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세상의 대부분의 사람은 누구나 결혼을 통하여 부부가 되며 남편과 아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고 한 가정을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요즈음 신세대 젊은 부부들은 자신의 남편을 ‘우리 신랑’이라고 지칭한다든가, 상대를 ‘자기’ 또는 ‘··· 씨’로 부르는데 처음 들을 때는 귀가 스멀거리고 도무지 불편하고 해괴한 느낌마저 들던 기성세대 어른들도 이제는 귀에 익어 젊은 사람들의 유행쯤으로 알고 지내게 되었다.
젊은 부부를 둘러싼 이같은 신세대 풍속도를 보면서 결혼의 의미라든가 부부가 살아가는 모습이 변화해 가고 있다는 것을 피부로 느끼곤 한다. 부부간의 호칭은 어느 시대에나 그나름대로 있어 왔고 어떤 특정시대에 쓰여지는 호칭에서 우리는 언뜻 남녀 부부관계의 위상을 엿볼 수 있어 흥미롭다.
옛날 우리 할머니들은 신랑 얼굴도 모른 채 시집가서 층층시하에서 며느리의 법도를 지키며 대를 이을 아들을 낳아주는 것이 인생 최대의 의무이고 목적이었다. 이들은 엄격한 남존여비의 상하계위적인 가족 문화 속에서 여필종부하고 부창부수할 뿐만 아니라 부부유별이라는 부부관을 철저히 익혀 실천해야만 덕있는 지어미의 월계관을 쓸 수 있었다. 이같은 시대를 살아온 우리 할머니들이 배우자를 문자 그대로 ‘하늘 같은 지아비’로 모시고 살았다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안채에서 봉제사 접빈객의 대임을 수행하느라 종종걸음을 치면서도 자신의 남편은 ‘사랑채 어른’으로 공경하고 극진히 떠받들고 살았던 것 같다.
얼마전에 돌아가신 시어머니도 당신 남편을 항상 ‘그 어른’으로 호칭하셨는데 일상적인 모든 태도가 ‘그 어른’을 모시고 사는 것이 몸에 배인 분이었다. 처음 들었을 때는 이상하기도 하고 얼떨떨했지만 시어머니의 삶 속에 자리잡고 있는 ‘어른’ 남편은 그 누구도 바꾸어 놓을 수는 없는 구시대 부부의 한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빨리 익숙해지려고 노력했을 뿐이다. 이렇게 옛날 할머니들이 인식하고 있는 부부관계는 높은 자리에서 군림하는 어른으로서의 남편이었고 사회가 요구하는 그늘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겉으로 그런 척이라도 하며 살았던 분들이었다고 생각된다.
지금 60년대 전후의 여성들은 동회에 증명서 떼러갔을 때 ‘아주머니 주인 이름이 뭡니까?’라는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남자들뿐만 아니라 우리들 자신도 자기 남편을 지칭할 때는 자연스럽게 ‘우리 주인은’이라고 서두를 떼는 경우가 허다했다. 어른이 주인으로 바뀌는 데에는 한 세대가 필요했고 그 다음이 주인이란 호칭과 더불어 ‘우리집 남편’이란 호칭을 쓰는 세대가 나타났던 것이다. 남편 아내는 현재 우리가 보편적으로 쓰는 부부 호칭이 되었지만 신세대들은 다시 남편보다는 ‘우리 신랑’이라고 말을 더 많이 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연로하신 분들 중에는 ‘할망구’ ‘여편네’ ‘내자’ ‘집사람’이라는 말로 지칭하고 심하게는 ‘우리집 밥쟁이’라고 자기 아내를 소개하는 사람도 있다. 낮출 수 있는 만큼 다 낮추어 부르는 것이 무슨 예의인 양 알고 있는 남편들도 적지 않다.
자신의 배우자를 ‘어른’, ‘우리 주인’, ‘남편’ ‘우리 신랑’이라고 각각 부르는 세대들은 각자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의 부부관을 반영하고 있으며 아내와 남편의 관계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하늘 같은 남편’이 농담반 진담반으로 돌아 다니고 있는 것들 역시 과거 우리들의 불평등한 부부관계의 모습이 전통의 이름으로 여전히 부부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구타를 일삼는 남편들이 그들의 아내를 때리는 가장 큰 구실 중의 하나가 ‘하늘 같은 남편을 무시하는 x‘라고 욕을 하면서 무차별 구타를 한다는 사실이다.
구타 남편들의 대부분은 남존여비의 성고정관념을 신봉하는 사람들이며 남편 말에 고분고분하지 않기 때문에 시집을 공경하고 남편의 권위를 무섭게 알도록 ‘가르치려고’ 마치 노예를 길들이듯이 폭력을 행사한다고 궤변을 늘어 놓는다. 이들의 의식 속에는 아내는 철저히 자신의 소유이며 여자는 남자 저 아래 있다는 남성권위주의적인 생각이 깔려 있다.
결혼식장에서 우리가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부부는 평생의 반려(伴侶)라는 말이다. 사전에 나타난 반려의 의미는 ‘생각이나 행동을 함께하는 짝이 되는 동무’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부부 주변에서 쓰여지고 있는 남편 예속적인 말들은 어른이나 주인으로 상하 위계적인 관계로 짝이 기울어져 있는가 하면 ‘조강지처는 버리면 안 된다’는 식으로 줍고 버리는 의식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다. 전통적인 부부관계의 틀에서 보면 아녀자 수준에서 아내가 한 사람의 독자적인 인격체라는 의식은 어디에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겉으로 평등한 부부관계를 표방하고 ‘자기’라고 부르면서 부부가 서로 반말을 쓰는 신세대 부부들의 의식은 어떤지 궁금하다. 매맞는 여성 중에는 신세대 아내도 상당수 끼어 있는데 이것은 신세대 부부도 겉모양만큼 부부관계가 민주적인 의식에 못미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신세대들에게 부부는 일심동체라는 말을 하면 피식 웃는다. 합리적이고 개성이 강한 이들은 안개 피우는 말보다는 부부는 이심이체(二心二體)라는 말이 훨씬 솔직한 현실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한국 가족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우리나라의 모자는 지나치게 고착적인 관계라는 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가부장사회에서 여성들은 대를 이을 아들의 어머니라는 지위의 확보가 생존과 연결되었었고 산업사회의 남편부재인 핵가족 안에서 자녀교육의 책임을 맡아 주부는 현모양처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에서 특수한 모자관계가 이루어진다고 보는 것이다. 희생적인 어머니와 사랑받는 아들의 관계는 아들이 성장하여 결혼을 한 후에도 감정적인 분리가 잘 안 되어 고부문제의 불씨가 되기도 하고 어머니 의존적으로 자란 아들은 성숙한 남편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해 부부갈등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아내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의 반려자로서 ‘큰애기’ 같은 남편과 성숙한 부부관계 - 독립적이며 상호협력적인 부부관계를 기대하기란 어려운 것이 아닌가 한다. 뿐만 아니라 아들을 떠받들어 주는 가정에서 자란 아들은 남자 먼저라는 성차별적인 생각에도 길들여져 있다는 생각에 미치면 이들 신세대 부부는 겉다른고 속다른 부부관계를 맺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신세대 여성들은 자신들은 평생 주눅이 든 채 희생하며 아버지 뒷바라지만 하는 어머니 같은 부부생활은 안하겠다고 한다. 또 남학생들은 말도 안 통하고 아이들과 친해지려는 노력조차 기피하는 권위주의적 자기 아버지 같은 남편은 결코 되고 싶지 않다고 한다. 그러나 신세대들이 격변하는 사회에 걸맞게 새로운 부부관계를 발전시키고 싶다며 부모세대의 부정적인 부부관계 부분을 비판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에서 일보 더 나아가 최소한 부부관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더불어 부부가 함께 행복할 수 있는 가정을 이루기 위한 실천 의지를 먼저 다지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먼저 한쪽의 희생적인 삶을 요구하며 아내의 능력과 세계를 인정하지 않는 구시대적인 부부관이 변화되어야 한다. 그리고 부부관계를 협동하고 서로 배려하며 사랑과 인간적인 친밀감으로 상호 보완적으로 인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겉으로 화목한 부부, 잉꼬부부로 포장되면서도 속으론 남편아래 엎드려 있는, 아내의 한과 눈물이 번져나오는 이중적인 부부관계는 더 이상 기피하기보다는 아듀를 고해야 한다는 말이다. 겉다르고 속다른 부부관계는 행복한 부부일 수 없으며 건강한 인간관계도 아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