 관세음합창단의 해외진출은 큰 의의를 갖는다. 이조 오백년의 억불정책이 가져다준, 고립과 배타, 은둔, 소극성 등이 오늘날의 중대 과제인 [불교현대화], [불교생활화]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음을 상기할 때, 보다 넓은 세계로 향해 뻗어가려는 의지와 행동은 매우 바람직한 것이라 해도 조금도 과찬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결과론의 입장에서 볼 때 , 한번쯤은 조용히 반성해 봐야 할 문젯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비록 주제가 음악에 있지 않고 상호간의 불교 문화교류, 친선교류에 있었다 치더라도 그 무대가 비공식 무대가 아닌 국제 공식무대였을 경우, 과연 관세음합창단의 지금의 연주 수준으로 국가적인 체신을 잘 지킬 수가 있었겠느냐는 의구심(疑懼心)이 일어나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우리 주변에 깔려있는 숱한 문제점을 우선 가장 가까운 데서 부터 하나하나씩 해결해 나가지 않으면 안될 절대절명의 시점에 놓여 있다. 이 모든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기본 자세를 한 마디로 요약해 말한다면 [양보다는 질을, 형식보다는 내용을 추구하는 자세] 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기복과 양재(穰災) 에 골몰하고 형식적 불사에 급급하던 고려의 불교가 , 역사상 최악의 승려 타락상을 드러내고, 마침내 겉잡을 수 없는 쇠망의 길을 내닫던 사실(史實) 을 너무도 잘알고 있다.
기왕이면, 좀 더 내실을 기하고 실력을 배양하여 우리 한국불교의 보다 승화된 이미지를 이웃나라 불자들에게 널리 심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만일 관세음합창단이 지금 곧 우리 모든 불자들의 참된 아낌을 받는 합창단이 될 수 있다면 내일 당장 어느 나라 어느 고장에 가더라도, 반드시 가슴 뿌듯한 환영을 받게 되리라.
세번째로 내세울 만한 것에 삼보 합창단이 있다. 이 합창단은 관세음합창단과 같은 큰 규모의 연주활동도,동대(東大)합창단과 같은 여건이나 수준도 없지만, 종단내의 사찰 또는 법회 소속의 합창단 중에서 유일한 혼성합창단이란 점에 큰 존재의의가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활동내용에 있어서는 그 어느 합창단보다도 다양한 바가 있다. 76년 봄에 한국 최초로 거행된 불교 노래를 바탕으로 한 결혼식에 참석한 이래 10여회나 불자 결혼식에 참석하였고, 이어서 불자 장례식에서 열반가 등을 비롯한 불교 노래를 불러, 한국 최초의 테이프를 끊었으며 그밖에 소년원, 교도소, 이웃과 지방의 사찰 또는 법회에서 음악법회를 열기도 하고, 노래지도도 하는 한편, 찬불가 책 보내기운동도 이따금씩 전개하여 음악포교에 다대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또 금년 봄에는 비록 자랑할 만한 수준은 못되어도, 순수한 단일혼성팀의 기능으로 영업용 디스크의 한면을 무난히 감당해 내기도 했다.
이 삼보법회합창단과 필적할 만한 것에 서울불교청년회 합창단이 있으나 이 합창단은 아직은 역사가 짧으며 자체회관도 갖지 못하는 불우한 여건속에 있고 혼성구성도 제대로 되지 않고는 있으나, 오늘보다는 내일에 기대를 걸어 볼 만한 합창단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금년들어 피아노도 한대 장만하였고 유능한 음악가를 지도자로 모시게 되었으므로 분발 노력만 한다면, 종단내에서 가장 우수한 합창단이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밖에 그 지역이나 구성요소는 다를 망정, 그 활동내용이나 이미지의 참신성으로 단연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것에 동덕여고 불교반의 연꽃합창단을 들 수 있다. 이 연꽃합창단은 그 연주회수나 노래 보시의 빈도에 있어서는 상술한 어느 합창단에도 못미치지만, 현대불교음악사회의 한페이지를 확고하게 차지할만한 빛나는 공적을 남긴 점에서는 결코 뒤지는 바가 없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이것은, 훌륭한 지도법사(김재영씨)의 탁월한 지도에 힘입은 바가 크기도 하겠지만, 그에 못지 않게 그들의 순수성과 열의가 가져다 준 값진 결실이라고 봐야 하겠다. 찬불가 부재(不在)로 대외연주같은 것은 엄두도 못내던 시기에, MBC, KBS, DBS 등에 출연하여 최초의 기록을 남겼고, 학교단위가 아닌 일개 불교반 단위로 하나의 뚜렷한 전환점을 가져다 주는 뜻깊은 예술제를 두번이나 치루었고, 근자에는 불교음악의 새로운 활로를 제시하는 음악법회<붓다의 메아리>의 점화(點火) 역할까지 해낸, 실로 우리 불교계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는 연꽃팀이다.
이 <붓다의 메아리>는 상기한 테너 김화용씨, 동덕의 김재영씨, 자비의 소리의 반영규씨, 바른불교회의 김래동씨, 국제불교도 협의회의 김안수씨, 등이 순수한 불씨가 되어 발족시킨 전혀 참신한 청소년 음악법회로 이미 두 차례를 치루어 낸 그 만만치 않은 성과로 보아 앞으로 한국 최대의 청소년 법회로 성장할 것이 틀림없다는 중론이다. 끝으로, 지금은 오직 침묵을 지키며 조용히 기본 실력을 기르고 있는 조계사 합창단의 내일의 성장에 기대를 걸며 이 항은 일단 매듭짓기로 한다.
2.내일을 위한 자세
우리 나라의 불교사를 살펴 보면 그 내용면이나 정신면에서 가장 충실했던 것은 신라시대의 불교인 것으로 나타난다. 그들은 불교의 정법을 호지하고 또한 실천하여 국가적인 대동단결을 구현하였고. 그 대융화의 힘으로써 마침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루었을 뿐만 아니라, 숱한 외침을 때로는 창칼 없이 막아내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고려의 불교는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그 정신방향을 설정하지 못하고 형식적인 불사에만 열을 올리다가 마침내 씻을 수 없는 크나 큰 오점을 역사에 남기고 여지없이 쇠퇴하고 말았다.
이 역사의 산 교훈은 그대로 오늘날의 우리 불교에 적용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한걸음 더 나아가 내일의 불교음악의 방향을 설정하는 데에도 큰 교훈이 되지 않을 수 없다.
누구나 체험을 통해 익히 아는 바이지만, 여러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제창을 하거나 합창을 할 때 단한사람이라도 엉뚱한 소리를 내면 즉시에 그전체가 금이 가고 만다.
이처럼 단 한 사람의 불화(不和)도 허용하지 않는 것이 곧 음악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과연 음악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점을 한번쯤은 곰곰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우리 스스로도 수긍하고 남의 나라 사람들도 그렇게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 겨레의 가장 큰 결합의 하나가 「융화단결의 결여」일진대, 우리는 이러한 우리의 뿌리깊은 결함을 시정해 나가는 의미에서도 음악체험 특히 합창체험을 자주 가져야 한다.
어느 법회에서도 볼 수 있는 광경이지만 우리는 그 단순한 정근송 하나 통일시키지 못하고 제멋대로들 부르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이러한 무질서와 불규칙을 그 누구 한 사람도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언짢게 생각하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재작년(75년)의 일이다. 당시 도선사에 머무르고 있던 필자는 때마침 일본 정토진종(淨土眞宗)의 승직자
(僧職者) 일행이 도선사를 방문하여, 큰 법당에서 그들 나름의 독송을 하는 것을 바로 등뒤에서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필자가 놀란 것은 그들의 우람하고 무게있는 음성도 음성이려니와 그 일사불란한 협동심에서 오는 「음악」의 일치였다. 그것은 마치 똑같은 악보를 보고 똑같이 스타트하여 똑같이 멈추고 똑같이 끝나는 철저히 훈련된 합창단의 연주와도 같았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느끼고 생각하고 깨달아야할 것같다. 불음을 전달하는 수단으로서의 「찬불가」도 중요하지만 「하나의 마음」이 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찬불가」가 더 시급하고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우리는 우리의 이웃에 대해서 너무 무관심하고 무성의한 것이 아닐까? 바로 내 곁에 있는 내아내, 내 아들딸, 또한 내 남편, 내 부모 형제를 이해하고 아끼고 같이 하나가 되어 어울리는 일을 외면하는 사람이 누구에게 불법을 전하고, 무엇을 위해「거창하고 허황된 불사를 하며, 바로 이웃의 슬픔을 두고 먼 타관 사람의 슬픔이나 괴로움을 풀어 줄 수 있겠는가.
우리들 불자에게 중요한 것은 「나」보다는 「우리」이며, 「오늘」보다는 「내일」인 것이다. 음악을 통해 더욱이 찬불가를 통해 「우리」를 느끼고, 우리를 확인할 필요가 있으며 「오늘의 주인공」인 나자신보다 「내일의 주인공」인 청소년들을 위해, 우선 먼저 그리고 집중적으로 도우고 이끌어 주고 키워 주는 것이 진정한 불자의 자세이며 또한 뜻있고 값진 불사가 아니겠는가.
기능이나 실력은, 시간과 노력이 해결해 준다. 비록 우리 불교계 전체의 음악 수준이 보잘 것 없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결코 우리 불교계의 내일을 망치는 작용은 하지 않는다.
누누히 역설한 바이지만, 오늘날의 우리의 불교가 고려불교의 과오를 되풀이 하는 불교가 되어버린다면 아무리 불교음악이 성하고 그 기능이 향상되고 그 활동 범위가 넓어진다 해도, 아무런 이익도 아무런 의미도 가져다 주지 못하는 빈 껍데기 불교가 되고 말 것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