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라이 라마 망명수기 <2> 농부의 아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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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 망명수기 <2> 농부의 아들 1
  • 달라이 라마
  • 승인 2007.10.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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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 불교 총수이며 국가원수인 비구 달라이 라마의 망명 수기 : 내 나라, 내 겨레

제1장 농부의 아들

  나는 1935년 5월 5일 티벳 동북부 작은 마을 에서 태어났다. 부락 일대는 평지로 이어지는 낮은 골짜기가 중국 쪽으로 계속 내려갔다. 해발 9천 피트의 아름다운 시골 마을은 약간 펑퍼짐한 둘레에 밀과 보리가 자라는 기름진 밭이 감싼 둔덕이고, 그 위는 짙은 풀로 덮인 작은 산 속에 들어 앉았다.

  남산이 제법 높았는데, 사람들이 하늘을 꿰뚫는 산이라 불렀고 또 수호신의 거주처라고도 전해왔다. 맨 밑은 숲이고 높아지면서 풀이 자랐고 더 위에는 헐벗은 바위고 정상은 녹을 때 없이 눈으로 덮었다.

  그 산의 북면에 노가루 포푸라 복숭아 자두 호도 갖가지 딸기, 향긋한 꽃들이 자랐고 맑은 샘물이 작은 폭포처럼 흐르는 속에 새들과 사슴 당나귀 원숭이 적잖은 표범곰 여우들이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고 어슬렁거렸다. 우리 모두가 마구 해치지 않는 불교인이기때문이다.

  이 아름다운 경관 속에 이 나라 불교사상 유명한 절이 있는데 왕생설을 처음 인정한 교단의 제4대 종조가 창건했고 또 14세기 이 나라 불교 중흥조가 출가한 본사이기도 했다. 그 절 밑으로 산세에 어울리는 절이 또 한 곳 있었다. 도금한 지붕에 법륜을 양쪽에서 떠벋든 금동사슴이 경건한 신앙심을 돋구고 마을 집집마다 나부끼는 염불 깃발은 더욱 종교적 분위기를 높였다.

  마을은 농사로 살며 주식은 밀가루와 보리가루 버터 육류 등이었고 음료는 버터차나 맥주였다. 불교도간에 육식에 대해서 의견이 엇갈리었으나 티벳은 기후가 혹독해서 식량이 풍족하다고는 하지만 종류가 제약되어 있어 섭생을 위해 어쩔수 없다. 티??사람들은 짐승을 죽이면 죄라고 생각하나 기왕 죽은 것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일은 다르게 생각한다. 도살자나 푸주는 죄인이나 비천한 사람들이 했다.

  마을에서 남는 보리와 밀은 가까운 읍에서 차 설탕 솜 장식품 철기 등과 교환한다. 옷이라고는 순전히 이 나라식으로 남자는 털모자 가죽장화 그리고 허리 밑으로 맨 띠로 상의는 주머니가 된다. 여자는 소매없이 긴 탈실 옷에 면이나 비단의 밝은 색 상의다.

  기다란 머리 치장은 행사 때 등허리까지 내린다. 겨울엔 모두 털외투.에 두꺼운 속을 푹신푹신하게 덧댄옷을 입는다. 세상 어디나 다 마찬가지로 여자들은 보석같은 것을 좋아하지만 남자들은 음식 솜씨 좋은 여자들이 자랑스러웠다. 

 이웃에도 많은 절이 있어 기도하고 공양하며 모든 생활은 정말로 신앙에 바탕을 두었다. 티벳 전체에 불교인 아닌 사람은 드물다.

  말을 겨우 더듬는 어린 아이도 불법승 삼보의 표지가 있는 곳을 즐겨찾고 흙으로 절을 짓고 공양 올리고 예경하는 놀이를 한다. 구두쇠만 뻔다면 빈부간에 수입의 잉여분은 생활 필수품을 구한 다음 신앙활동으로 빈민구제 방생 등에 썼다. 여유있는 집은 사설 불당을 차리고 절처럼 꾸몄다. 어떤 사람은 수 명의 반승으로 독경하는 때도 있었고 가난하다 해도 불당을 차리고 장명등은 켰다.

  내가 난 지역의 사람들은 대체로 장대하고 용맹스럽지만 신앙에는 온순해서 겸손하고 자애롭고 천진한 그대로 모든 사려를 신앙의 덕으로 격려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나는 순수한 티벳 종족으로 출생했다. 조상은 중부 티벳 출신이나 수백 년 동안 변방수비대에 근무한 탓으로 현재의 고향에 정착하고 말았다. 그래서 우리 집 사투리는 중부 것을 많이 썼다. 밑으로 2대조만 아니고 그 위는 대대로 동네 치안을 맡은 책임자였다. 그래도 나는 농가 출신임을 항상 기쁘게 생각한다. 앞으로 말하겠지만 나는 아주 어려서 고향을 떠났다. 때문에 중공서 귀국할 때 서둘러 들려본 조상들의 마을, 우리집은 더욱 자랑스러웠다. 부자나 귀족이었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겸손한 감정을 맛보지 못했으리라는 느낌은 나자신 낮은 출신이기에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어 그들의 복리증진을 강하게 서원했다.

  우리 집은 대가족으로 누이 둘, 형제 넷으로 터울도 컸다. 어머니는 열 여섯을 낳아서 아홉은 아주 어릴 때 잃었다. 온 식구는 강한 우애로 뭉쳐 있었다. 아버지는 마음이 좋았으나 불 같은 성질도 가끔 없지 않았다. 크지도 않고 힘이 세지도 못했고 많이 배우지도 못했다. 그러나 현명하고 지적이었다. 특히 말을 좋아해서 승마를 즐기고 말을 잘 고르고 치료도 잘해주었다.

  어머니는 친절하고 자애로와 모든 사람을 위하는 일이라면 자신의 밥도 배고픈 사람에게 기꺼이 주고 배를 곯았다. 그렇게 착한데도 가족을 다스리는 융통성에는 아량으로서 내가 열외가 되자 다른 자식들 교육에 대해 의무를 다 했다. 우리집 주업은 농사다. 가축도 있었고 집 주위에는 푸성귀도 가꾸었다. 일꾼은 통상 다섯 정도였고, 모든 일은 가족 전체가 함께 하나 파종이나 추수 때는 10명 내지 40명을 품앗이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나를 밭 구석 말뚝에 묶은 일산말에 재워 주고 일을 했다.

  우리집은 마당이 가운데 있는 네모난 구조였다. 단층이지만 밑은 돌이고 위는 흙벽이다. 처마 끝은 청옥 타일로 가지런히 했고 남향 대문 위는 티벳 고유의 창과 깃대로 장식했다. 마당 한복판 장대 위는 염불 깃발이 펄럭였다. 집 뒤는 말 노새 소를 거두는 터였고 또 문 앞은 낯선 사람 알리는 개를 매뒀다.

  가축은 암소가 여덟, 트기소가 일곱인데 트기는 고산지대 소와 보통 소의 잡종이다. 어머니는 내가 걸음마를 하며 옷 섶에 그릇을 싸들고 외양간으로 따라가면 따뜻한 트기소 젖을 짜줬다. 닭도 키워 계란을 가질러 가는 일도 허락해줬다. 이러한 일들이 옛 생각의 일부인데 둥주리에 올라 앉아 암닭 우는 소리를 낸기억도 있다.

  우리집 생활은 단조로왔으나 행복했고 만족했다. 그 많은 만족감은 오랜 세월 우리 나라 통치자였던 제13대 달라이 라마의 덕분이다. 그의 치세 때 티벹??독립국임을 천명하고 발전을 위한 많은 성취가 있었다. 특히 우리 마을 일대는 중국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전임 달라이 라마가 근 1년간 주석하여 정신적 감화를 많이 남겼다.

  한 나라의 종교와 국사를 함께 맡았으니 개인적으로는 여가가 없었고 즐거운 시간이 없었다.  밤낮 나라가 어떻게 해야 번영할까, 백성의 고충을 어떻게 덜어 주고 적절히 공평히 정의롭게 이끄나 심사숙고 몰두하였다. 그의 공헌으로 우리나라는 장구한 평화와 번영을 누렸다. 새 나라 같았고 편안했었다고 백성들도 술회했다.

  그러나 1933년 그의 입적이 전국에 알려지자 모두 힘을 잃었다. 우리마을에 슬픈 소식을 알린 사람은 장에 갔다가 그 곳 큰 절에서 듣고 온 아버지였다.

  백성들은 옛날 풍속에 따라 우리나라의 평화와 안정을 위하여 갈심 진력한 제13대 달라이 라마를 존경에 대한 보답으로 수도 라사의 포탈라궁에 금릉을 만들기로 결의했다.

  제13대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자 그의 후계자 왕생을 찾기 시작했다. 초대 달라이 라마는 1391년 탄생했는데 모든 중생을 돌보겠다고 서원한 관음보살의 화신이었다.

  우선 전임 달라이 라마의 몸을 받은 아이가 발견돼서 자랄 때까지는 섭정을 뽑는다. 그 다음 전퉁에 따라 위임 맡은 고승과 신도들이 모여 어디서 새 달라이 라마 후보가 출생했느냐를 찾는다. 사람들이 서기 어린 길조를 찾아 나섰다.  먼저 수도의 동북쪽에 상서로운 구름이 보였다. 막 입적한 달라이 라마가 하계별궁 용상에 남향하고 앉았던 얼굴이 며칠 후 동북쪽을 향해 굳었다.

  또 그가 정좌했던 법당의 동북쪽 기둥에 별 모양의 이끼가 생겼다. 이 징표를 종합한 의견은 새 달라이 라마 후보가 있을 방향 암시라 했다.

  1935년 수도의 동남방 90마일 지점에 있는 성지에 섭정 일행이 가 보았다. 앞일을 비춘다는 못이다.

  이떤 때는 글씨 모양으로, 또 어떤 때는 장소의 그림으로 나타나는데 여러 날 동안의 기도와 입정으로 연못의 현시를 기다렸다. 드디어 이자 가자 마자에 옥과 금 지붕의 절, 청옥 타일의 집이 보였다. 모든 내용을 극비로 하고 이듬해에 고승과 수임자들이 성지와 전임 달라이 라마 입적 후의 현상을 종합하여  티벳 전역에 탐색반이 떠났다.

  동쪽으로 파견된 사람들이 겨울철 우리 마을에 도착하여 옥과 금지붕 절을 관찰했다. 청옥 타일의 우리집을 대번에 찾았다. 동네 사람에게 넌즈시 우리 집에 어린이가 있나 물어보니 두어 살 된 아이가 있음을 알았다.

  일행 중 두사람이 변장하고 하인 한 명과 안내를 맡은 마을의 절 신도 두 명을 앞세우고 우리 집을 방문했다.

  하인 열이 진짜 책임자였다. 문전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안으로 맞아들이며 하인은 하인처소로 맞이했다. 일행이 나를 보러왔고, 나는하인 차림의 사람 무릎에 앉았다고 했단다. 그는 양피 옷으로 변장했으나 전임 제13대 달라이 라마 염주를 속에 걸고 있었다. 나는 염주를 가졌다고 했단다. 누군가 알아 맞히는 준다의 사투리로 스님이라 했단다. 책임자는 하루 종일 나를 살폈다. 이튿날 일행이 떠날 때 나도 간다고 우겼단다.  [계속]

 

홍교 김일수 옮김 
마하보디협회 한국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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