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스앤젤레스의 주택가 LA 블러바드에 위치한 국제불교명상센터(International Buddhist Meditation Center, IBMC)는 1970년 베트남 불교학자이며 선사인 틱 티엔안 박사가 설립하였다. IMBC는 베트남 전통을 따르지만 각종 전통이 혼합된 국제적 분위기의 명상센터이다. 1980년 박사의 입적 후 가장 가까운 법계승자인 카루나 다르마 (Karuna Dharma) 비구니스님이 운영하고 있다. 현재 이곳에는 10명의 스님이 거주하고 있고 월간 소식지도 발행하며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가정집 거실을 밝은 색채의 선방으로 꾸민 이곳은 길을 마주하고 두 채의 집을 각각 선방과 요사채로 쓰고 있다.
큰소리로 너그럽게 웃는 웃음이 특징인 카루나 다르마는 위스컨신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작은 교회를 설립했고 카루나는 주일학교 선생님이었다. 하지만 18세에 교회가 실생활문제에 아무런 답도 주지 않음을 깨달은 그녀는 불가지론자가 되었다. 그리고 20대 후반 그녀는 자신이 불교도라는 강한 직감이 들었다. 당시 그녀는 이혼하고 딸 하나를 데리고 고등학교 교사를 하며 생활하고 있었는데, 자신의 삶을 재구성해야겠다는 강한 느낌에 사로잡혀 있었다.
불교와의 만남
그러던 60년대 말 여름방학에 UCLA에서 틱 티엔-안 박사가 가르치는 ‘불교와 선’ 강좌를 듣게 되었다. “그는 온화했고 멋진 미소를 가졌고 껄껄 웃는가 하면 킥킥 웃기도 하면서 무겁지가 않았다. 그 사람은 자신이 강의하는 내용 그 자체였다. 그의 몸 주변 30cm에는 오라가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사람임을 알았지만 동시에 그는 실존인물로 보이지 않았다. 이후 그의 곁에서 보낸 12년 동안 그 느낌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세계를 걸어다니고 있었고 인간처럼 행동했지만 인간 세계의 영향을 조금도 받지 않은 사람이었다.” 얼마 후 두 사람이 처음으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티엔-안 박사는 카루나를 이미 몇 생애 동안이나 알고 지냈다고 말했다. 그는 카루나에 대해 알 리가 없었던 많은 일을 알고 있었고, 카루나 역시 왜 그런지 설명할 수는 없었지만 박사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다. 그렇게 불교의 길을 발견한 후 그녀의 삶이 다 바뀌었다. 여름학기가 끝나기 전 그녀는 그의 학생이 되었다.
티엔-안 박사는 영주권을 받은 후 학생들의 요청으로 할리우드의 집을 빌려 명상센터를 시작했다. 하지만 6개월이 채 되기도 전에 사람이 너무 늘어나서 현재의 자리로 옮겨야 했다. 1973년 그녀는 사미니계를 받았다. 그리고 1974년부터 삭발을 했고(당시 그녀는 교사였지만 다르마에 대한 결의를 그렇게 표명하고 싶었다), 1976년 구족계를 받았다.
불교계 내의 여성차별
그녀는 팔경계의 일부가 불공정하다고 느낀다. 그리고 여성이 남성에 비해 소 떼 정도의 위상밖에 갖지 못했던 당시 인도사회에서 팔경계(八敬戒)가 비구남성들이 여성을 동등한 동료로 받아들이도록 하는 데 있어서 그들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부수적 장치가 아니었을까 추측해본다.
언젠가 그녀가 저명한 스리랑카 스님 월폴라 라훌라에게 불교가 미국에서 전파되려면 그 전근대적 면모를 고쳐야 한다고, 이 부분은 미국 여성뿐 아니라 미국 남성마저도 불편하게 한다는 점을 언급했더니 이런 대답을 했다. “그것은 비구들에 관한 계율이 아니기 때문에 비구들은 그에 대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어요.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은 당신들 비구니입니다.” 그녀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한다.
1975년 베트남과 미국의 전쟁이 끝나면서 센터는 갑자기 난민들을 받아들이느라 눈코뜰새 없어졌다. 이전에 35명이 살던 이곳에 하루아침에 150명이 살게 되었다. 밀어닥치는 난민 구조에 임하면서 그녀는 저항을 놓아버리고, 그것도 완전히 놓아버리고 ‘다만 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왜냐고 묻거나 싫다고 말하는 것은 사치였다. 그저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80년 가장 큰 충격이 왔다. 스승이 돌아가셨던 것이다. 간암이 발병하였고 그것이 뇌까지 전이되어 1년 동안이나 앓으면서 고통이 매우 심했겠지만 제자들은 입적하기 3개월 전에서야 스승의 병에 대해 알게 되었고, 이후에도 그는 약간의 불편함만을 표현했을 뿐이다. 스승의 사후, 카루나는 센터장이 되어 모든 일을 맡아 처리했다. 남성 위주의 환경에서 여성 승려가 일을 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자신감과 독립성을 길러야 했다.
그것은 어떤 문화권에서도 여성에게 바람직한 것으로 장려되지 않았던 성품이었다. 자신만의 두 다리로 서는 데는 시간이 좀 걸렸다. 이젠 사회가 바뀌고 있다. 즉 남성들은 모든 해결책을 다 알고 있지 않음을 인정하고 여성들은 남성에의 의존을 버려야 할 의족처럼 생각하기 시작했다.
여성 스승의 필요성
현 사회에는 여성 스승이 필요하다. 이는 단지 여성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성들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여성은 대안적 접근법과 시각을 제공한다. 불교가 서양이라는 신문화권으로 진입하면서 여성적 에너지와 책임감을 배양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다고 카루나 다르마 스님은 보고 있다.
티엔-안 박사에 의하면 여성들은 이미 자비와 직감적 통찰력을 강하게 발달시켰기 때문에 깨달음을 얻기가 더 쉽다고 한다. 감성적으로 주변에 둘러친 장벽이 더 적다. 하지만 여성들은 전통적으로 스승과 지도자가 되지 못했다. 넓은 의미에서 파워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성이 훈련받은 역할은 언제나 남성의 하위였다. 그것은 불교가 아니라 문화적 특성이다. 이제 여성은 동등 자격자로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그것이 주어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
IBMC는 수감자들과 편지를 통해 명상을 지도하는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다. 상급학생들 중에는 한 사람이 60명을 지도하는 경우도 있다. 또 노숙자들과 학대받은 어린이들을 위해 매 해 할로윈 파티와 야외음악회를 열고 있다. 또한 1994년에는 각기 다른 전통의 계사와 스승들을 30명 모셔놓고 대수계식을 가졌다. 여기에선 상좌부 대승 금강승, 정토종과 선종의 남녀 스님이 동일한 수계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사상 처음으로 여성 계사(카루나 다르마 스님)가 남녀 모두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내렸다. 영어로 진행된 이 수계식에서 27명의 수계자는 자신의 전통에 합당한 승복을 입고 자신의 계사에게 수계를 받았다. 3년이 지난 1997년 제2차 대수계식이, 2002년에 3차 대수계식이 열렸다.
1994년 카루나 다르마에게 뇌졸중이 덮쳤다. 재활치료 후 그녀는 왼쪽 다리에 브레이스를 하고 지팡이를 짚고 걸으며 왼쪽 팔은 쓸 수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몸에 맞게 맞춘 차를 매일 운전한다. 좋은 스승이 된다는 것은 눈부신 법문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의 문제라고 믿는다는 카루나 다르마 스님은 오늘도 불편한 몸을 이끌고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진우기
경기여자고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을 졸업했으며, 미국 Texas University에서 평생교육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불교문화센터와 신구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역저서로 『일곱 봉지 속의 지혜(The Heart of the Enlightened)』, 『머니 테라피(Money Therapy)』, 『이 세상은 나의 사랑이며 또한 나다(Engaged Buddhist Reader)』, 『깨달음의 길(The Path to Englightenment by Dalai Lama)』, 『달마 서양으로 가다』 등이 있다. E-mail: han99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