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자(佛子)의 직장생활이 그의 신앙 생활과 무관한 듯 생각될지 모르지만 재가자의 신앙을 위한 수행 도량은 다름 아닌 우리의 직장이라는 것을 여러 각도에서 검토하여 왔다. 직장을 우리의 수행도량이라고 생각할 때, 그 직장의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직장을 돈 벌기 위한 방편으로 다닌다고 생각할 때 직장과 나는 대립 관계에 서게 되고 직장이 강자로 여겨지므로 나는 약자의 위치에서 굴욕적인 생활을 감수하여야 하겠지만, 직장이 바로 나의 수행 도량이라고 할 때 그 곳은 나의 생명력이 발휘되는 성스러운 보살도의 현장으로 바뀐다.
보살도는 원래 자리(自利). 이타(利他)로 표현한다. 그러나 불자는 남과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나를 부정하는 것이므로 보살도의 단적인 표현은 이타(利他) 곧 남에게 이로움을 주는 일이라 할 것이다. 우리의 직장은 곧 이타행(利他行)의 현장이다. 그리고 그 이타행의 본질은 곧 모든 인간의 불성개현에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직장에서 많은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그리고 그 문제들은 퍽 귀찮은 것인 양 여겨져서 대개의 사람들은 자기가 부딪치게 된 문제를 불평의 대상으로 삼는다
그러나 이타행을 실천하는 도량으로서의 직장에 나와 있는 불자로서는 그 문제들이 결코 저주스러운 것일 수는 없다. 대체로 어떤 문제에 봉착 하여서 그 문제를 불평스러운 것으로 생각하게 되는 이유는 두 가지 면에서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 하나는 자기 계산에 맞지 않는 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는데 그 문제가 자기에게 큰 경제적 이득을 약속해 주는 문제라고 여겨질 때 어느 누구도 그 문제를 불평하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자기에게 나타난 그 문제는 자기의 경제적 이득에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아니 하거나 또는 반대로 손실이 예상된다고 할 때 그것을 원수스러이 받아들인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중심적 계산이 사물의 평가 기준으로자리 잡혀져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자기를 계산에 넣지 아니한다. 『보살은 그 복덕을 받지 아니 하느리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고 복덕을 받지 않는 이유로 복덕에 탐착(貪著)하지 아니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해 주시었다. (금강경) 다시 말하면 보살의 행동은 이미 자기를 계산에 넣은 행동이 아니다. 보살의 행동과 생각에서는 자기가 이미 빠져버렸다.
자기를 계산에서 빼어버린 보살이 자기에게 발생한 문제에 대하여 불평한다는 말은 있을 수 없다. 일반인들이 문제에 대하여 불평하거나 저주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발생되어진 문제에 대한 해결 방책이 있을 수 없다는 비관적 사고에서 찾아진다. 발생한 문제의 힘을 자기에게 있는 힘보다 크다고 판단하여 그 힘 큰 문제가 힘 약한 자기를 압도하여 파멸시킬 것이라 보는 것이다.
그러나 보살은 여래의 무량공덕을 남김 없이 써 가는 자를 말한다. 여래의 무한공덕 앞에 불가능이 있을 수 없다. 여래의 무한 광명은 모든 어두움을 없애버리는 것이며 여래의 무한 방편(方便)은 일체 중생의 무한 성숙을 위해 어느 때 어느 곳에든 나타나지 아니 하는 경우가 없다. 여래의 무한 공덕을 구김 없이 써가는 불자인 직장 보살들은 자기에게 나타난 문제들을 자기에 대한 징계적인 것으로 보거나 또는 적대적인 현상이라고 보아 이것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본래 원만히 갖추고 있는 지혜 덕상(德相)을 나타내게 하기 위한 여래의 방편 시현(示現)이라 보아 감사로이 받아들이고 그 문제를 위한 무한 지혜의 계발에 정진하는것이다.
불자의 믿음은 무한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다. 우주와 인생의 근본 원리는 불성(佛性)뿐이다. 불성 아닌 별개의 존재는 아예 처음부터 없다. 모든 인간은 불성(佛性) 인간이다. 불성 인간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본래 한 형제이다. 그리고 한 생명이다. 거기에는 대립도 한계도 장벽도 궁핍도 투쟁도 없는 것이다. 오직 무한의 성취만이 있는 것이다. 이 무한 성취 곧 무한의 가능성을 믿는 불자가 자기의 문제 해법에 대하여 가능성을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망념이다. 이 망념은 우리의 기도를 통해 없애버려야한다.
불자들은 문제에 부딪칠 때 그것으로 좌절되거나 절망되거나 한탄하지 아니 하고 오직 기도를 통해 무한 가능성의 실현을 관(觀)한다.
직장인에게 있어서의 문제의 대종은 사람의 문제와 물질의 문제인데 그 둘 중에서 어느 것이 더 큰 문제이냐고 할 때에는 사람의 문제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물질의 문제는 결국 사람의 문제로 야기되기도 하고 해결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문제야말로 모든 직장인의 큰 두통거리이다. 특히 가깝게 지내는 사람일수록 그 문제는 크다. 왜 그렇게도 못된 사람들만 내 주위에 모였을까? 대부분의 직장인의 공통된 한탄이다. 내가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내가 인복(人福)이 없기 때문이며 저 사람이 크게 성공한 것은 인복(人福)이 좋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저녘 퇴근 시간 뒤의 대포집에서 교환되는 대화에서부터 시작해서 최고급 경영인의 한담(閑談)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줄거리는 이것이다.
그러나 불자에게 있어서는 그렇지 아니 하다. 사람은 모두 다 불성 인간(佛性人間) 뿐이므로 모두가 제도(濟度)하여야 할 중생일지언정 결코 저주할 적(敵)은 없다. 여래께서 제도하지 못하는 중생은 하나도 없고 여래의 무한 공덕 앞에 일체 중생은 이미 제도되어진 것임을 믿는다. 불자는 겉모양으로 형제를 평가하지 아니 하고 그 본질 생명의 무한선(無限善)을 본다. 곁모양이 거칠게 보일 때 그 겉모양이 나의 집착(執着)의 대상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 겉모양은 본래 없다고 보고 나의 집착심을 과감하게 버리고 그 본질 생명만을 보는것 이다.
현상세계는 인정하는 것만 나타난다. 선(善)만을 인정할 때 선만이 나타난다. 무한의 가능성을 믿자. 그리하여 악인에게 포위되어 있는 자신을 완전해방하여 선인들에 의해서 끊임없이 축복받는 자신을 도로 찾자. 무한 가능성의 실현은 바로 감사행으로 이룩된다. 내 마음이 바뀔 때 세상이 바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