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佛光이 지난 1월호부터 현실생활에 관계되는 우리 불교인들의 여러가지 문제들은 놓고 일련(一聯)의 대화를 가지기로 기획한 대담씨리이즈의 속편으로서 대구에서 가진 좌담회의 기록이다. 이 자리에는 이기영교수를 중심으로 한국불교연구원 대구 구도회의 회원 여러분이 참석하였다.
이 모임에 자리를 같이한 분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李箕永 (哲博 · 한국불교연구원장)
李沅河 (경북여고 교감)
송영선 (영남대학교도서관 사서)
김현준 (경북대문리대 지질학과 4년)
이상룡 (경북대 문리대 영문과 2년)
서재량 (경북대 사대 지학과 2년)
▨사랑의 정의는?
생명을 완성시켜 주기 위한 행동
李 오늘은 불광을 위한 좌담을 가지기로 하겠습니다. 우리가 일상생활을 이룩해 가는데 있어서 잘 알고 잘 실천해 가야 하는 여러가지 문제가 많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오늘은 사랑이란 문제를 가지고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모든 우리의 생활을 부처님이 가르치신 정법에 의하여 바로 생각하고 바로 율하면서 살아가야 할 줄 압니다. 그러자면 여러가지 분명치 않은 의문도 생기고 그것을 해명해 보고 싶은 희망도 생깁니다. 그럼 먼저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기 위해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문제부터 들어 보기로 할까요. 송양이 먼저 이야기 해 주시지요.
송 저는 사람이 사랑을 하게 될 때에 그 사랑이 필요하게 되는 데에는 고독이 이유가 된다고 봅니다. 다시 말하면 고독이 사랑을 요청한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저는 왜 사람은 고독한 것일까 하는 것을 묻고 싶어요. 이것이 첫째 의문이고, 다음으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진실한 사랑의 실천인지 그것을 묻고 싶어요.
그리고 사랑과 지혜의 관계에 대해서인데 제가 언젠가 읽은 책에서 기억나는 것이 있습니다. 세네카는 「슬기로운 자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고 했고 또 베이컨은 「사랑하면서 현명하기란 불가능하다. 현명하면서 사랑하기란 불가능한 것이다.」라고 한 일이 있는데, 이 말들을 어떻게 연관지어서 생각하면 좋을 런지요.
그리고 세째로 저는 이런 생각이 드는데 선생님께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즉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은 올바르게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李 예, 참 좋은 질문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그럼 또 다른 의문을 더듣고 제 의견을 말하기로 하지요. 이군이 이야기 해 주겠습니까?
이 저는 사랑이란 인간끼리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과 사물 사이에도 있지 않는가, 물건이나 자연 등에 대한 사랑이 또 무시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인간은 왜 이러한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인지, 왜 사랑하게 되는지 항상 의심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고등학교때부터 자선이라던가 하는 것에 많은 관심을 가져왔는데 인간과 인간과의 사이에서는 곧잘 허무를 느끼게 됩니다. 인간은 왜 그런 허무의 벽을 넘어 우정에서 긍정으로 가게되느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됩니다.
李 예, 이렇게 질문을 받아보니 젊은이들의 입에서 참 좋은 질문들이 나오는 것을 느낍니다. 우리가 미쳐 생각 안했던 점들을 잘 지적해 주는 느낌입니다. 또 다른 의견을 들어 보겠습니다.
서 저는 요새 사람들이 사랑을 남녀간의 사랑으로 국한 시킬려고 드는 경향이 농후한데, 그렇게 되어버려서는 안된다고 생각되는데, 어떻게 하면 그런 경향을 극복하고 타개할 수 있는 것인지 하는 것이 의문입니다.
송 저는 사랑과 자비를 접근시켜 보려는 생각을 해 보았는데요. 좀 찾아 보니깐 사랑은 언제나 자기의 기쁨이 되는 것, 언제난 자기에 관계되고 있는 것 같은데, 자비라고 하면 언제나 남을 생각하는 것으로 됩니다. 이것을 어떻게 관련지어 생각하는 것이 옳은지요.
김 제 생각으로는 지금까지 말한 모든 이야기들은 사랑을 하는데 있어서의 문제점, 그런 것들만을 이야기 했다고 느껴집니다. 저는 사랑이란 어떤 것이냐. 그것을 먼저 이야기하고 가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李元 그렇지. 그 법주라던가 개념 이라던가 그런것이 문제되겠지요.
李 예, 좋은 문제들이 많이 제기되었습니다. 그럼 어디 한가지씩 이야기를 해 볼까요. 그런데 사랑이란 어떤 것이냐 하는 문제부터 생각하는 것이 좋겠군요. 김군은 그런 문제를 제기하면서 어떻게 생각해요. 사랑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김 사랑이란 사람을 살리는 것이다. 살려나가는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싶어요.
李 예, 사랑의 정의는 매우 어려운 문제일것 같습니다. 김군의 그 표현이 좋군요. 그런데 어떻습니까? 사랑에는 여러가지가 있겠지요. 그 점에 대해서 이 교감 선생님께서 좀 말씀해 주실까요?
李元 사랑이란 매우 광범위한 개념이라고 생각됩니다. 남녀간의 사랑, 부부애, 친구간의 사랑, 우애, 교애, 그리고 동포애 인류애 국가에 대한 사랑, 스승과 제자간의 사랑, 그리고 모든 중생들에 대한 사랑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광범위합니다. 그 사랑은 자비심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면 안될 줄로 압니다. 저는 사랑이란 주는 것이다. 보답을 바라지 않고 주는 것이라고 말하면 좋으리라 생각합니다.
李 우리말 「사랑」이라는 말의 어원이 무엇인지. 그리고 서양말의 사랑이라는 말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생각해 보는 것도 좋겠습니다. 적어도 애(愛)와 자(慈)와 인(仁) 등의 사이에는 각각 다른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 사실이겠지요. 러브(love)나 아모르(amour), Charity등도 그렇겠고 에로스와 아가페의 경우도 그렇지요. 나는 사랑이란 말의 넓은 뜻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아까 송양이 말한 고독과의 관련을 생각하는 것은 퍽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고독을 우리는 어떤 공백, 결핍, 부족이 있을때, 그것이 충족되기를 바라나 충족되지 않는 감정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지요. 사랑은 바로 그것을 충족시켜주는 행위란 일면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남녀간의 사랑, 부부애, 우애, 종족애, 물질, 재물에 대한 사랑등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은 그 일면만을 가지는 것은 아니겠지요. 스승의 제자에 대한 사랑, 인류애, 중생애 등에는 그런 면도 일부 없지는 않겠으나 대체로 보다 더 무조건적인 내리사랑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자비심이나 아가페와 통하는 사랑이겠지요.
부처님의 일생을 생각해 보십시다. 부처님은 외로운 사람이었을까? 적어도 출가 전의 싣다아타르에게는 그런 표정이 없지도 않았지요. 그러나 그것은 부처가 됨과 동시에 자취를 감춥니다. 성도 전의 그러한 고독의 표정은 하나의 교화방편이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겠지요. 부처님은 사실상 태어날 때부터 고독한 분이 아니라 고립당당(高立堂堂)한 분이었습니다. 고립당당이란 후세의 선사들의 표현입니다. 고립과 고독사이에는 유사성이 있는 것 같지만 정반대 입니다. 고립은 독립이라고도 표현되었습니다. 의지해야 할 필요가 없는 분이었습니다. 그것을 증명하는 말이 천상천하유아독존이란 선언입니다. 태어나시자 마자 이렇게 선언하셨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는 모든 부족함을 여읜 싣달타(모든 것이 구족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일생을 특징짓는 팔상은 연극이었다. 이렇게 말 할수 있습니다. 불가결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생교화를 위해 그런 경과를 밟았습니다. 그의 사랑은 주는 사랑, 내리 사랑이었습니다. 무조건 적인 사랑, 아까 김군이 말한 것처럼 우리를 온전하게 살려주기 위한 사랑이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상대가 남자건 여자건 인간이거나 인간아닌 다른 생물이거나 대자연이거나 그 생명을 참된 생명으로서 완성시켜 주시기 위한 마음의 행동이요. 몸의 행동이요, 입의 행동이었습니다.
아까 사람은 왜 고독한가? 이렇게 물었습니다. 그 까닭은 단적으로 말하자면 무명의 존재로서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말하면 되겠지요. 고독은 심리적이기도 하고 생리적이기도 합니다. 사람은 사랑을 할때 마음으로만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도 사랑을 하지요. 심리와 생리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지요.
그 고독은 많은 경우, 우리의 판단 부족 오판으로 증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래 타고난 심성이 강한 애욕을 가졌는데다가 그것이 더욱 후천적으로 확대되고 평창되게끔 방임하거나 외부에서 작용을 가하면 우리의 판단은 점차 더욱 그릇된 길을 가게 되고 고립감은 더욱 심해지는 것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인류를 사랑한다 . 대자연을 사랑한다. 친구를 사랑한다 할 때, 그리고 정의를 사랑하고 진리를 사랑한다 할 때 그 사랑에는 단순히 요새 거리의 젊은이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은 에로스적인 사랑과는 다른 그 무엇이 있지요. 물론 여기에도 고독이란 바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고독의 성격은 심리적으로나 생리적으로나 보다 고차원적의 것이 있다고 보여집니다.
동포애가 반드시 종족애는 아니지만 지나친 민족 감정 같은 것에는 편협한 사랑이 있습니다. Tribus라는 말, 즉 종족이란 말은 라틴어 Tribus에서 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1/3이란 말이지요. 고대 도시국가에서는 1/3만이 한 종족을 이루었다고 합니다. 나머지 피정복민으로서 노예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정복민인같은 종족끼리만 사랑하는 것이 종족애입니다. 이런 것은 좀 곤란한 사랑이겠지요.
송 나하고 가까운 사람끼리만 담을 쌓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종파 감정이요, 당파의식이요, 문벌 의식일 것입니다.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 인류애가 아니겠습니까? 부처님이 가르치신 사랑, 중생애가 그런것이라고 생각되는데요.
李 나는 길을 가면서 가끔 죽으면 저 낙락장송이 되어야지 하는 생각을 할때가 있어요. 과연 그것은 가능할까? 어떻게 생각합니까?
나는 자연과학적으로도 그것이 가능함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흙이 유기물이냐 무기물이냐? 생물학자들은 그 한계를 획연(劃然)히 구별하는 것이 매우 어렵다고 하고 있습니다. 베르그송(Bergson)이나 떼이야르 · 드 · 샤르댕(Teillard · de · Chardin) 같은 사람이 그런 문제를 많이 이야기 했습니다. 김군은 지질학을 했는데 어떻게 생각합니까?
金 참 석탄은 유기물이지요.
李 흙의 양분은 소나무를 키웁니다. 땅의 산화가 심하면 식물이 자라지를 않습니다. 중생을 한번 이렇게 생각해 보십시오. 내가 죽어서 소나무가 되는 것은 가능합니다.
이상 대상이 없는것, 한계가 없는 것, 저 허공과의 일치가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자타가 원융(圓融)되는 것, 그것이 사랑의 극치가 아닐까요.
李 좋은 이야기입니다. 허공이란 말로 열반을 설명하기도 했지요. 그것을 브라흐만(Brahman)이라고 하는 설명도 가능합니다. 그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온건한 생명이지요.
이상 예, 그것은 온전한 생명입니다.
▨ 올바른 사랑
참된 지혜가 전제지 않으면 안 된다.
李 우리의 생명이 그렇게 되는 것이 지극한 사랑이 아니겠어요? 우리 고독한 사람의 사랑은 아직 온전하지 못한 사랑, 온전한 사랑에로 가고 있는 사랑일 수 있읍니다.
성불이란 사랑의 원만화(圓滿化)라고 해도 좋지 않을까요.
자, 그럼 이젠 앞서 송양이 질문한 사랑과 지혜에 관한 이야기를 해 보기로 합시다.
쎄네카의 경우의 「슬기로운 자」를 보살에 해당시켜 생각하면 어떨까요 보살만이 제대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사람은 슬기로우면 슬기러울 수록 더 온전한 사랑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성문과 연각이 사랑을 할까요. 그들의 사랑은 자기 위주의 사랑이며 현실을 부정하는 사랑일 것입니다. 쎄네카의 말을 부처님의 말씀과 연관시켜 생각하는 것도 좋을 것입니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가 다 구족되신 분이지요.
다음에는 베이컨의 말에 대한 우리의 의견을 말할 차례인데 그러자면 베이컨이 말한 현명한 자란 무슨 뜻이며 또 그가 말하는 사랑이 무엇인지를 더 잘 알아야 하겠군요?
송 베이컨의 사랑에 관한 에세이를 전에 읽었었는데 그가 말하는 사랑이란 정열적이요 감정적인 이성에 대한 사랑이었다고 기억합니다.
李 예, 그렇다면 그런 사랑은 현명한 사람이라면 할 수가 없겠군요. 현명하지 않아야 그런 사랑을 해낼 수 있을지 모르지요.
송 그러니까 쎄네카는 긍정적인 사랑을 베이컨은 부정적인 사랑을 말한 것 같습니다.
李 다음에 올바르게 살아가는 사람은 올바르게 사랑하면서 사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의견에 대해서는 나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올바르게 산다는 것의 내용이 보살도에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올바르게 사랑한다는 것은 보살도를 옳게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면 되겠지요.
이상 일치에 이르는 체험, 그것이 올바른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무아의 사랑 그런 것 말입니다.
李 올바르게 사랑하는 것의 극치가 보살의 사랑에는 그 초보적인 단계, 그 시작과 과정이 있겠지요.
金 사랑의 방법은 사섭의 도리에 잘 설명되어 있는 것이 아닐까요.
李 예, 거기에 그 원칙이 잘 표현되어 있지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이것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고 생각됩니다. 사랑의 선교방편 말입니다. 현대 정치에 있어서의 사랑, 현대 경제에 있어서의 사랑, 국제 관계에 있어서의 사랑, 가족내에 있어서의 사랑의 구체적 방안, 한 기업체안에서의 사랑, 한 사회안의 각계 각층의 사람들 사이에서의 사랑, 그것이 어떻게 구상되고 어떻게 실천되어야 할까. 이런 문제는 대원칙만을 가지고는 잘 이해가 안되고 실천이 안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그것을 밝히는 것이 현대 불교학자들의 과제가 아닌가 합니다.
나는 항상 강조하기를 요익유정(饒益有情) ㅡ 모든 유정 ㅡ 즉 중생이 원만하게 그 생명을 다하도록 그 구실을 다하도록 헌신하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한 이행(利行)이요, 그러기 위한 보시(布施)요, 그러기 위한 애어(愛語)요, 그러기 위한 동사(同事)를 해야 하는 것이겠지요, 정치라는 일, 생산이라는 일, 무역이라는 일, 외교라는 일, 군사라는 일, 교육이라는 일, 연예활동이라는 일, 오락이라는 일, 이 모든 일이 다 그 원대한 목표 아래에서 잘 연구되어 진 사랑의 청사진에 의해 이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까 이원하선생님이 사랑이란 주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요익유정의 근본자세는 나의 모든 것을 사심없이 주는 마음가짐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유정이 사리사정(私利私情)을 충족시키도록 내버려두는 방향으로 이루어져서는 아니되겠지요. 그러므로 사랑에는 참된 지혜가 전제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말해야 되겠지요. 그 지혜는 두가지 측면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는 나에게서 어떻게 아집을 뿌리 뽑고, 법집(사물에 대한 집착)을 뿌리 뽑을 수 있을 까 하는 방향으로 돌려져야 하고 또 다른 하나는 남들을 어떻게 그처럼 지혜롭게 할까 하는 방향으로 돌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요새 사랑을 말하는 사람들에게서 우리는 이러한 깊은 통찰이 부족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제일 먼저 착수해야 하는 긴급한 일은 나와 우리 모두가 무엇보다도 이러한 도리를 먼저 아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불교가 제시하는 교훈을 올바로 알도록 노력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이야기를 시작하다가 마는 느낌이 있습니다만 오늘은 아마 이야기를 이 정도에서 줄여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우선 지면의 제한이 있으니까 말입니다.
여러분 오래동안 감사합니다. 좋은 문제를 제기해 주신 것을 고맙게 생각합니다.
다시 다른 기회에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