옮긴이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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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히말라야는 이름 그대로 영겁의 세월에 눈을 덮은 채 묵묵하다. 그 줄기에 인간이 묻혀 살며 바깥과는 천 년의 담을 쌓고 재미있게 살아 오다가 아주 잊혀져도 감응이 없다. 갈라진 둘 중에 하나가 없어진 월남보다 훨씬 앞서 통째 사라진 나라가 거기 있었다.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 토번(土蕃)이라 나오고 요새 국어사전에는「토박이로 사는 미개한 겨레붙이」라 알려준다. 그 때의 다른 구법유학승들도 이 나라 조정의 후대로 인도에 다녔고, 고구려 원측(圓測)의 저술을 중국에서 이 나라로 전해져 지금까지 이 나라 장경에 빛나고 있다. 역자도 어떤 나라에서 살 때 가구째 집을 이 나라 사람과 주고 받느라 서로의 객고를 풀고 또 어쩌다가 이 책의 저자까지 수월찮게 만나 책도 얻은 지 어언「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저자의 27살 때, 이 책이 출간됐고, 8년이 지난 뒤 저자를 상면했다. 역자는 저자보다 2살 아래고 키도 아래고 얼굴 길이는 그 보다 더욱 짧았다. 그러나 망명 생활에 절은 그의 모습이나, 서울서 천방지축 날고 기며 꼭두새벽에 산정(山頂)의 그의 처소로 들이닥친 역자의 형편은 비슷했다. 작은 나라, 힘없는 형제였다. 저자 <달라이 라마>와 그의 나라 티베트는 옛날에는 우리와도 서로 잘 알고 지냈는데 지금은 우리를 포함한 다른 세상도 왜 그들의 존재를 외면하고 있는가? 달라이 라마라면 신비한 기담(奇談)이 유식으로 통하고, 티베트는 마르코 폴로 때 만도 못해서 유명 무명 글장이의 괴담 무대로 역수입된 우리 주변은 무관심의 대상에도 끼워주지 않는다. 지금 인도의 불교 성지는 티베트의 피난민들이 도맡다시피 신앙열을 사르고 있다. 그 무더위 속에서도 칙칙한 고향 의상으로 차려 입고 구부정하게 움직이며 한 손에 소형 도르래 다라니 틀을 돌리며 입으로는 염불을 하느라 쉴 줄을 모른다. 탑을 돌 때는 향불을 두 손으로 들고 염불하며 불상 앞에서는 그 나라 특유의 오체투지로 망향의 시름을 잊고 살아간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부터 밀교가 있었지만 고려의 불교는 티베트 풍의 흔적을 강하게 전했다. 티베트가 불교와 접하기는 4세기라 한다. 하늘 쪽으로 가까운 땅에서 유목민의 토속적 무속신앙에 겨우 의탁한 때이니 고유한 문자도 없고 군신이 두루 무지해서 걸핏하면 이웃과 쌈질이라 이라크와 중국은 협공할 약속까지 했었다. 3백 년이 흘러 당시 왕조의 5대 치세 때부터 부대끼다 못한 네팔과 중국이 공주를 왕비로 내주며 화친을 맺으니 불교국 왕비들을 위하여 절을 짓고 까막눈도 인도로 유학을 보내 중천축국 문자를 본뜬 국어를 만들어 불경을 번역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그 나라 개명의 효시였다. 인도 말을 모체로 했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다시 되돌려 복역하면 원전이 나올 정도로 잘 되어 현존하는 대승연구에는 지보적 집대성이다. 또 경전을 불상보다 더 위하고 일반 가정까지 경서를 경배의 상징으로 소중하게 여겨 인멸된 역사상 민족들과 비교하면 고도의 문화 민족임이 여실하다. 불교라는 외래사상은 토속신앙과 갈등이 없지도 않았다. 당시 인도불교가 학문 일변도로 고답적인 교학과 그와는 정반대의 인도 정통사상과 아류들의 주술의식이 전염돼 티베트 불교도 교학 연구에 불교 원류 중관사상을 크게 발전시키기도 했으나 한편은 밀교의 타락이 본연의 교설하고는 괴리된 습속으로 스민데다가 공교롭게 천연두가 만연한 때 불교 탓이라 몰아대는 토속신앙의 편승으로 폐불(廢佛), 승도환속(還俗)의 박해를 감수했다. 그래도 변방으로 피했던 왕자들이 출가해서 교세를 재건하고 배불왕조가 무너지자 불교도 그 참에 정화한즉 처음 인도인이 전교한 구파(旧派)가 붉은 모자의 티베트 원주민이 중흥시킨 신파(新派)는 노란 모자를 썼다. 이 중흥의 덕파가 교단의 수장은 관음보살 화신으로 국가를 수호하고 왕생한다는 전통이 됐다. 거기다 몽고의 칸이 그들의 글을 만들어 준 티벳을 따르며 바다 같은 어른이라는 달라이 라마 칭호를 봉헌했다. 두 내륙국이 바다를 그럴듯한 선물로 발상한 사실부터 기발하다. 교세는 점점 인접국을 전법해서 제 5대 달라이 라마는 청나라 황제에게 문수보살 법명을 주며 현재의 수도 라사에는 관음보살의 주처 포타라카의 지명을 딴 포탈라 궁을 창건하고 십만의 승도가 상주하는 사상 최고의 사원에 평균 20년을 수학하는 교육기관도 두었다. 교과에는 인도불교에서 중국 선종까지 망라했는데 소 같은 소를 보지 못해 심우도를 코끼리로 대신했고 수레의 차를 목마라 번역했다니 그 얼마나 외진 나라였나 짐작이 가고도 남으나 그런 곳이기에 산일(散逸)되지 않는 자료들이 발상지 인도불교 연구에 절대적 자료들은 간직할 수 있었다. 한편 원나라의 왕사까지 되며 달라이 라마는 종교와 국가를 교정일치로 돌보았으나 이 책의 저자 바로 위 제 역대 달라이 라마 때는 영국과 소련의 식민정책에 휘말려 짜르황제는 아미타불이고 소련은 서방 극락정토라는 억지도 듣게 됐다. 사실 티벳이야말로 이 책을 집필하게 된 중국 외 소련 몽고 시킴부탄 네팔 인도가 이 나라를 둘러 싸고 불교를 통한 공통점을 갖게 해줬다. 그러나 세상의 번롱질은 허망하게도 너무나 가슴 미어지는 수법을 동원한 결과, 고향에서 억압받는 백성들과 인도로 피난 후, 스위스로 캐나다로 미국으로 받아주는 대로 옮긴 사람들과 불교연구 목적으로 나라마다 소수를 초빙한 경우까지 모두 기약없는 생활이며 인도에 정착한 거의가 집단거주 공동취사 등으로 전통수공예 전수로 몇 만 불씩 모아 성인교육도 백 퍼센트 완료했단다. 망명정부는 입법부를 통한 개헌으로 7년 의무교육과 수복을 필연적으로 가상해서 개인토지 불허 등을 결의했으나 미국마저 중국의 일부와 인정한 땅이고 최근 외신자료는 모택동 제복을 입은 사람 속에 포탈라 궁 예불장면도 너그럽게 공개했더니 망명정부는 즉각 반박문을 냈다. 대만을 지나던 길에 중국지도를 봤더니 우리의 이북을 한국이라 한 색으로 칠했고 티베트는 대만본토와 같은 색으로 통일이었다. 남의 글을 제대로 옮겨 본지 스무 해도 더 넘어 주제넘은 만용에 솔직히 그 때는 이 때보다 철이 없어도 순수한 박력이 오히려 좋았는데 지지은 자질구레한 감정이 설레다가 뒤미쳐 흐지부지라 어중간할 따름이지만 한 젊은이의 담담한 기록이 개인보다 국가라는 굴레, 그리고 그 이름에 기댄 신민의 존망을 애태우며 토로한 체험이니 어처구니없는 전말을 혼자 읽고 이 순간에도 반복되는 인류의 현실들이 어찌 보잘 것 없는 사람과 나라의 과거였다고만 코웃음 칠 수 있을까 싶어 차분히 손댔음을 변명삼아 내놓는다. 멀리 있는 구라파는 일찍이 온갖 험난을 무릅쓰고 티베트 연구에 드높은 빙설을 녹이며 저술을 발표하고 그들과 생활 속에 학문의 보고를 찾아 밝히고 있다. 역자의 바램은 많은 불교인을 자랑하는 우리로서 각 분야에 종사하는 저마다 고루 읽어 느낌이 있어야 하고 각자의 타산지석이 되면 저자에게 회향이다. 원서는 제목이 좀 길어 <The Memories of his Holiness Dalai lama of TIBET: My Land and My People>로 PANTHER간 1964년 판이다. 1950년 중공군이 우리나라를 침공하여 동부지역을 점령했을 때 나와 우리 민족은 무력하고 거의 절망적인 상태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세계를 움직이는 몇 나라와 국제연합에 우리를 위한 중재를 호소하였으나 도와달라는 탄원이 거절 당했다. 티베트의 국방력이란 몇 세기 이전의 이야기다. 우리는 평균화의 길만 믿고 천 년 전부터 인도에서 전래한 부처님 지혜를 따르며 노력했다. 홍교 김일수 옮김 |
머리말
우리의 생활은 신앙에 바쳤고 물질적 해결은 매우 적어 외부의 도움은 관심이 없었다. 그러다가 중공의 무력에 눌렸다.
우리는 명예로운 담판을 바라며 북경에 대표를 보냈으나 중공은 우리 영토를 뺏으려 강제 조약을 체결시켰다. 우리는 협박에 의한 결과를 절대로 인정할 수 없었고 도 거부할 경우 피는 더 흘리겠고 파괴 당할 일이 불가피 함도 잘 알았다. 나와 정부는 우리 민족을 더한 재앙에서 구하려고 옳지 않은 협정이나마 준수하려니 중공은 그들이 만든 약속을 일일이 무시했다.
티베트에서 일어난 참극은 국제 법률가가 위원회에서 상세하게 발표했다. 나는 이 책에 티베트의 생활과 현재의 슬픈 끝장을 좀 더 개인적으로 보여 주려고 한다. 티베트는 종교적 이해가 없이 알기 힘들어, 고통에서 행복으로 이르는 지름길인 불교적 설명도 했다. 나는 부처님의 가르침과 우리 시대 간디가 실천한 비폭력의 철저한 신봉자다. 따라서 우리의 자유를 무력으로 되찾겠다는 방법은 애당초 반대했다.
나의 모든 노력은 중공 사이에 정의와 평화로운 해결을 찾고 설혹 우리 중에 몇 사람이 불쾌하더라도 폭력지양에 최대한 힘썼다. 9년 동안이나 우리 민족을 타이르며 무력으로 항거하지 못하게 말렸다. 그 까닭은 부도덕하고 양측 국가가 황폐할 뿐이다.
그러나 나와 우리 정부의 연락이 못 미치는 동부 지역은 중공에 무력으로 맞섰다. 침략자의 압박을 견디다 못해 우리 민족의 인내심이 터졌다. 이러한 경위를 알기 쉽게 기술하려 노력했고 결론은 독자들이 나름대로 내리도록 맡긴다.
우리 티베트 사람들은 우리를 지배하는 중공의 야만적 처사에 증오를 갖지 않음을 꼭 덧붙여야겠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우리 스스로의 생활을 중공도 포함하여 모두 평화와 우정으로 삶이다. 그러기 위하여 관용과 고결을 높이 사는 세상 사람들에게 호소한다. <달라이 라마>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