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大般열반경은 부처님께서 쿠시나성 아지타바티 강변의 사라나무 숲속에서 열반에 들면서 말씀하신 최후의 설법으로, 열반일인 2월 15일 하루 낮과 밤 동안에 말씀하신 것이라 한다. 그러니 세존께서 이 세상을 떠나면서 남기신 최후 유촉의 법문인 것이다.
사실 그 내용에 있어서도 반야경의 공(空)사상과 大衆部의 心性本淨說을 계승하여 法身과 應(生)身의 二身사상과 常樂我淨을 설하고 있는 것이나 법화경의 一乘사상을 매듭지어, 때에 이르기까지도 성불할 수 없다고 제외되어 오던 斷善根의 일천제마저도 성불할 것을 설한 一切衆悉有佛性의 가르침은 불타 최후 궁극의 설법이라는 점에서, 이 경의 이름은 단순한 열반경이 아니라 大般열반경인 것이며 대승 또는 일승열반경이라 하는 것이다.
敎判上에 있어서도 법화경과 더불어 최후의 법화. 열반시에 속하고 최상의 圓敎를 설한 경전이란 점에서도,좋게 이 경전이 갖는 불교사상 내용상의 비중이나 또 이 경전이 성립하여 불교사상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2] 이 경의 중심이자 특유한 사상은 세 갈래로 말할 수 있으니, 첫째가 佛身의 常住이고 다음은 열반의 常樂我淨, 셋째가 일체중생의 悉有佛性說이 그것으로 이하에 나누어 적고자 한다.
1 佛身의 常住
육체상에 32상과 80종호의 德相을 갖추고, 정신적으로는 十方. 四無所畏. 三念住 大悲 등 十八不共法의 德性을 지니신 석가모니불은 80세를 일생으로 하고 생자필멸의 이치에 따라 사라나무 숲속에서 죽음을 보이었으니 이것이 역사적인 세존의 마지막이었다.
수 많은 사람의 大師主요, 法王이던 석가세존을 잃은 그들은 신앙의 대상을 잃어 의지할바 없고 세간의 안목을 잃어 일시에 암흑세계가 된 것 같았다.
부처님께서는 이같은 일을 예측하시고 임종시에 제자들에게 유언하기를 「나의 입멸후에는 내가 설하여 둔 계율과 법이 있으니 이것을 너희의 스승으로 하라」,「여래의 出世壽는 極短이로다. 육신은 비록 逝去하여도 법신은 常住하니 마땅히 법의 근본이 단절치 않게 하라……여래의 법신은 무너지지 아니하고 세상에 永存하여 단절치 아니 하리로다」,「여래의 수명은 極長하니 왜냐하면 육신은 비록 입멸을 보이나 법신은 영존하나니 이가 그뜻이니라」라고들 원시아함경전의 여러 곳에서 설하고 있다.
그러나 佛滅 후의 佛陀觀은 대개 두 갈래로 나뉘었으니 그 하나는 상좌부계통에서 세존도 인생으로서 불타가 되었던 만큼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역사성을 탈각할 수 없다는 역사적 불타관을 주장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석존은 원래 진리의 權現體라는 견지에서 석존이 법을 체득하였을 때는 인간석가가 법에 계합한 것이므로 불완전한 인간성은 해소되고 오직 절대적인 법의 인격화인 불타뿐이라는 대중부 계통의 초역사적 불타관이다.
이러한 불타관은 불멸후 구체적으로 논하게 되어 생신 법신의 이신설로 부터 三身 四身 내지 十身說로 전개되어 불교교리 문제중 중대한 하나의 과제가 되어왔던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大般열반경에서는 부처님의 법신을 가상적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바세계에 출현하신 부처님의 生身이 곧 法身이어서 항상 계시고 멸하지 않는다는것이므로 육신의 모습에서 나지도 멸하지는 아니하며 한량없고 그지없는 법신을 보게 된다고 누누히 佛身의 상주를 설하고 있다.
본경 제3, 금강신품의 예를 들어보면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선남자여, 여래의 몸은 상주하는 몸이며 깨뜨릴 수 없는 몸이며 금강같은 몸이며……곧 法身이니라」
하니 가섭보살이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그러한 몸을 저는 보지 못하옵고 다만 무상하고 깨드릴수 있고 티끌같고 잡식하는 몸만을 보옵나니, 왜냐하면 세존께서 지금 열반에 드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가섭이여, 그대는 지금 여래의 몸이 견고하지 뜻하여 깨뜨릴 수 있음이 범부의 몸과 같다고 하지 마라. 선남자여 그대는 이제 여래의 몸은 한량없는 억겁동안에 견고하여 깨뜨릴 수 없으며 인간. 천상의 몸이 아니며, 두려워 떠는 몸이 아닌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여래의 몸은……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고, 익히지도 닦지도 아니하며 한량없고 가도 없으며 자취가 없으며 얄음도 없고 형상도 없고 끝까지 청정하여 동요하지 아니하며……」
라고 설하고 있다.
한데 여기서 말하는 生身卽法身의 法身이 부처님의 敎法을 의미하는지 그 이상의 무엇까지도 포함하는지는 명확하지 아니하다.
그러나 원시경전에서 이미 여래 입멸 후에는 「교법과 계율을 의지하라」하심이나 「法을 보는 것은 나를 보는 것이며, 진리가 있는 즉 내가 있는 것」이라는 교법 즉법신의 교리가 있어 왔고 本經의 法身卽生身說이 반야의 二諦說에 근거하긴 했어도 한걸음 더 나아간 실상 궁극의 이론에 도달한 교법 이상의 佛身常住思想을 내세우고 있다고 하겠다.
2 涅槃의 常樂我淨
불교의 이론적인 근간은 제행무상 제법무아 열반적정의 三法印이고 불교냐 아니냐의 판단 기준도 三法印說의 有無에 따라 결정 지어진다. 그리고 三法印說을 조목화한 것이 몸은 부정하다(觀身不淨). 감각은 고통이다(關受是苦). 마음은 무상하다(觀心無常). 존재에는 個我가 없다(觀法無我)는 四念處觀이다.
이 경지에서 본다면 常. 樂. 我. 淨이라는 견해는 불교의 교리일 수 조차도 없게 된다. 그러나 이경에서는 불신의 상주를 설하였고 상주이라면 個體의 존재가 먼저 긍정되어야 할것이고 개아가 있어 상주한다면 그 존재의 당위성은 가치와 보람을 지녀 즐겁고도 깨끗한 것일 수 밖에 없게 된다.
그리하여 大般열반경의 常. 樂. 我. 淨설은 과거의 무상. 고. 무아. 부정의 설에 반대되는 분명히 새롭고 적극적인 열반설로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말하자면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이론을 답파하고 나서 적극적인 實在의 세계를 발견한 것이므로 불교 최고의 이상인 것이다. 즉 무상. 고. 무아. 부정의 관념을 넘어 서서, 요컨대삼법인적인 空觀念의 터득후에, 반야공의 洗練을 거친 연후에 출현하는 새로운 理想境의 實在인 것이다.
이러한 常樂我淨의 실재에까지 이른다면 대열반은 부처님의 입멸을 의미하는것이 아니라 대아 또는 여래의 대명사인 것이며 佛을 取하면 부처에 흡수되고 열반을 취하면 열반에 들고 동시에 범부로 말하면 범부인 그대로인 것이다.
이 경지를 常樂我淨이라 하고 常樂我淨이 있음을 대열반이라 이름하며, 常樂我淨이 없으면 그냥 열반이라고만 한 것이다.
本經 24권에서도 「二乘들이 증득하는 것은 대열반이 아니다. 왜냐하면 常樂我淨의 說이 없기때문이다. 常樂我淨을 대열반이라 한다」고 적고 있다.
3 一切衆生 悉有佛性
원래 계급적인 바라문교에 대항한, 사회적으로 새로운 기치의 사상이기도 했던 불교라는 점을 생각할 때 불교에서 일체중생이 부처의 성품바탕을 지녀 성불할 것이라고 한 설은 너무나 당연하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사실 불성이란 말조차도 바라문 일파의 我思想처럼 무언가 고정적인 我의개념을 연상하게 하는 것으로 大我를 말하는 대승불교적 논리대로 맞지도 않거니와, 부처님께서도 佛性이란 말을 쓰지 아니하였다.
실로 보편적인 一乘의 道로서 어떠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래의 가르침을 믿고, 따라서 수행한다면 모두가 大黨에 이를 수 있다고 한 것뿐이다.
하여간 문제는 불성의 개념내용에 있다. 대열반경이 일체 중생 모두에게 인정한 불성이란 어떠한 것일까 하는 것이다.
本經27권 사자후 보살품에서는 「불성이란 모든 부처님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中道의 종자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중도란 말은 양극단의 중간을 말하는것과 같은 피상적 타협적인 것이 아니라 무어라고 말할 수 없는 有이기도 하고 無이기도하면서 유도 무도 아닌 그런 것이다. 그래서 가섭보살품에서는 「모든 중생에게 반드시 부처성품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집착이요, 부처성품이 없다고 한다면 그것은 허망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으니 도대체 부처성품이라느것은 어떠한 것인가. 비유컨데 모든 중생에게 모두 부처성품이 있다고 한 것은 우리 몸에 생명이 있다는 것과는 다르고,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말과도 같은 것이라 할른지?
이와같이 말할 수도 생각할 수도 없는 불성을 모든 중생에게 주지시키기 위하여 「마땅히 있으므로(當有)」, 「반드시 얻을 것이므로(決定得)」, 「마땅히 볼 것이므로(當見)」, 「퇴전하지 않으므로(不退)」등의 이유를 붙여서 부처성품은 당연히 있는 것이라 하였고, 그것을 실증하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믿고 수행한다면 반드시 체험하리라고 열반경에 서 설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경의 내용으로서 과연 불성이란 어떤 것인가를 알기 위해서는 앞의 化身常住나 열반설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경이 반야사상의 영향하에서 「有의 無」적으로 중생과 불성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과 우리의 보현행원적인 신행을 요구하고 있다는 두 가지를 잊어서는 아니 되겠다.
사실, 一切衆生 悉有佛性설의 근본 의의는 소승 나한果의 증득과 無信. 斷善根의 不成佛설마저도 시정하며 중생 모두의 성불을 설한 열반경의 大주장이란 점에 있다 그리하여 고귀덕왕보살품 이하에서 일천제 성불의 사상이 완성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에서 설하는 일승의 요구에 응한 일천제 성불의 문제를 해결한 세 가지 방법이 있으나 첫째가 이론적 방법으로 비유비무의 불성이므로 하여 일천제 마저도 성불한다는 것이고, 두째는 시간의 개념을 도입한 해석으로 현재는 無信. 斷善根으로 성불이 不可하지만 미래성불을 실한 것이며, 셋째는 불성개념의 확대 해석으로 이미 고정적인 사고 자체를 배격하였으므로 일천제라고 칭할 것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일체의 존재는 佛의 大覺으로 향하는 道程에 있다고 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여기에 완전한 열반 일승교가 성립하는 것이다.
3] 열반경의 이와 같은 사상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일체중생에게 무한의 긍정적 가능성을 제시한 것이라고 하겠다.
원래, 죽음이란 사실과 구원생명과의 조화는 「아함경」이래의 반복되어 온 과제였던 것이 本經에 와서야 佛身 二諦觀에 의하여 해결된 것이니 법신이란 大열반과 일치하는 상주의 본체이고, 상주의 법신을 법신. 반야. 해탈의 三德에 의하여 설명하고, 이 삼덕이 三卽一의 관계로서 불신중에 통일되어 그 내용이 되고 있다 한편 삼덕을 내용으로 하느 불타는 大열반과 일치하므로 열반 四德인 常樂我淨의 주체가 되고 이에 본경의 불신관은 삼덕을 내용으로, 사덕을 속성으로 하게 된다.
그러니 불성과 법신이란 가능성과 開顯性의 相違에 不過하므로 대반열반경의 중심사상은 열반을 매개로 하여 상주불신과 실유불성간에 놓지는 二而不二의 관계를 설한 것이라 하겠다.
다시 말하면 대반열반경의 사상이란 人間佛의 生身을 떠나지 아니하는 法身佛思想이요, 法身佛이 우리 모두의 心性을 여의는 것이 아닌 까닭에 어느 때 어디의 눅든간에 바로 접할 수 있다는 身性思想의 전개라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