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생은 문자 그대로 어리석은 범부다. 이들 중생의 특징은 자기 자신을 모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육체이거나 물질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때로는 의식이나 마음이 자기이거니 생각하기도 한다. 또는 영혼을 끌어다가 자신이라고 한다. 그 어느 것에 확신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살아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물질을 얻기 위하여 또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또는 고난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사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욕망의 도구가 되어 욕망의 종인 듯이 살기도 한다. 목표가 있어서 사는 듯하지만 그 목표라는 것이 장구한 것이 못된다. 그때그때 끊임없이 바뀐다. 물질 향락 안락을 추구하지만 그 모두를 채워서 만족하지도 않는다. 정말 무엇을 바라고, 채우고자 하는지 알 길이 없다. 이것이 중생이다.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한걸음 한걸음 한치 앞을 모른다. 전후좌우를 모른다.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 뿐이 아니라 전후좌우 모든 것이 바쁘게 돌아간다. 강물처럼 그 보다도 더 빠르게 쏜살처럼 달려간다. 온갖 환경이 흘러가고 자기 몸도 바뀌고 마음이라는 의식조차도 머물러 있지 않다.
밥을 먹고 살고 쾌적한 환경으로 둘러싸여 살고 행복의 떡을 먹고 산다지만 먹고 사는 주인공을 알지 못한다. 이래서 중생은 자기를 모르고 허겁지겁 살아간다. 생각나는 대로 또는 깊은 반성으로 또는 남이 가는 데로 휩싸여서 뒤지지 않으려고 재빨리 살아가지만 역시 무엇이 산다는 것인지 물어 보면 대답이 막힌다.
근원에 대하여는 생각할 겨를이 없이 그때그때 일어나는 상황과 생각을 조화시켜 가면서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높은 목표 확고한 결심, 신념으로 산다고 하더라도 그 목표, 신념이 또한 가공적인 것이다. 이래서 무지 속을 헤매고 있는 것이 중생의 제 모습이다.
중생들은 묘한 습성이 있다. 자기를 둘러싼 온 세간이 끊임없이 흘러가고 자신의 몸마저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속에 있으면서도 변화하는 줄 모른다. 그리고 이것이 영원하거니 한다. 밤낮으로 끊이지 않고 부정한 물건이 온 몸에서 풍겨 나오건만 그런 줄을 모른다. 지극히 깨끗하다고 생각한다. 자기 몸이나 자기를 둘러싼 온갖 현상들이 겉 현상일 뿐 실로는 텅 빈 물거품처럼 허황한 환처럼, 허무하건만 거기 실체가 있다고 생각하고 집착한다.
그 몸 굴려가며 산다는 생활은 만사가 필경에는 허물어짐이요 죽음이요 무(無)를 실현해 가건만 그것을 모르고 꿀 같은 즐거움이 마냥 이어질 것으로 생각한다. 이래서 중생이다. 착각을 일으켜 허황한 생각에 사로 잡혀 사는 것이다.
이상은 중생이 의식하는 세계이고 중생의 현상세계다. 중생이 착각을 일으켜 보고 사는 세계이다. 그러나 인간이 의식하는 중생의 표층현상은 비록 그러하지만 지혜의 눈으로 보는 바 중생의 참모습은 전혀 다르다.
구름 덮인 하늘이 온통 어둡게만 보이지만 이것은 중생의 망견이고 실상인즉 푸른 하늘 찬란한 태양은 하늘의 본색이며 불변의 원상이다. 중생이 그렇다. 법성 진여 불성으로 불리우는 진리성이 태양처럼 찬연히 허공처럼 끝없이 열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의 원상이다.
실로 중생은 중생이 아니라 원래로 법성의 주인공이었다. 법성의 무한공덕은 원래부터 지니고 있는 신성 존엄한 근원적 권위의 주인이었다. 중생의 실상을 깨우치면 부처님이라 하고 미혹한 부처님을 중생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혜능(惠能)조사는『중생을 알면 곧 불성이라.』하신 것 같다. 중생은 천상, 인간, 삼악도로 흩어져 산다.
[불교용어해설] 범부(凡夫) · 중생(衆生)
- 관리자
- 승인 2007.11.05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불교용어해설
저작권자 © 불광미디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