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經)의 첫머리
이와 같이 내가 들었노라.
한 때에 부처님께서 사밧티(Sravasti)의 기수급고독원(--기원 정사가 있는 동산)에 계시면서, 천이백오십인의 대중들과 함께 하시었다. 이 때에 세존께서 식사할 때가 되니까,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가지시고, 사밧티 성에 들어가시어, 그 성 가운데에서 차례로 밥 빌기를 마치시고 본래 계시던 곳으로 돌아오셨다. 공양하시기를 마치시자, 가사와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고 자리를 펴 앉으셨다. 때에 장로 수보리가 대중 가운데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오른 어깨에 옷을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붙이고 합장 공경하고, 부처님께 사뢰어 말씀하되, [회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하였다.<*금강경 제1--제3장>
*의 식 주
앞에 인용한 문장은 금강경의 첫머리이거나와, 부처님의 말씀을 서술하는 경전은 대개 이와 비슷한 형태로 그 서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경의 첫머리를 읽을 때마다 새삼 크나큰 놀라움과 기쁨을 느낍니다. 해묵은 사진첩에서 빛 바랜 자신의 어린 얼굴을 찾아내는 그런 심정이라 할까요.
[회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이렇게 외치며 무릎을 꿇는 수보리 환희, 그것은 바로 [아, 이것이었구나. 내가 찾던 그 모습이!]라고 부르짖는 우리들 자신의 감격인지 모릅니다. 금강경은 여기에서부터 시작되고 있습니다만 실상 금강경은 [회유하십니다. 세존이시여],하는 이 한마디로 끝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목말라 갈망하던 님의 모습을 정녕 너무도 명백히 보았는데, 또 무슨 사설이 남아 있단 말입니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부처님은 홀로가 아니었다는 진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이 주하신 곳은 궁벽한 산골이거나, 특히 맘을 먹어야 겨우 찾아길 수 있는 그런 외진 곳이 아니었습니다. 마가다의 라자그라아(Raja-graha)코살라의 베살리(Vesali), 사밧티등 부처님의 활동 중심지는 갑남을녀들이 아우성치며 득실대는 그런 도회지였습니다. 부처님이 주하시는 정사는 이런 번잡한 도회지의 변두리에 있었습니다. 이런 곳을 흔히 적정처, [고요한 곳]이라고 불리지만, [고요하다]는 것은 [인적이 드물다] [홀로 산다]는 것이 아니라, 동포와 더불어 함께 살되 결코 흔들림이 없는 [견고한 신념]을 뜻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부처님이 입으시는 옷모양을 살펴보려고 합니다. 부처님은 매양 분소의라고 불리는 옷을 입으셨는데, 분소의란 것은 글자대로 풀이하면[똥걸레 옷]이란 뜻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쓰다 버린 헌 옷이나, 혹은 공동 묘지에 버려져 있는 낡은 배 조각들을 모아다가 깨끗이 빨고 조각조각 기워서 만든 것입니다. 가사란 바로 이렇게 해서 만든 걸레 옷에 불과한 것입니다. 때로 뜻있는 신자들이 아름다운 가사를 만들어 공양하면, 부처님께서는 고맙게 받아서 제자들에게 나눠주고 스스로는 거의 걸레 옷으로 만족하셨습니다. 부처님은 하루 한 번 오전에 식사 때가되면 발우 하나를 들고 맨발로 걸어서 걸식을 나가십니다. 나가서 밥을 빌되, 빈부를 가리지 않고 차례대로 행하셨습니다. 이렇게 차례대로 걸식하는 것을 탁발한다고 합니다. 부처님이 누구신가? 부처님은 어떻게 사셨는가?
이렇게 부르짖으며 우리는 수많은 모습을찾아 헤메고 있습니다만 그는 참으로 이와 같이 사셨습니다. 초라한 소시민들이 어울려 아귀다툼을 벌리는 마을과 저자 거리에서 조각조각 기운 걸레 옷을 걸치시고 맨발로 걸어서 차례대로 밥을 비는 너무도 작은 사람, 그는 참으로 아와 같은 분이십니다. 팔심 노구, [아난다야, 나는 이제 여든살, 늙고 쇠하였다. 내 육신은 마치 낡은 수레가 가죽 끈에 매여 간신히 움직이고 있는 것과 같으니라.] (*장아함경--권2), 마지막 임종의 순간에까지도 부처님은 이렇게 살기를 바꾸지 아니 하셨습니다.
*참에서 깨어나야
먹고 입고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요즘 절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온갖 재주와 능력을 기우려 이 문제를 해결하는 일에 진력하여 왔고 현대 사회의 모든 국가들도 [경제건설]을 지사의 복음처럼 외치고 있습니다. 인류의 최대 소망은 [잘 사는 데] 있고 의, 식, 주의 보다 풍성한 향유가 잘사는 삶의 기준이 되는 것이며, 이 거룩한 목적을 위해서 인간의 내면적 가치같은 것은 유보 또는 폐기 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당당한 논리 앞에 우리는 다만 무력할 뿐입니다. 이렇게 하여 인류는 경제 동물로서의 종족진화를 강요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나와 당신을 바로 이와 같은 종족변질의 위기에서 제도하려 하심입니다. 경제 건설한 마음에 정신 문화 개발하리라는 현대 문화의 청사진이 얼마나 허망하고 위험한 것인가를 일깨우기 위하여 부처님은 [똥 걸레옷]을 걸치시고, 맨발로 걸어서 밥을 빌고 계십니다. 경제 건설의 신화가 성취되는 날은 인간이 이미 인간이기를 그만두고 개나 돼지와 같은 한갖 동물로 진화한 때인데 개나 돼지에게 자유니 순결이니 하는 정신 가치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아파트 사건으로 몸을 불태우는 이웃들이 가난한 서민들이 결코 아니라는 현실이 이와 같은 진실을 진실 그대로 증명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을 웃고 무엇을 기뻐하랴. 세상은 쉬임없이 타고 있는데, 그대들은 어둠 속에 덮여 있구나. 어찌하여 등불을 찾지 않는가]<*법구경--노모품--146>
부처님은 오늘도 등불을 밝혀들고 마을과 거리를 찾아 행진하고 계십니다. 하루 한번씩 차례대로 밥을 비시는 짓은 세상의 불길이 그만큼 거세기 때문이고, 멸망의 잠에서 세상 사람들을 일깨워 주시려는 부처님의 큰 자비가 너무도 자극하신 때문이 아닙니까? 저와 같이 작고 겸허한 삶, 이것이야말로 정신과 물질이 더불어 하나인 내 본래의 삶에 대한 가장 진실한 대답이고, 정신과 물질을 함께 살리는 영원한 번영의 원리가 아닌가, 조용히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