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안(此岸)과 피안(彼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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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안(此岸)과 피안(彼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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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10.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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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검다리

차안 과 피안은 전위의 관계를 드러내는 불교의 상징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이쪽에서 저쪽으로 자리 옮김만을 뜻하는 게 아니라 이쪽 강변과 저쪽 강변으로 드러난 강의 흐름도 포함한 상징이다.
즉 차안과 피안 사이에는 건너야 할 강이 가로지르고 있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이쪽 강변(此岸)에서 아무리 자리를 옮기고 왔다 갔다 해도 강을 건너지 못하면 헛일이다.
강(江)은 차안과 피안을 가르는 구분이자 강변과 함께 평행을 이루며 흐르고 있다. 이쪽 강변에서 흐르는 강을 따라서 자리 옮김만을 하는 경우는 불자의 길이 못 된다. 우선 이쪽 강변에 대한 의심과 회의가 필요하다. 즉 저쪽 강변(此岸)의 존재 여부를 알고 믿을 수 있어야 한다. 강변까지도 못 다다를 수있을 것이다.
자신의 세계가 세상의 중심인줄 착각하는 경우이다. 자신의 세계의 경계면까지 닿을 수 있을 때 가로질러 흐르는 막막한 타자(他者)인 강을 보게 될 것이며 저쪽 강변의 실체도 인지될 수 있다. 혹은 짙은 안개로 인해서 저쪽 강변이 보이지 않을 경우도 있을 것이다.
강은 어디에 있으며 피안 역시 어디에 있는가? 강은 어디에도 없고 피안 역시 그 어디에서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있다. 과연 그러할까? 어디에도 강은 흐르고 있으며 따라서 어디에도 피안은 저쪽에서 손짓한다.
이쪽과 저쪽의 차이는 강으로 말미암아 구분된 것인지도 모른다. 강이 없다면 이쪽의 연속과 연결이 저쪽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저쪽과 그 저쪽 역시 강이 없다면 이쪽의 연속과 연장일 뿐이다.
땅과 하늘의 차이와 구분보다도 강에 의한 이쪽과 저쪽의 구별과 차이가 불교의 한 특성을 내어보인다. 땅과 하늘의 수직적 차이보다도 강의 이쪽과 저쪽은 수평적이며 지평적 차이이기도 하다. 이쪽 강변에서의 자리 옮김 역시 평행선을 이룬다. 미망 속의 헤매임이 될 것이다. 강을 보지 못했기에 건널 수도 없게 된 제자리 강변 이동이기 때문이다.
강은 무엇을 상징하고 있는가를 불자는 고민해야 할 것이다. 강에 대한 참구 여하에 의해서 저쪽 강변(彼岸)이 나타나기도 하고 가려지기도 한다.
건너는 일 역시 강에 대한 참구와 동시에 물어질 수 있어야 한다. 무엇으로 건너는가도 당연한 참구가 될 것이다. 뗏목으로 건넌다는 상징과 함께 건넌 후의 사후처리에 대해서는 말씀이 남아 있다. 건넌 뗏목에 더 이상 집착을 하지 않는다는 메시지가 전해오고 있다.
문제는 우선 강을 보는 일이 될 것이며 동시에 저쪽 강변(彼岸)에 대한 도하 목표의 설정일 것이다. 그 다음은 뗏목이나 배 등 건널 수 있는 장비의 마련이겠고 이어 직접 강을 건너는 실행이 될 것이다. 사실, 건넌 후의 뗏목 처리는 커다란 몫을 차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건너는 도하의 과정을 마무리하는 마지막 처리이기 때문이다.
일상적 불자의 관심은 오히려 그 이전의 많은 과정을 거쳐야 하는 일이 보다 시급하고 절실하다. 강은 어디에 있는가? 강을 보니 저쪽 강변(彼岸)이 또렷이 나타난 상태인가?
아마도 인연과 업보의 강인지도 모른다. 그냥 시간의 흐름으로서의 강일 수는 없을 것이다. 저쪽 강변은 놀랍게도 이 몸인지도 모른다. 즉 이 몸과 함께 뒤엉키는 사바세계가 강과 함께 드러나는 저쪽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저쪽 강변에서 이쪽 강변을 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몸을 타고 건너 닿은 기슭이 바로 이 몸이란 어처구니 없는 역설의 확인-그 확인 후에 버려지는 뗏목과 저쪽 강변의 싸잡은 포기와 팽개침- 다시 또 강을 찾아 나서는 이 몸의 시나리오의 흐름-깨달음 후에도 또 다른 강이 여전히 흐르고 있는지도 모른다.-매일의 나날은 따라서 강 건너기 연습-도하 연습인지도 모른다. 시간의 물살을 느끼면서 닿아진 이쪽 강변의 한 소식인지도 모른다. 혼돈일까?
혼란일까? 거울 앞의 물구나무서기일까? 나도 모르는 사이-이 몸이 모르는 사이에 그 뭇이 지나가고 흔적만이 겨우 확인되는 처지- 생각으로도 볼 수 없고 눈으로도 겨냥할 수 없다. 먼 메아리의 파동에 머리를 흔들며 잠을 깨는 연습-비가 구슬프게 내려도 이 날이 고마울 뿐이다. 이 하루의 빗속에서 헤엄칠 수 있는 사실이 고마울 뿐이다.
물고기는 산을 찾는 불자일 것이다. 물고기의 이쪽 강변(?) 저쪽 강변(?)은 나의 이쪽 저쪽과 같을 수는 없겠지만, 피차(彼此) 건널 강을 찾을 수밖에 없다는 점, 건너야 하는 사실, 건넌 후의 사후처리 등은 아주 흡사하다. 법당에 모여 법회를 올리는 불자들-각각의 인연과 업보의 사랑은 다르더라도 도하건에는 별 차이가 없듯이…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새해가 다가온다.
한 겨울의 강물은 꽁꽁 얼어서 건너기도 쉽겠다.
빠른 속도로 몽땅 건널 수도 있을 것이다.
뗏목도 필요없고 나룻배도 짐스럽다. 그냥 미끌어지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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