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自由와 平和의 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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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自由와 平和의 원리
  • 관리자
  • 승인 2008.01.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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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열반이란 무엇인가

     1 열반은 무한성을 충족시키는 샘물

 지렁이도 밟으면 굼틀거린다는 속담은 깊은 뜻이 담겨 있는듯 하면서도 또한 담담한 말인것 같다. 지렁이는 밟지 아니하여도 굼틀거리고 밟으면 움찍하면서 굼틀거린다. 앞서의 것은 자생적(自生的)인 생활이라서 여유있고 자적한 율동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짓밟고 싶은 충도을 야기 시키기도 한다. 이런 예가 적중하여 지렁이를 밟게되면 조금전의 율동적인 움직임에서 가속된 힘을 가세하여 저항자세로 돌변하는 것이 뒤의 일이다. 여기에서 지렁이의 자유로움과 자기방어의 몸부림을 엿볼 수 있다.

 생물은 생태적으로 자생적 자유를 향유하려는 속성은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이 세계는 어떤 특수 생물의 유일자만이 살고 있는것이 아니다. 유일적 형태를 가지고 있는 동일한 군생(群生)이 사회를 형성하여 살고 있는 것이다. 사회적 집단을 이루고 사는 것은 유일자적 자유라기보다 집단조직의 공생적 장(共生的 場)이 형성하게 된다. 이것은 공존의 원리 즉 삶과 존재의 형평유지의 지속성이 파괴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생명적 힘인 것이다. 공생적 장을 가장 원만하게 활용하고 있는 생물의 집단은 개미들의 세계다. 그들의 사회는 삶을 누리는 부단한 정진이 연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생의 만다라(曼茶羅)이다. 생명의 지밀한 의미가 원융무애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열반이란 의미란 무엇인가. 우주적 생명체의 항일성(恒一性)이 현발(顯發)하는 세계다. 모든 앎을 통털어 깨닫는 세계요, 모든 욕망을 남김없이 극복하는 현장이다. 통털어 깨닫고, 남김없이 극복한 것이므로 「一切의 知者」,「一切의 勝者」가 되는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모든 것으로 부터 절대적이해이며, 형이하학적인 모든 것으로부터 무한포용이다. 인간은 항상 절대와 무한을 추구하고 누리려고 욕망하고 있는 현존적 존재다.

 열반은 이 절대성과 무한성을 안으로 충족시켜주는 자연적 샘물이다. 인간은 하잘것 없는 지식과 쓰잘것 없는 정욕에 깨달려 본래 구유하고 있는 샘물을 발견하지 못하여 언제나 목마르고 배고픔을 당하고 있었다. 이 샘물은 자기의 내면세계에 자리하고 있는 현실인 것이다. 밖으로부터 기갈을 모면하기 위하여 물을 공급하여도 안으로 총족이 다닫지 아니하면 갈증을 면할수 없다. 외형적인 자유는 일시적인 기쁨이다. 내면에서 포만한 자우가 향유될때 평화는 싹트는 것이다. 이 자유와 평화가 불교의 열반인 것이다.

     2 열반은 절대행복이다

 그러나 열반의 뜻이 소극적인 의미론으로 해석되어 죽음이나 또는 적멸을 말하게 되기도 하였다. 유여열반. 무여열반등으로 표현되어 생명적 존재가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남음이 있다」「남음이 없다」등의 전치적 형용구에 의미를 두는 것보다 열반적 존재냐 열반적 비존재인가를 구별하는것이 더욱 의미 있을것이다. 우리의 삶을 열반적 입장에서 살것인가 아니면 열반적 세계를 이탈하고 살것인가 하는것이다. 그러면 열반적 입장은 어떤것인가. 앞서에서 말했듯이 「一切의 知者」「一切의 勝者」가 능동적 상태에서 이룩되는 것이 열반적 존재인 것이다. 여기에는 번뇌가 있고 없고가 문제되는 것이다. 열반이란 우주질서의 항존성을 자각한 자리에 나타나는 「法爾自然」의 세계다. 대각하자가 아니면 누릴 수 없는 응공적 향유성이다.

 그러므로 元曉스님도 열반경종요에서 대멸도(大滅度)라 하였고 또 왜 「대」인가에 대하여 소상하게 주석하고 있다. 형식적 사물. 사상들의 소멸이 아니라 본질적 존재의 담연한 질서이며 모습인 것이다. 존재는 질서를 앞설 수도 없고 질서는 존재를 괴리할 수 없다. 존재와 질서는 「卽是」적인 것이다. 질서는 연기임과 동시에 중도적 실상이다. 존재는 연기의 산물이며 묘용의 모습이다. 이름하여 대멸도라 하였지만 「大自在」인 것이다. 그러므로 「滅卽生」의 이법이 생생하게 현현하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열반은 자재이다. 적극적인 존재현실이다. 「있다. 없다」등의 분별이 아니다. 본래 있음이다. 그러나 무명한 눈앞에 허상의 그림자가 지나가기 때문에 있고 없음의 영상이 뒤바뀔 뿐이다.

 열반의 적극성에 대하여 원효스님은 금강삼매 경론에서 離邊勝利와 自在勝利를 들고 있다. 여기서 승리란 말은 속되게 표현하여 이긴다는것 아니다. 勝利란 수승한 이익, 더함없는 공덕을 이룩한 것을 의미한다. 열반이란 이 세상에서 어디에 비길수 없는 이익이요, 더함없는 공덕을 이룩한 것을 의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離邊勝利란 대립된 세계를 초월한 절대적 이익을 말한다. 어떤 특수상항에 치우친 생각을 버리는 중도의 묘용을 십분발휘하는 것을 의미하고 自在勝利란 자기충족 자기생활의 발견 자아완성등 자존적 존재성을 자각하여 공포없고 걸림없는 세계에 안주하는것을 말한다. 이러하므로 열반은 일체충족이며 절대행복인 것이다.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원리가 오늘날 사회에 어떻게 적용되고 활용될 것인가. 오늘날 평화와 자유를 유지하는 것에 몇가지 유형이있다. 법률적인 문제, 수교적인 조약, 무력적 평화유지, 종교적 평화론등이 바로 그것이다. 사회질서를 다스림도 도덕적인 면보다 형벌에, 국가상호간의조약도 국력의 눈치를 보고 또한 세계평화를 UN안보이사회가 있어도 무력경쟁으로 소강상태를 유지할지 모르나 평화는 무력으로 지킨다는것이 20세기의 국가안보윤리이고 보면 종교적 평화유지란 언필칭 「종교적 평호론」에만 그치고 말 것인가.

     3 부처님이 시설한 평화윤리

 자비의 이상은 후대에 오면서 발전하고 더욱이 대승불교시대에 와서는 정치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평화를 강조하게 되었다. 국가를 다스리는 통치자는 온화한 마음과 따뜻한 손길로 국민을 대함과 동시에 외국에 대해서는 절대적으로 침략성을 지니면 안된다고 하였다. 평화를 유지하는 것을 제일의적 이상으로 하라고 하였다. 대승대집지장십륜경에서는 제가 살기 위하여 남을 침범하고 전쟁을돌발시키는 것은 대왕의 할일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또한 범망경에 「불자들아, 너희는 이양을 구하는 나쁜 마음으로 나라의 사신이 되어 싸움터에서 회의를 하거나 전쟁을 일으켜 많은 중생을 죽이지 말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군중(軍中)에 들어가지도 않아야 하거늘 하물며 나라를 해롭게 하는 일을 하겠는가. 만약 짐짓 그러한 일을 하면 죄가 되느니라」고 경고하고 있다. 전륜성황적 통치력을 구사하여 침공이 없는 위정자가 되기를 누누히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가 존속해 온 역사를 보면 전쟁없는 영일(寧日)한 세월이 얼마나 있었던가. 항상 전쟁의 불길은 세계도처에 치솟아오르고 죽음의 북소리는 울리고 있다. 부처님의 목소리, 성자의 외침소리는 허망한 것인가. 세계가 이어온 지금껏 종교적 지도자가 갈파한 것을 사문화할 위정자도 없는 것을 보면 가증할 정도로 기적임은 틀림없다. 일면 무력을 증강하면서도 종교적 평화를 외치는 것은 인간의 나약성을 솔직하게 보여준 인간의 본성이다.

 그리하여 인간이 타협해 낸 최상의 발언이 무엇인가. 평화공존이란 것이다. 평화가 유지되려면 무력의 형평유지가 상호균등하여야 한다는 비극적인 정치철학을 묘출 동원하게 된 것이다. 이름하여 평화공존이지 사실은 무력공존인 것이다. 인간은 자각상태를 연속시킬수 있는 능력자인가. 무력공존의 연속을 인간이 감당할 수 없으므로 콤퓨터에게 일임할때 인류전멸의 가공성을 맞이할 것이다. 평화공존이란 인간과 인간의 이성적이고, 정감적인 세계에서 이룩되는 것이다. 평화적 이상과 평화적 목적이 공존하여야 할 때에 무력 공존을 부르즞는 것은 불을 짊어지고 기름바다로 들어가는 격이다.

 인류에 평화를, 인간에게 자유를 부여하는 것은 치우친 생각을 자재하게 이끌고 또한 스스로가 자유의 존재임을 자각하는 원형적인 종교인으로 귀의하여야 한다. 자유와 평화 이것은 쟁취적 소산물이 아니다. 그것은 열반과 해탈과 같이 자기 극복에서 찾아내는 自內證의 慈悲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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