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연 이야기
만삭의 어머님은 팔공산 갓바위 부처님을 친견하며 내려오시던 밤, 그 새벽에 나를 낳으셨다. 그 인연 때문인가. 지난 2003년, 불화공부를 시작하여 처음 옮겨 낸 아미타보살님과 두 번째의 지장보살님이 팔공산자락 아래 공산갤러리에 함께 모셔졌다.
불화에 대한 막연한 동경으로 동양화과 학부 1학년생이었던 1991년, 단청장 만봉(萬奉) 스님의 봉원동 화실을 무작정 찾았다. 스님을 뵙고 허락을 얻어 너른 마룻바닥에 엎드려 불화의 기본인 시왕초를 뜨며 여름방학을 보낸 것이 불화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러다가 1993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고려불화특별전’을 통해 고려불화를 친견하면서 느낀 가슴 벅찬 감동은 지금까지 나를 이 길로 이끌어 주게 되었다.
아름다운 불화를 그려낸 불모(佛母)가 누구였는지도 모르지만, 시공을 초월하여 불보살님을 그려내는 그의 손길과 숨결, 호흡이 느껴졌다. 불보살님의 모습을 그려내는 손길의 움직임을 따르듯이 섬세하고 유려한 선을 좇았으며, 화려한 채색에서는 코끝으로 향기라고도 할 수 없고 냄새라고도 할 수 없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이 지난 1998년 불현듯 불화공부를 제대로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을 찾던 중 용인대학교 이태승 교수님을 찾아뵙게 되었다. 교수님은 간송미술관 최완수 선생님의 제자로 우리의 불화가 가장 아름다웠던 고려시대의 화법으로 불화를 그리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공부의 끈이 이어지지는 않았다.
마음속에는 날이 저물도록 숙제를 남기고 있는 듯한 불안감과 무게감이 짓눌렀고, 어떤 위안도 치유가 되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2003년 더 늦기 전에 공부해야 한다는 굳은 마음으로 이태승 교수님을 뵙고 공부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4년이 지났다. 그 동안 유치원생이었던 아들은 초등학생이 되었고, 공부 성과는 지난 10월과 11월 두 차례의 전시로 내어보여지게 되었다. 이것은 내 스스로의 ‘발원’이기도 했다.
이생의 나의 소임
전시를 준비하면서 참 많이도 울었다. 수많은 어려움과 아픔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시작한 공부였기에 쟁틀 위 널판 위에서 엎드린 채 숨죽여 운 것이 얼마였는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절박함에 맘껏 울어버릴 수도 없었다. ‘어떻게 내가 여기에 이렇게 와 엎드려 있는 지…’, ‘그래 참 다행이다. 더 늦기 전에…’ 이러한 두 마음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벽, 운전하며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갑자기 쏟아지는 눈물과 함께 ‘불화를 그리는 일이 내 스스로 하는 일일까’ 하는 반문과 함께 불보살님들을 올 고운 비단 위에 옮겨 모시는 일이 이생의 나의 소임임을 깨닫게 되었다.
올 고운 비단을 고르고 물들여 다시 손바느질로 한 올 한 올 이어서 쟁틀에 메어 놓고, 하룻밤 물에 재우고 녹인 아교물과 명반을 섞은 교반수로 비단의 올들을 모두 메운다. 그때서야 임모의 경우, 원화에서 출초(出草)한 초본을 비단 아래에 놓는다. 스스로 초를 내고 수정해 나가는 과정을 필해야 하는 것이 용인대학교 불화전공대학원의 학풍으로 한 작품, 한 작품 시작할 때마다 저마다 많은 인고의 시간을 겪는다. 그래서 출초의 과정이 절반이라고 한다.
이렇게 비단 아래로 초본이 준비되면 쟁틀 위에 널판을 얹은 다음 삼배를 올린 후 널판 위 방석에 앉는다. 비단 아래로 비치는 초본을 따라 겸손과 절제의 선묘로 모든 불보살님들의 모습을 세우고, 천연안료인 석채를 얹고 금니로 화려함을 더해 불보살님들의 숭고미를 더한다. 이렇게 모든 과정을 서두르지 않고 충실히 해야만 마음속에 뜻한 불보살님을 비단 위에 모실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동안 전시를 준비하며 매일매일 발원했다. “내 아들에게는 하늘 같기만 한 엄마이고, 일상을 살아가야 하는 생활인으로서의 소임도 있으니 원하는 바 모든 불보살님들을 옮겨 모시는 동안 어느 하루라도 아프지 않고, 스스로 나약해지지 않기를….” 가끔씩 어린 아들은 엄마의 그림방을 조심스럽게 들어와서는 “엄마, 어디까지 그렸어? 이제 구름만 그리면 되겠네!” 하던 아들의 모습이 떠오른다. 방석을 내어 주면 그 자리에 앉아 그림 그리는 엄마를 조용히 바라보다가 어느 결에 잠이 들어 버리던 어린 아들. 순간순간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시간들이 흐르고 또 흐르는 지, 날을 더하고 시간이 흘러갈수록 일상의 소중함이 가슴 절절히 스며들어온다.
지금 하지 않으면, 지금 해주지 않으면 언제 지나버릴지 모르는 이 시간들. 이제 한걸음 더 내딛으며 흩어져 있는 처처불(處處佛)의 형상, 오랜 세월을 온몸으로 받으며 깎이고 부서지고 쓰러져 있는 흔적들을 좇아, ‘경주 남산에서 불국사 석굴암’까지의 모든 불보살님들을 올 고운 비단 위에 다시 모시고자 발원한다.
‘조용한 가운데 아름다움을 발하는 불화’
내 안의 모든 숨결과 알 수 없는 동경. 저녁에 아들과 산책하듯이 매 순간순간 코끝과 가슴에 스며들고 울리는 기쁨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불보살님들의 따뜻한 미소를 옮겨 모실 수 있기를 발원한다.
------------------------
예정화 _ 1970년 경북 대구에서 출생. 계원예술고등학교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를 졸업하였으며, 우연찮은 인연으로 용인대학교 예술대학원 회화학과에서 불교회화를 전공하였다. 대한민국 불교미술대전에서 특선, 장려상을 받았으며, 두 차례의 불교회화전을 가졌다.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