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무성했던 젊은 세월이 고운 단풍으로 훌훌 새 계절을 휘날린다. 변화에서 변화하지 않는 자를 잡지 못할 때 어차피 만상은 이렇게 덧없이 흘러가는 것. 이 점은 인생도 매 한가지가 아닐까. 젊음은 머물어 있지 않은 것이다. 강물처럼 흘러가는 것이다. 활줄을 떠난 화살처럼 떨어질 곳을 향하여 날라가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우리의 눈에는 형상밖에 잡히지 않는다. 우리의 감각기관은 형상밖에 포착하지 못한다. 그리고서 그것을 의식 속에 간직하고 생각하며 혹은 매만지고 혹은 논리적 축적과 분석을 반복한다. 인생이란 통털어 이런 덧없는 것을 파악하고 덧없는 것을 그 속에 간직하고, 그리고서 도리어 그 속에 파묻혀 울고 웃고 또 신음한다.
범부의 눈에는 아무리 반성을 더해도 허무가 이와 같이 널려 있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그 모두가 그렇게 허무하게 덧없는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고, 그것을 알고 깨닫고 슬퍼하는 그 주인공도 역시 그러한 줄을 알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불감증 속에 나날을 산다. 설사 허무와 무상의 둥치 속에 자기인 것을 알았더라도 허무와 무상 밖에 다시 한 치도 내어딛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니, 이래서 인간은 역시 허무가 깔린 지평 위를 그저 망각과 불감과 찰라적 감각과 변화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허무한 인생이다.
부처님도 이 덧없는 허무 속에 허무의 둥치로서 태어났었다. 적어도 범부의 눈에 비치는 한에서는 분명히 그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허무의 둥치에서 어떻게 성불하셨을까? 부처님은 허무에서 허무를 분명히 본 것이다. 허무하기 때문에 허무로 인식하고 허무를 사는, 허무 아닌 자를 본 것이다. 마치 겹겹싸인 구름 밑의 사나이가 구름을 뚫고 끝없는 창공을 본 것처럼.....그렇게 부처님도 비바람치는 구름 밑에 서서 푸른하늘과 찬란한 태양을 자신의 허무 속에서 본 것이었다. 이렇게 하여 부처님은 이 범부들의 상황 속에 아침해처럼 뛰어나오지 않으셨던가.
부처님께서 보신 바로는 실로 허무한 것은 없었다. 불안과 우수와 공포라는 것은 없었다. 그것은 허무한 구름 안의 현상이었다. 실로는 그 모두가 본래로 없었던 것이다. 허무 속에 그 모두가 매장되고 이름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찬란한 아침해처럼 넘쳐나는 생명--- 이것만이 본래대로의 모습이었다. 시간에 자재하고 공간에 자재하였다. 무한을 성취하는 자재한 힘과 영원을 꾀뚫는 걸림 없는 지혜와, 우주를 감싸고 덥히고도 남는 뜨거운 체온이 거기 있었다. 이와 같이 해서 있는 것이란 평화와 지혜.자비. 끝없는 평화 창조, 그리고 생명의 영광, 이것뿐이었다. 이것이 인간과 온 存在의 實相이었던 것이다.
이제 이달도 丁巳年 冬安居를 맞이한다. 온 國土, 모든 兄弟가 다함께 바른 믿음을 向한 精進으로 圓覺道場에 結制하기를 祈願하면서 다시 한번 「우리의 믿음」을 되뇌이는 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