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용어해설] 보리(普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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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해설] 보리(普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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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2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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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용어해설

「보리」는 범어의 보오디(bodhi)를 적은 우리 불교의 관용어인데 한문으로는 「普提」라고 적는다. 원 뜻은 깨달았다는 의미다. 지혜 또는 도(道)라고도 번역된다.

  이 깨달음은 부처님 뿐만 아니라 성문·연각 모든 tdj자가 성스러운 도과를 얻은 것 까지도 의미하지만 그중에서 부처님의 깨달음이 최상이으로 「보리」라고 일러오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득각 또는 무상보리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보리」는 부처님의 무상보리를 의미한다.

  이 깨달음을 구하여 수행하는 수행자를 보살이라고 하는데 보살은 깨달음을 구하는 중생이라는 뜻이 있다. 부처님께서는 인도 부다가야 숲에서 아슈바타라는 나무밑에 앉아 수행하여 무상보리를 이루셨는데 그 나무를 보리수. 부다가야를 보리도량이라고 한다. 어쨌든 보리는 세존의 깨달음과 관련된 모든 여건에 붙여서 즐겨 쓰는 말이 됐다.

  그런데 부처님의 깨달으신 보리란 무엇일까. 「이것이 보리」다 하고 과실을 손을 쥐어주듯이 일러 주어도 알기 어려운 것이 보리다. 그러나 방대한 경전에 나타난 것을 유추하여 보리의 내용을 대강 말하기도 한다. 사제(四諦), 십이연기(十二緣起), 중도(中道)의 가르침이라든가 무상(無常), 무아(無我) 열반의 가르침이라든가 오온(五蘊)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교설 등을 들어 보리의 내용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러한 설명은 부천미의 「말씀」이요, 깨달음의 말씀이지 「깨달음 자체」는 아닌 것이다. 무아·무상의 가르침도 중생의 아(我)와 상(常)에 대한 견해이시고, 오는 십팔계도 각안으로 보신 중생계의 해명이시지 그러한 교설을 낸 부처님의 깨달음 자체는 아닌 것이다. 우리들이 주의할 것은 보리는 철저하게 「깨달음 자체」라는 점이다.

  그러면 「보리」란 어떤 것일까? 경에서는 말씀하셨다. 법 그대로 완전하게 도를 닦아서 이른바 「적정명정(寂靜明淨)」경계라 하였다. 「극청정(極淸淨)」에 이른 것」이라고도 하였다.

  부처님께서는 극청정한 보리에 네 가지 기본상이 있는 것을 말씀하셨는데 첫째는 생기연(生起緣)이요, 둘째는 멸진연(滅盡緣)이요, 셋째는 법과(法果)를 사무친 것이고, 넷째는 「청정법계의 체(體)」라고 하셨다. 극청정한 보리자체를 설명하지 않으시고 그의 네 가지 특성을 말씀하신 것이니 원래 보리 자체는 말이 이를 수 없으므로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이해가 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생기연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보리가 세간에 있어 여래가 상속한다.」는 것이다. 즉, 보리가 여래라는 말이다. 보리가 영원히 세간에 항상 하여 여래가 영원한 것을 의미한다. 이점에서 볼 때 부처님이 영원하시고 일체시간 일체국토에 여래가 영원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여래를 형상을 두고 말하고 있지 않다. 보리 즉 깨달음, 법이 영원하여 여래가 영원한 것이다. 정토와 예토가 따로 없다. 일체 곳에 여래가 나타나시어 일체시간에 상속하시니 어느 때를 다시 정법시대를 말하고 말법시대를 말할 것인가. 영원한 부처님, 영원한 정법시대를 알 수 있는 것이다.

  무엇이 멸진연이라 하는가. 「세 가지의 근본번뇌 종류가 이법에 의해서 영영 멸해 없애진다. 」하였으니 세 가지 번뇌란 바로 탐진치다. 보리에는 탐진치 삼독이 영영 멸하고 없다. 보리가 머무는 곳에 일체 번뇌가 없다는 말을 밝은 햇빛아래 어둠이 자취를 감추는 것과 비유할 수 있다. 보리에는 번뇌가 없고 다시 일어날 뿌리도 없다. 보리가 이르는 곳에 일체 번뇌가 멸진한다는 이 사실을 명심하자.

  무엇을 법과라고 할 것인가. 경에는 「진여(眞如)를 통달하여 과(果)를 증득한다」하였다. 진여란 법의 체성이다. 완전한 전성(全性)이다. 법의 전성을 통달 체득했다는 말이다. 보리는 진여의 무한공덕을 통달하고 완전히 갖춘 것이다. 그러므로 깨달음에서 일체지혜 일체위력 일체공덕을 완전히 갖추게 된다.

  무엇을 법계의 매체라고 하는 것일까 경에는 「모든 결박과 얼킴을 멸하여 가장 청정한 법계를 나타내는 곳」이라 하였다. 중생적 대립이나 관계나 속박이나 얽힘이 자취가 없어 청정본연상이 명랑하게 전체 현전하였다는 말이다. 자유, 완전, 청정, 해탈, 무한, 영원, 자존, 모든 덕성을 원래로 갖춘 것이다.

  이것이 무상보리요, 보리의 성품인 것이다.

  이 보리의 네 가지 모습은 보리를 직접 설명하는 기본이 될 것이다. 우리들은 보리가 이런 것이며, 이 보리가 우리의 자성이며, 자성에 이르러서 이 4 종상이 의연함을 새겨야 할 것이다.

  보리는 이와 같이 최상 최극이다. 우리가 수행하여 이르는 무상의 것이다. 바로 부처님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야 무상보리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경에는 네 가지를 말씀하고 있다.

  첫째는 부처님의 깨달음의 법, 대승의 법을 즐겨 닦기를 원하여야 하고, 둘째는 항사 반야바라밀을 닦으며, 셋째는 생사집착심을 여의고, 넷째는 항상 대비행(大悲行)을 닦아야 한다고 하였다.

  깨달음의 법, 대승의 법을 멀리하고서는 보리를 이룰 수 없는 것이다. 아견(我見)을 집착하고서는 외도가 되는 것이다. 생사를 두려워하고 쫓기는 마음에서는 소승무리가 되며, 남을 이롭게 할 줄 모르고 작은 소득으로 만족을 여기고서는 보리를 얻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경에는 깨달음을 장애하는 네 가지 요인으로서 첫째, 대승법 위배 둘째, 아견집착 셋째, 생사고를 두려워함 넷째, 중생의 이익을 도모하지 않음을 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보리를 알고 보리를 닦는 자는 필경 보리의 수승한 과실을 수용하게 된다. 보리가 지닌 청정자성 무한공덕을 완전히 누리는 것이다. 그것을 일러 무엇이라 할 것인가. 깨달은 자, 오도자,  자재인, 해탈자, ··· 우리는 한 가지 부처님이라 한다. 보리를 이루어서 성불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보리 과를 성취한 자의 경계는 어떠할까. 이에 대하여 부처님게서는 1. 청정(淸淨) 2. 진아(眞我) 3. 묘락(妙樂) 4. 상주(常住)라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보리를 이룬 상태, 즉 적정명정을 주체적으로 수용한 상태를 설명한 것인데 그것은 바로 열반경계이며 열반묘락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리가 곧 열반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극청정경계가 즉시 보리요, 보리에 상락아정(常樂我淨)의 4 덕이 구족함을 알 수 있다.

  불자의 목표는 깨달음에 있고 성불에 있다. 무상보리를 얻는 것이 본원인 것이다. 그래서 이를 향한 우리의 수행은 다양하다. 목표는 하나이지만 각자의 처지 근기가 다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들의 수행이 보리를 이룸에 있을진대 우리의 수행은 새로운 검토가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의 오늘의 수행이 위에서 살펴본바 보리를 이루는 기본여건에 충직스러운 수행인가 살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소승경계에 집착하고 아견을 증장하며 소법에 만족하고 자리충족에 멈춰 있지 않는가 돌이켜 봐야 하겠다. 특히 부처님의 가르침 가운데서 보리가 스스로의 본성이라는 사실을 등한히 하고, 경계와 현상이 무(無)인 것을 간과하여 집착하며, 자타를 분별하여 자리를 앞세우는 수행방법을 경계해야 할 것이다.

  모름지기 자성이 적정명정한 보리이며 일체세간 일체시각이 보리현전의 국토임을 믿고 이 자성광명을 끊임없이 발휘하여 대신(大信) 대비(大悲) 대행(大行)의 각행(覺行) 수행에 힘써야 할 것이다.

(※ 본고에 인용한 경전은 무상의경(無上依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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