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正山老師의 종횡담의 요약이다. ㅡ 文責記者ㅡ
1. 혜월도인의 기적
내가 산으로 들어가던 그무렵은 우리 겨레가 정말 몸부림치던 시절이었다. 내가 집을 나선 것은 계해년 이었으니 그때는 1923년이다. 3 · 1만세운동이 일어난지 4년이 되는 해였다. 나는 그 당시 불교에 관심이 있어 절에 출입하였지만, 나라를 잃었던 통분함을 어찌 새길수 있었겠는가. 기미년 만세운동으로 폭발했던 울분이 새로운 상처가 되어서 사방에서 쫒기기도 하고 잡히기도 하고, 비분에 울먹이는 분위기가 가득 했던 때였다. 이러한 세상의 소용돌이 속에서 차분히 불법에 마음을 붙이고 외골수로 나아간다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나도 여러차례 동지들과 의논해서 거사를 하고 만주로 탈출할 것을 논의 하기도 하였지만, 역시 최후 결단을 가로막는 것은 첫째는 부모님에 대한 염려가 있었고, 그 다음에는 우리의 힘이 너무나 미약한 것을 느꼈던 것이다. 나는 치밀어 올라오는 천가지 만가지 불덩어리 같은 생각을 질끈 삼키고 불도를 공부하자고만 자신에게 타이르며 살았다.
오나가나 고성염불을 소리소리 외치고 다닌것은 여러 의미가 있었던 것이다. 불교계에서는 그 무렵 많은 사건들이 있었던 것도 나는 되도록 듣지 않으려 하였다. 그 당시 해인사에서 대중이 모여 이회광(李晦光) 주지 축출운동을 하였다든가 사찰령을 철폐하자는 운동이 일고 있었다든가 하는 말이 들려왔지만, 나는 귀를 막고 공부만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내가 안정사 가섭암에 머문지 반년만에 다음해 2월초에 통영으로 나왔다.
그러니까 그해는 갑자년이다. 통영에서 뱃길로 부산에 이르러 당시 도명을 떨치고 많은 사람의 귀의를 모으고 있었던 신혜월(申慧月) 스님을 선암사로 찾아갔다. 마침 해제 중이어서 그랬는지 대중은 그리 많지 않았다. 혜월스님을 모시고 밭을 일구고 짐을 지며 약 두 달을 지냈다. 혜월스님은 그 당시 나에게는 참으로 분별심이 없는 도인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가 와도 반겼고, 항상 보는 사람처럼 친절했다. 옷이나 가사라도 혹 없는 사람을 보면 있는 대로 성큼 내주었고, 어려운 사람을 보면 가지고 있는 것 모두를 다 털어내셨다. 어떻게나 일을 하시는지 젊은 나로서도 따르기 힘들었다. 그러나 누가 법문을 물으면 잠시도 주저없이 술술 법문이 흘러나왔다. 또한 어떻게나 친절히 일러 주시는지 어떤 때는 괭이자루 들고 밭뚝에서 법문 듣다가 해가 진 일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아직 젊은 탓이었는지 철이 덜 들어서인지 혜월도인 밑에 오래 있지를 않었다. 다들 말하기를 먼저 경을 보고 그 다음에 참선하여야 하는 것이 수도의 정도라고 일러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에게는 강당에가서 경공부 하는 것이 첫째 과제였다. 그런데 그당시 범어사는 앞서 말한것 처럼 공부하는 사람을 알아주는 곳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래서 범어사를 찾아갔다.
2. 범어사 강원 시절
범어사에는 덕망이 높은 담해(湛海) 스님을 내원암에서 만났는데 그때만큼 불교의 친절을 느낀 적도 드믈다. 담해스님은 처음 뵈었는데 나를 극진히 대해 주셨고, 권일봉 노스님 앞으로 인도하여 주셨다. 지금도 그렇지만 절에 정규대중이 아닌 사람이 머문다는 것은 피차간 어려운 점이 많은 것이다. 그런데 나에게는 특례가 베풀어졌다. 일봉 노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얼마가 되어도 좋으니 객실에서 지내며 수행을 하고 준비가 되면 곧 강원에 입방을 허락한다 하였다. 이래서 내원암 객실에서 이럭저럭 6개월을 지냈다.
그사이에 나는 잠시를 아껴가며 송경 염불기도를 계속하였다. 그해 9월 15일에 사미10계를 받았고, 16일에 큰 절 강원에 입방이 허락되었다. 처음 강원에서 서장(書狀)과 선요(禪要)를 내 놓으면서 새기라(해석)고 한다. 나는 거침없이 해냈다. 나의 한문실력을 감안해서 인지 곧 중등과에 입학이 허락되었다. 그때 중등과는 오늘의 사교과다. 능엄경 · 금강경 · 원각경 · 기신론을 연이어 배웠다. 그떄 나의 공부는 경의 깊은 뜻을 어찌 알았다고 하였으랴만 문자에 대한 이해와 원문의 암송은 정확히 해냈다.
그 당시 약 80명의 강원 학인들이 있었는데 나의 한문실력은 얼마간 인정 받고 있었다. 그래서 논강은 정상적으로 하고 자습시간에는 굶주린 사람이 밥을 만난듯 마구 읽어 내려 갔다.
또 한가지 범어사에 관해서 잊혀지지 않는 것은 그때 나에게 공비로서 매월 학비 10원과 쌀 서말을 준 사실이다. 그때 돈 10원이면 쌀이 두짝 반이다. 그런 학비를 내가 강원 졸업할 때까지 보장해 준 것이다. 물론 권일봉 스님의 특별한 배려이긴 하지만 학인을 우대하는 사풍을 능히 짐작하게 한다
3. 금강산으로 가다
그당시 금강산 유점사에는 동국경원이라는 경학 연구원이 개설되어 있었다. 서울의 신심있는 단원들이 출자하여 전액 공비로 운영되는 특별 고등강원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조실은 김동선 스님이었는데 조실스님의 위덕은 대단 하였다. 덕망이 출중하였고, 학문도 놀라왔다. 당시 서울의 대감이니 정승이니 판서를 지냈다는 귀족들도 그 앞에 와서는 엎드려 절하였다.
내가 범어사에 있는데, 하루는 한 객스님이 찾아 왔는데 알고 보니 지금의 동국역경원장 이운허 스님이었다. 운허스님은 조실스님을 뵈옵고 상패 학인들에게 새로운 소식을 알려왔다. 그것은 금강산 동국경원 이야기다. 말하자면 연구생 모집차 나온 셈인데 입학자격은 대교과를 졸업하고 조실스님의 추천이 있는 자라야만 된다고 한다.
그때 학인대중들은 나를 지목하였다. 조실스님도 내가 가는 것을 은근히 권장해 주셨다. 나의 한문 실력이 족히 자격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범어사 강원에서 오래 있지 못하고 떠나게 된것은 동국경원에 가자는 향학심도 있었지만 또한 그곳 물 탓인지 소화불량을 일으켜 지친 나머지 그 곳을 뜨게 된 것이다. (그래도 범어사에 근 3년을 지냈다) 금강산 동국경원의 생활은 화려했다.
연구생은 18인으로 기억한다. 공부는 화엄경을 주로 하였는데 모두가 내라 하는 학인들이 모였는지라 강론 때는 마냥 불꽃을 튕겼다. 그때 조실 김동선 스님은 많은 말보다 짧은 말로 오히려 말보다 근엄한 덕행으로 학인들에게 많은 것을 주었다. 내가 범어사를 떠나 금강산으로 간 해가 무진년이다. 앞서도 말한 바와 같이 동국경원은 일체 학비, 일체 의식주 생활비를 보장받고 공부하던 동국경원은 비록 불교학에만 치우친 감은 있지만 불교학의 도야를 위해서는 길이 남을 시설이었다고 생각된다. 나는 그곳에서 2년을 머물렀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독일가서 철학박사가 된 백성욱박사나 국내에 대강백으로 이름 난 진진응 스님이나 김동선 스님도 있었지만, 강원 졸업자격으로서는 박한영 스님의 권위가 또한 높았다. 학인들의 욕심으로서는 그런 대강백에게서 직접 배우는게 소망이었다. 나는 금강산의 화려한 시절을 뒤로 돌리고 경오년 3월달에 서울로 나왔다. 당시 개운사에서 강원을 열고 있던 박한영 스님에게 졸업장을 받기 위해서다. 개운사 강원은 병인년에 문을 열었는데 기사년 3월달에는 불교 연구원을 칠성암에 개설하여 그 명성이 대단하였다.
4. 운수행각
대원강원에 오던 해 여름의 더위는 지금껏 잊혀지지 않는다. 어떻게 더웠던지 넘기는 경장이 땀에 젖었다. 나는 박한영스님 회갑 전에 졸업할 욕심으로 부지런히 경장을 넘겼지만 결국은 회갑 전에 졸업은 못하고 회갑 7일 후에야 마칠수 있었다. 박한영스님은 과묵한 편이셨는데 나의 극성을 보시고「저런 사람 생전 처음 봤다」고 격려를 해주신 것은 저때의 나에게는 시원한 휴식이 문제가 아니었다.
경을 마치고 나니 참선생각이 났다. 참선에 관한한 나의 마음의 선지식은 신혜월 스님이다.
혜월스님은 경을 보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예 문자를 몰랐었다. 그런데도 경의 뜻을 물으면 막힘없이 흘러 나왔다. 내가 처음 혜월스님을 뵈었을 때 느꼈던 것은 <도인은 문자 이전의 심지(心地)를 밝혔구나)하는 것이었다. 문자에 걸림없이 법문이 술수 나오는데 그것이 경의 뜻에 부합되는데야 어쩌는가. 나는 경을 배웠다. 문자와 이론을 배운 것이다. 그러면 이론 이전의 마음땅이 밝았던가? 그러지는 못 했던 것이다.
혜월스님에게서 보니 화두라는 것이 따로 없고 말씀이 화두였다. 그리고 자주 공적영지(空寂靈知)를 들어 말씀하셨는데 이것이야말로 참선의 길이라고 생각이 되어 선방을 찾아 나섰다.
먼저 당도한 곳이 직지사 천불선원이다. 그때는 김제산, 윤퇴운 스님이 계시어서 납자를 제접하였다. 그 다음에는 동화사 금당선원으로 파계사로 운수 생활을 계속하였다. 그 무렵에 나에게는 입선 방선 시간이 따로 없었다. 밥먹고 볼 일이 끝나면 선방에 지관타좌(只管打坐)였다. 표주박 한 짝에 누더기 한벌로 흰구름 푸른 바람을 벗삼아 다니기를 3년이 지나서 우연히 서울에 들려 박한영 스님을 뵈었더니, 나에게 포교사로 나가라고 하신다. 그 당시 평안북도 지방에는 변변한 포교사가 드물었던 모양이다. 본산인 묘향산 보현사 주지가 박한영 스님에게 <당신의 제자 중에서 추천하라고 간청이 심하니 우선 가보라>하는 것이었다. 오래 있지 않아도 되니 우선 체면이나 세워 달라는 것이었다. 나는 생각하기를 이제까지 공비(公費)로 공부를 하였고 박한영 스님의 공적 사적 은혜도 많은데 이 어른의 뜻을 저버릴 수도 없다. 이제까지 배운 것을 대중에게 펴는 것은 이것이 또한 불자의 도리가 아니가 하는 생각이 들어 수일만에 승락하였다. 이것이 나의 한 전환기였다. 첫 부임지는 평안북도 영변읍이다. 그 이후 전등사 강사 개성 포교사 석왕사 강사도 지내고 인천 수원 등지를 돌아가 포교를 하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