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보판다카와 부처님
어느때 부처니께서 기원정사(祈園精舍:절)를 나서려는데, 한 사내가 큰소리로 울고 있었습니다. 대중 가운데 우둔하기로 소문난 판타카(Panthaka · 槃特 : 반특)라는 수행자였습니다.
『판타카야 너는 왜 울고 있느냐?』
『부처님 저는 형이 가르쳐 주는 게송 [싯귀]를 아무리 해도 외울 수가 었습니다. 형은 저더러 희망이 없으니 돌아가라고 합니다.부처님 저는 어찌 해야 합니까?』
『너는 오늘부터 내 곁에 있으면서「쓰는 빗자루」란 말을 외우고 생각하여라.』
그러나 어쩌랴 판타카는 앞글자를 외우면 뒷글자를 잊고 뒷글자를 외우면 앞글자를 잊고 말았습니다.
『판타카야, 너는 대중들의 처소를 쓸고 닦을수가 있겠느냐』
『 네, 할 수 있습니다.부처님』
판타카는 매일같이 대중의 처소를 쓸고 닦았습니다. 그때마다 대중들은 그를 위하여「쓰는 빗자루」「쓰는 빗자루」하면서 함께 외웠습니다.
날이 가고 달이 흘러서 판타카는 마침내 이 말을 외울 뿐아니라, 그 깊은 속 뜻까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쓰는 빗자루」란 것은 티끌을 소제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럼 티끌은 무엇이고, 소제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렇지 번뇌< 잘못된 생각>가 티끌이고 지혜가 빗자루다. 내 이제 지혜의 빗자루로, 번뇌의 티글을 쓸어서 청정한 마음을 찾으리라.
그는 기쁜 마음으로 부처님께 달려 갔습니다.
『그래 무엇을 알았느냐?』
『 쓴다는 것은 지혜의 빗자루로 번뇌의 티끌을 쓸어 제마음을 찾는 것입니다.』
『착하다 판타카야 ! 너는 이제 눈을 떴구나.』
◆ 버림받은 천 사백만
천 육백년 한국 불교의 역사 속에는 아름답고 고귀한 향기와 공덕이 많습니다. 불교없는 한국역사, 부처님이 아니 계시는 한국인의 정신을 생각해 볼수 있습니까? 「우리 살 속, 뼈 속에 부처님의 길이 흐르고 있습니다」 <※ 씨올의 소리 79호-ㅡp16 함석헌 선생의「내가 불교인에게 바라는 것」중에서> 우리 역사의 영광은 물론이거니와 우리 역사의 실패와 병폐마저도 우리 블교, 불교인의 책임인 것입니다. 그것은 곧, 우리 불교인이 이 민족사의 정신의 주인이 되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깊이 다시 고쳐서 생각 안 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도 우리 불교, 불교인은 이 민족의 주인 노릇을 하고 있는가?」남이 우리를 비판한다고 해서가 아니라 우리가 주인된 자로써 마땅히 스스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얼마전 신문에 종교 인구 통계가 났습니다. 불교 인구 천 사백만, 그러나 나는 가슴이 철렁하였습니다. 그 천 사백만, 최대의 종교 인구, 국민의 거의 반절, 이 거대한 불교인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숫자로는 능히 주인되고도 남는데 부처님 이름으로서 불법의 이름으로서 지금 우리는 무슨 역사를 하고 있는가? 능히 민족의 소임을 짊어지고 가는가?
종교의 가장 큰 소임 가운데 하나가 교육하는 일일 것입니다. 교육을 통하여 백성들의 마음속에 부처님을 심어주고 불교의 정법을 깨닫게 하는 것이야말로 불국정토(佛國淨土)의 부촉[부처님의 당부]을 실현하는 최선의 길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 불교학교가 몇이나 됩니까?
해방 30년, 경이적인 교육시설의 팽창 속에 불교 학교가 몇이나 새로 생겨났습니까?
스님들의 전문 양성기관에 관해서는 우리가 논의할 분수가 되지 못하므로 접어두고, 일반 청소년을 상대로 하는 정상적인 의미의 불교재단경영 학교가 몇개나 늘고, 몇개나 줄었는지 관심조차 없는 것이 우리네 형편입니다.
필자는 고등학교 교직에 종사하고 있는 관계로 거의 매년 고등학교 졸업반을 지도하고 대학입학원서를 쓰게 됩니다만, 해가 갈수록 기독교 계통의 고등학교와 대학 등 교육기관이 놀랄 정도로 팽창하고 있다는 현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기독교 계통의 재단에서 설립한 학교가 아닌데도 학교 경영자가 기독교 신자인 경우에는 예외없이 학교 교육에서 기독교 정신을 표방하고 있습니다. 그분들은 전국적인 규모의 큰 재단을 만들어서 일반학교에 기독학생회를 설치하고 조직적으로 지원하는 일에 온갇 정성을 다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서울에 불교재단 고등학교는 둘 · 셋 밖에 없고, 일반 학교에 불교 학생회가 활동하는 곳은 열 곳을 넘지 않습니다. 활동이라고 하였지만 실상은 명목을 유지한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가르칠 선생도 없고, 배울 교재도 없습니다. 집회할 장소도 없고, 지도할 프로그램도 없습니다. 새로운 시대, 풍토속에 있는 젊은 그들에게 반야심경이나 외우게 하고, 초발심자경문이나 해석해 주어서 교육이 되겠습니까? 천 사백만 교육 받지 못하는 불자들의 무리, 방황하는 수 백만의 불자의 아들, 딸들 참 기가 막히고 슬픕니다.
◆ 민중 교육의 등불을 밝힐 때
「석가모니」는 교사이십니다. 그래서「천인사」(천인사 ~ 하늘과 인간의 스승), 「삼계도사」(온 누리를 인도하는 스승)라고 칭송합니다.「천인사」가 누구입니까? 한 귀절의 글마저 외우지 못하는 판타카와 같이 어리석고 열등한 제자[중생]일지라도, 버리지 않고 손목을 잡아 가르치시고 정성을 다하여 깨우치시는 『인류의 교사』인 것입니다.
「삼계도사」가 누구입니까? 「너는 가르쳐져도 희망없는 저능아」라고 저버린 자식을 찾아서 이 세상 끝까지 나아가 수고하시는 외롭고 외로운 교사이십니다.
상가(Sangha. 승가- 불자공동체)는 곧 교육을 최대의 사명으로 삼는 교육 공동체, 수련 공동체 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자기 교육[상구보리]에 힘써야 할 뿐 아니라 공동체의 모든 성원과 이 시대를 하께 살아가는 모든 동포들에 대한 교육[하화중생]에 헌신해야 할 본질적인 책무를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오늘의 학교 교육에 대한 책무가 되는 것입니다.
본래 부처님의 교육이념은 넓고 넓어 차별이 없는 것이지만, 중생교육을 더욱 소중히 하십니다. 중생교육이란 보통 교육이고, 보통 교육이란 곧 오늘날의 일반 교육, 학교 교육을 뜻하는 것입니다.
선가에서는「세곳에서 마음을 전하였다(三處傳心)」하여 뛰어난 자[상근기]들을 위한 일종의 천재 교육, 엘리트 교육을 강조하는 듯 합니다만 오히려 마지막 임종의 순간까지도 어리석고 못난 중생들을 찾아서「모든것은 바뀌어 가거니, 게으름없이 힘써 정진하라」< 잠아함경ㅡ 4권> 이렇게 간절히 가르치신 부처님의 중생 교육의 크나큰 열정과 염원을 우리는 더욱 소중히 생각합니다.
우리 불교인이 과거 한국사에서 주인노릇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민중교육의 공덕이었던 것입니다.
지난 날 스님은 스승님이었고 절은 거의 유일한 민중학교였던 것입니다. 원효스님과 만해 한 용운 선생을 우리가 한국사의 성자로서 높이 평가하는것은 이분들이 부처님의 민중교육의 이념을 가장 열정적으로 실천한 민중의 교사인 때문입니다.
신라의 승직자들이 왕실 불교의 권위와 영화에 탐착할 때 원효는 스스로 승복을 벗어버리고 복성거사(卜姓居士)가 죄어서 천촌만락(千村萬落)을 헤매며, 민중에게「나무아미타불」을 교육하였습니다.
이 교육의 힘이 삼국통일의 근본 동력이 된 것 아닙니까?
왜정시대 이 나라의 승직자들이 꿀먹은 벙어리로 전락해 갈 때 「만해 한용운은 스스로 두루마기 입은 속인이 되어서 인간이 만약 편히 살면서 가르침이 없으면 금수와 비슷해진다」하고,「배움에도 요령이 있는가? 물론 있다고 해야 한다. 지혜로 자본을 삼고 사상의 자유로 법칙을 삼고, 진리로 목적을 삼음이 그것이라」<※ 불교 유신론>하여 근대 민중교육의 기본이념을 제창하니 이 외침이 만세운동의 함성으로 터져 나온 것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 불교인은 민족사의 주인 자리로 돌아가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학교를 세우고 학교마다 불교 학생회를 만들며 학교를 경영하는 불자는 불법을 건학정신으로 표방해야 하고, 모든 불자는 제 선 곳에서 교사로 나서야 할 것입니다.
우리 불교, 불교인이 발분망식 힘써야 할 일이 많지마는 전불자가 총력을 기울여 불교 교육 혁명을 일으키는 일이야말로 시간을 다투는 일대사(一大事)이고 부처님을 맞이하는 진정한 등불이 아닌가, 조용히 생각에 잠겨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