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법석 /금산사 회주 월주 스님
“제행(諸行)이 무상(無常)하여 시생멸법(是生滅法)이라 생멸(生滅)이 멸리(滅離)하면 적멸위락(寂滅爲樂)이로다.
모든 현상이 공간적으로 고정된 실체가 없고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이 없다. 모든 현상은 태어났다 멸하고 태어났다 멸하고 반복하는 것이다. 생멸을 초월해서 생에 대한 집착과 공포를 다 여읠 것 같으면 적멸위락이라, 열반적정의 즐거움만 있을 것이다.”
이것은 열반경에 나오는 게송입니다. 이 자리에 오늘 광덕 큰스님 추모법회에 참석해주신 불광의 형제 여러분과 함께 광덕 큰스님의 열반 5주기를 맞이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추모를 드립니다.
광덕 스님과 저는 아주 각별한 인연이 있습니다. 광덕 스님과는 비교적 수행적인 측면보다 종단행정업무에 종사하면서 접할 기회가 많았습니다. 광덕 스님과 함께 종단 운영에 참여하면서 거의 십수년 동안 종단 일을 걱정하기도 하고, 동국대학교 이사로 같이 참여하여 서로 대화를 많이 하면서 탁마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광덕 스님께 많은 감화를 받았지요.
오늘 우리가 광덕 스님 5주기 추모법회를 하면서 단순하게 인연이 있기 때문에 제사를 모시고 추모한다는 것보다는 큰 족적을 남기신 광덕 스님의 생애를 돌아보면서 그 수행정신과 종단을 위한 공헌, 포교에 힘쓰신 점, 보현행원을 실천하면서 업적을 쌓으신 점을 살피면서 그 사상을 기리고, 다시 한번 광덕 스님의 유지를 받들고 실천하겠다고 다짐하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광덕 스님은 매우 위대하신 분으로 그 사상적인 깊이와 행적을 짧은 시간에 다 말씀드리기 어렵습니다. 말재간도 부족하고, 주어진 시간도 짧은지라, 큰스님의 수행 정신과 원력, 공적에 대해 간략하게나마 말씀드리면서 추모법어를 대신하고자 합니다.
먼저 스님의 생애를 보면, 절에 오시기 전의 학업기, 출가 수행기, 종단 정화와 종단 수호를 위해 노력하신 것, 또 전법이 구도라는 원력으로 포교사업을 하신 것, 그 다음에 포교도 마찬가지고 수행도 마찬가지지만 보현행원 사상을 실천하려고 마지막까지 노력하시다가 가신 것, 대략 다섯 가지로 분류해서 그분의 생애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실 그분을 대해보면 본래 천재적인 재주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대학도 다니시다가 건강이 나빠져 중퇴하고 절에 들어오셨지만, 학창시절에 공부를 매우 열심히 하신 분입니다. 광덕 스님께서는 출가 전에 사상서적과 문학서적 등 책도 아주 많이 읽으셨어요. 해방 후 혼란기에 고민하면서 법률서적, 정치서적도 많이 보셨지요.
『광덕 스님의 생애와 불광운동』이라는 책에 의하면, 스님께서 출가하시기 전 외삼촌 댁에 드나들면서 산더미같이 쌓아 놓은 책을 매일 독파했다는 얘기가 나옵니다. 실제로 광덕 스님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참으로 모든 분야에 박식한 지식인이라, 문학, 철학, 법률, 경제 등에 대단한 지식을 갖춘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는 출가해서 동산 큰스님 문하에 들어가 참선 수행을 하셨는데, 철저하게 몸을 던져 수행하셨습니다. 또 종단 정화운동에 참여하셨고, 총무원 총무국장을 하시다가 불광운동을 준비하셨고,불광법회를 설립하셨습니다. 또 청담 스님과 석주 스님을 모시고 총무원 총무부장을 하시면서 종단 행정에 깊이 관여하셨습니다.
그 때 나는 총무원 교무부장을 하면서 스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지요. 광덕 스님은 실로 이사(理事)를 겸비한 분입니다. 수행력도 깊었을 뿐만 아니라 사람과 조직을 다루는 행정능력이 아주 탁월했습니다. 광덕 스님은 용성 큰스님의 대각사상운동, 동산 큰스님의 정화이념과 수행정신을 이었다고 볼 수 있는데, 젊었을 때 수년 동안 신소천 스님을 뫼시고 전국을 돌아다니면서 금강경을 전파하시고, 활공(活空)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더군요.
“청산첩첩미타굴(靑山疊疊彌陀窟) 창해망망적멸궁(滄海茫茫寂滅宮) 물물염래무가애(物物拈來無 碍) 기간송정학두홍(幾看松亭鶴頭紅)이라.
첩첩한 청산은 미타의 굴이고, 망망한 창해는 적멸의 궁전이로다. 사물과 사물은 거리낌이 없는데, 몇 번이나 소나무 정자의 학머리 붉음을 보았던가.”
이 게송은 아침 종송할 때 하는 것인데, 광덕 스님께서 이 게송을 얘기하면서 말하기를, “좋긴 좋지만 너무나 출세간적이다. 적멸의 경지, 너무나 초세간적인 데 젖어 있는 것이 한국불교의 문제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그 때 ‘이분은 수행을 해서 철저하게 득력을 갖추면서도 공에 떨어져서는 안 된다’는 신념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스님께서 불광회를 조직하고 월간 불광을 만들고 보현행원 운동을 한 것은 수행을 통해서 공(空)의 경지를 얻더라도 거기에 젖어있지 말고 거기서 뛰쳐나와서 모든 것을 포용하면서 활공(活空) 정신으로 수행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불광 사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서고 보니, 그 때 일과 그 때 내가 느꼈던 생각이 생생하게 떠오르는군요. 분명히 공을 체득해야 하지만 공에 걸리지 말고, 적멸에 젖어 있지 말고, 공을 뛰어넘어야 된다는 광덕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참으로 보통 사람들과는 생각이 다른 분이라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스님께서 평소 월간 불광에 권두언을 꼭 쓰셨는데, 대부분의 말씀이 “우리의 마음자리는 본래 밝다, 완전무결하다, 걸림이 없다, 오직 희망만 있고, 좌절은 없다.”라는 내용으로, 공사상(空思想)에 걸리지 않고 공을 뛰어넘는 사상입니다. 요새는 불광지를 보지 않을 때도 있지만, 예전에는 열심히 불광지를 읽었습니다. 특히 광덕 스님께서 쓰신 글은 하나도 빠짐없이 다 봤고, 권두언은 외울 정도였지요. 제가 외국에 3년 나가 있을 동안에도 월간 불광을 봤어요. 또 LA, 샌프란시스코 등의 불자들에게 불교를 전하기 위해 불광지를 적극 보급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불광지를 보면, 광덕 스님께서 활공(活空), 움직이는 공에 처해서 포교도 하시고 보현행원도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는 사람들이 광덕 스님보고 포교사다 하며 폄하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어요. 하지만, 광덕 스님께서는 오로지 신념과 원력을 가지고 대각사에서 불광회를 만들고 성금을 모아서 이 불광사를 지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사실 한국불교 승려들이 극도로 수행에만 치우치다가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물론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중생에게 이익이 되긴 합니다만, 광덕 스님은 수행력과 보현행원 원력을 두루 갖춘 분입니다. 그 원력으로 불광회를 만들고, 불광 잡지를 만들고, 경전과 의식문을 우리 말로 번역하였고, 『선관책진』 『육조단경』 『반야심경 강의』 등을 의역하였고, 그밖에도 많은 저술을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찬불가를 짓고, 보현행원송, 부모은중송을 작사해서 작곡케 하여 세종문화회관 등 여러 곳에서 공연을 하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한문 경전을 쉬운 우리말로 바꾸고, 평이하게 한글로 찬불가를 지어서 불자들로 하여금 환희심을 느끼게 한 것 등 그 모든 것이 다 광덕 스님의 대비원력에서 나온 것입니다.
찬불가를 최초로 지으신 분은 용성 큰스님입니다. 용성 큰스님은 강사요, 선사요, 율사요, 역경사요, 독립운동가로 유명하신 분인데, 이분께서도 간절한 자비심으로 손수 풍금을 치시면서 작사 작곡을 하셨습니다. 또 대각사를 지어서 대각운동, 불교현대화운동을 하신 분입니다.
용성 스님이 현대 찬불가 작사 작곡의 선구자라면 더 구체적으로 활발하게 찬불가를 짓고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 불교를 현대화, 대중화시킨 분이 바로 광덕 스님입니다. 광덕 스님이 한국불교 현대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신 점에 이의를 달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그 모든 것은 다 광덕 스님의 중생 구제의 비원(悲願)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광덕 스님께서는 “어떻게 중생들에게 쉽게 불교를 알리느냐? 어떻게 중생들이 감화를 받고 불교에 접근하게 만드느냐? 어떻게 중생을 구제하느냐?”는 것을 늘 생각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전법(傳法)이 구도(求道)다, 불법을 전하는 것이 깨달음의 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깨달음을 먼저 주장하지 않고 전법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전법을 통해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중생을 제도하려면 공부하고 수행해야 합니다. 법문을 하려면 연구하고 공부해야 해요. 나도 오늘 추모법어 요청을 받고 며칠 동안 생각하고 자료도 봤어요. 쉬운 게 아니에요.(대중들 웃음) 청담 큰스님께서도 “중생 제도가 자기 성불이다, 자기가 성숙되어야 중생을 제도할 수 있다”고 하셨어요.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서는 행도 잘해야 하고, 준비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광덕 스님께서 전법이 구도라고 내세운 것도 자비심과 원력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다.
광덕 스님은 지비원만(智悲圓滿)이라, 지혜와 자비를 두루 갖추고 실천하려고 평생 노력한 분입니다. 사실 나 몰라라 탈탈 털고 산중에 있는 것은 수행력은 있지만 자비심은 부족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은 지혜만 치우치고, 어떤 분은 생각만 앞서고 자기 수행은 안 하는 등 한쪽에만 치우치기 쉬운데, 광덕 스님께서는 계행도 철저히 지키고, 원력도 가지고 수행정신도 지키면서 포교에 힘쓰셨습니다. 이 모든 것이 다 스님의 자비심, 대비원력에서 우러나온 것이라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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