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사성
상태바
왕사성
  • 관리자
  • 승인 2007.12.19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인도 체류기

  영축산으로 올라가는 길은 돌계단으로 되어 있다. 마가나 국 빔비사아라 왕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기 위하여 돌계단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현장의 기록은 다음 같이 말하고 있다.

  <독수리가 산다고 하여 영축산(기리다라쿠타) 부처님은 여기서 여러 차례 설법하셨다. 빔비사아라왕은 설법을 듣기 위해서 너비 10여 보, 거리는 약 5리의 돌계단을 쌓았다. 도중에 작은 탑이 두개 있는데, 그 중 한탑 앞에서 왕은 말에서 내려 걸어갔다. 부처님이 설법하시던 자리에는 벽돌로 지은 정사가 있고 그 곁에 큰 돌이 보인다. 여기서 반역제자인 대바, 난다가 부처님에게 돌을 던졌다고 한다. 그 남쪽에 탑이 있고 여기서 부처님은 법화경을 설법하셨다.>

  성도후 45년간 부처님의 포교생활은 보고 갠지스강 북쪽에 있는 사위성(슈라바스티)과 왕사성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왕사성에서 부처님은 주로 죽림정사와 영축취산에 주석했다.

  선종에서 말하는 삼처전심 중의 한 장면인 염화미소도 이 영축산에서 있었던 사건이라 한다. 이 영축산 위에서 제자 가섭은 꽃을 쳐든 부처님을 향하여 <슬쩍 미소를 보이므로> 이심전심이 성취되었다. 영축산정에서 먼저 건너편을 바라보면, 마가다 시대의 외성벽이 보인다. 길이 40km의 성벽은 왕사성을 에워싼 네 산의 능선을 달리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에는 네 산들만 사방 평지에서 솟아나 있을 뿐, 사방은 광막한 평야다. 그래서 훌륭한 천연 요새지가 될 수 있었다. 언제나 외부의 침입을 예상해야 했던 B'C 5'6세기 경의 마가다 주변의 정치정세였다. 주변의 정치정세는 불안한 때였다. 정치적 불안은 마가다 시대뿐 아니었다. 인도 역사의 정권을 잡았던 역대 지배군주들은 한결같이 언제나 외침과 내란의 위기를 예상하고 있어야 했으므로 좌불안석이었다. 그들이 세상을 달관한 성자의 문을 두드리고 교시를 전한 동기는 다분히 심리적 불안에서 연유되지 않았는가 한다.

  빔비사아라 왕도 사랑하는 아들의 반역으로 옥사하지 않았던가.

  왕사성은 또 부처님의 45년간 설법을 경전 형식으로 교리하는 <결집>이 처음 이루어진 곳이다. 파트나에서 왕사성으로 들어가는 북문 바른편에 바이발타산이 있다. 이 산에 제일 결집장소인 <칠엽굴>이 있다. 오늘의 굴의 크기나 장소조건에서 5백 비구가 집합하였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부처님의 입멸직 후 서둘러서 부처님의 45년간 설법을 정리화한 것은 교단 내에 불순분자가 있어 부처님의 설을 가탁하여 이설을 불설로 유포할 징조가 보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부처님 같이 교단내의 엄격한 계율제도를 탐탁치 않게 여기던 일부 불평분자들은 부처님의 입멸은 계율적 구속으로부터의 해방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래서 설법과 함께 설계의 정형화도 요청되었다. 그래서 부처님의 만년에 그를 시봉했던 아난다가 경을, 그리고 이발사 출신으로 제자가 된 우팔리가 율을 암송하고, 모든 결집회의는 염화미소의 주인공 가섭의 주재하에 진행되었다. 그후 교단을 가섭이 부처님의 뒤를 이어 지도했고,아난다가 가섭을 이어 오랫동안 교단의 지도자가 되었다고 한다. 초기불교교단사에서는 주요한 인물들이다. 오늘의 칠엽굴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바아발타 산정에 부처님이 육사외도에 포함시킨 쟈이나교의 교조 마하 ' 비라 사원이 있다. 쟈이나교조 마하 ' 비라는 시대와 출신지역 신분이 부처님과 비슷하기 때문에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던 학자까지도 나타났다. 마하 ' 비라의 포교지역도 초기에는 불교와 비슷하여, 왕사성을 둘러 싸고 있는 산봉우리마다 쟈이나 교의 절이 있을 정도다. <공의>로 알려진 나형외도의 사원도 있다고 한다. 나형외도는 쟈이나 교의 정통파를 가리킨다. 철저한 <무소유> 계율은 승려에게 나체주의를 따르게 했다.

  칠엽굴과 마하 ' 비라사는 한 봉우리 위에 나란히 공존하고 있다. 단일 가족만의 존재이유를 주장하는 일신교의 아집과는 다르다. 오늘의 왕사성에는 이슬람교도도 힌두교도와 함께 평화스런 가운데 공존하고 있다.

  왕사성의 명물로는 온천을 빼놓을 수 없다. 현장도<온천의 물이 맑다>고 기록했다. 온천은 칠엽굴과 영축산 사이에 있다. 버스 정류장과 휴식처, 가게들도 온천장 부근에 있다. 현장이 왔을 때는 <맑은 물>이었을는지 모르지만, 오늘의 온천수는 갠지스 강물처럼 맑지 못하다. 인도 각지에서 온천에 목욕하려고 여기 모여든다고 한다. 온천의 시설은 계단식으로 잘 되어 있었다. 성자 수도자들의 목욕소와 남녀 목욕소가 별도로 구분되고 있을 뿐, 캬스트의 구별은 없는 듯 보인다. 그러나 성자나 수도자가 부라흐만이란 사실을 고려할 때, 캬스트의 구별은 표면상 없다고 하지만, 아직 남아 있다는 인상을 준다. 성자들만이 목욕한다는 곳으로 가보니, 흘러내리는 온수를 머리 위로부터 받으며 한 늙은 성자가 요가의 자세로 앉아 있고 그를 향하여 4, 5명의 남녀신도가 목욕소 밖에서 경배하고 있다. 성자의 마음은 풍성할지 모르지만 경배하는 신도들의 모습은 가난하게 보인다. 그중 한 사람이 성자를 위한 희사를 나에게 권한다. 성자를 위한 희사는 나의 장래에 반드시 좋은 과보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유창한 영어로 말한다. 성자를 수행 시봉하는 비서라고 옆 사람이 귀뜸해 준다. 그래서 성자에서 왜 희사금이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성자에게 겨울옷이 필요하다는 대답이다. 날씨가 추운 북국에서 찾아 온 나는 이국 성자의 겨울 내의를 위하여 선뜻 희사를 하고 주소 ' 성명을 적으려는 그를 피하여 얼른 그 자리에서 나왔다. 이 부근의 추위에 겨울 내의가 필요치 않음을 알고 있고, 또 정말 성자라면----더구나 요가에 달통한 성자라면----인도의 추위에 내의는 더욱 필요없다. 겨울 추위에 내의가 필요한 북국에서 내가 찾아왔음을 비서는 직업적 눈치로 알았던 것이다. 그러나 정좌의 자세로 온수물을 맞으며 하늘을 쳐다보는 성자의 눈만은 맑고 깨끗했다. 사람을 끄는 위력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나도 그 평순한 눈에 끌려서 선뜻 희사에 응했을는지 모르겠다.

  내 자신이 너무나도 맑지 못하고 밝지 못한 보상심리에서. 


인기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최신 불교 뉴스, 월간불광, 신간, 유튜브, 붓다빅퀘스천 강연 소식이 주 1회 메일카카오톡으로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많이 구독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