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욕(忍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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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욕(忍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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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7.09.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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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로 가려뽑은 경전말씀

사람들은 나날이 황량하고 거칠어져만 가는 고통의 바다에서 표류하며 피로감을 느낀다. 그리고 이 피로와 슬픔을 보상받기 위해서 숱한 유흥과 소비의 탁류에 몸을 던지고 금전적인 문제, 마약, 성적인 문제를 일으킨다. 또한 더 어떻게 해볼 기력조차 없어진 누구는 자기 파멸의 올가미를 향해 천천히 걸어들어가 버리거나 세상의 끝을 향해서 떠나 버린다. 이 시대의 고단한 한국인들이 피폐한 삶의 고통과 슬픔을 고요한 지혜의 눈으로 바라보고 극복해내려는 굳센 의지를 갖는다는 것은 어렵다.
그 이유는 참지 않기 때문이다. 난관과 고통을 참는 것을 불교는 인욕(忍辱)이라고 설하고 인욕이야말로 약자의 수동적인 굴욕이 아니라 자신과 이웃을 성찰하는 드높은 지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를 『대지도론』에서는 “굳세고 견고한 인욕의 지혜(忍智牢固)”라고 한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불교의 현자들은 자신에 대한 집착이나 타인에 대한 증오는 인간의 마음을 병들게 하고 바르게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아가버린다고 설했다. 그 결과 인간은 더 큰 증오와 고통의 대가를 요구받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보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인욕, 즉 참고 용서하는 수행을 쌓아야 한다. 사랑의 가장 숭고한 미덕은 용서이기 때문이다. 대승불교가 인생의 지표로 제시하는 육바라밀의 제3바라밀은 바로 인욕바라밀(忍辱波羅蜜)이다. 즉 분노와 증오를 이기는 평화로운 삶의 가르침인 것이다.
미움은 미움으로써 사라지지 않는다 미움은 오직 참음과 자비로써만이 극복되는 것이니 이 진리는 영원하리라 不可怨以怨 終以得體息 行忍得息怨 此名如來法 『법구경』잘 알려진 『법구경』의 말씀이다. 1951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대일평화조약(對日平和條約)을 체결할 때 불교국가인 스리랑카는 대일배상권(對日賠償權)을 포기했다. 당시 스리랑카의 대표였던 쟈야와르데 외무장관은 일본의 전쟁 피해 배상의무를 면제해주는 연설을 끝맺으면서 다음과 같은 부처님의 말씀, 『법구경(法句經)』을 인용하고 있다. 당시 스리랑카의 이와 같은 태도는 힘의 논리를 앞세운 평화의 주장보다는 상호관용과 사랑의 미덕이 실현됨으로써만이 진정한 평화가 이루어진다는 불교국가의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인욕을 가리키는 범어의 원어는 ‘크샨티(ksanti)’로서 이 말의 표면적인 의미는 ‘참는 것’이지만 보다 깊은 의미는 ‘용서하다’이다. ‘크샨티’의 사역형(使役形)은 ‘크샤마야티(ksamayati)’로서 ‘내가 저지른 허물을 용서해주십시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즉 ‘내가 저지른 잘못을 용서해주십시오’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 말은 우리의 ‘실례합니다’라는 정도의 말로서 현대 인도인들도 자주 사용하는 일상적인 인사말이기도 하다. 우리는 여기서 인욕의 수행이란 그저 단순히 참는 마음이나 행위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어려운 처지에 대한 잘못에 대한 용서까지도 포함하는 적극적인 것임을 알 수 있다.
수보리여, 실로 여래에게는 인내의 완성이 실은 인내의 완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일찍이 어떤 사악한 통치자가 나의 몸과 수족에서 살을 도려낸 그 때에도 나에게는 아상(我相)과 인상(人相), 중생상(衆生相), 수자상(壽者相)이 없었으며 다시 또 생각한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도 없었다.… 수보리여, 나는 분명히 기억한다. 과거세 오백의 생애 동안 나는 ‘인내를 설하는 자’라는 이름의 구도자였던 것이다.
범본(梵本) 『금강경』인욕바라밀의 최후단계는 해친 이도 해침을 받는 이도 본래 공(空)하다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실천이다. 무생법인은 대승불교가 확립한 최고의 수행덕목으로 『반야경』, 『법화경』, 정토경전에서도 진리의 대명사로 표현하는 교리이다. 무생법인의 범어는 Anutpattika-dharma ksanti, 모든 현상들에서 참아야 할 일들은 본래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통찰하는 것을 뜻한다. 결국 무생법인은 본래의 무생(無生)을 깨닫는 크샨티(ksanti)의 이법(理法)이라는 뜻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불교에서 말하는 인(忍)이란 단순히 참는 것이 아니라 지혜를 성취하기 위한 마음의 수련이라는 것이다. 『화엄경』 「십인품」에서 보현보살이 설하는 마음의 평화에 의해서 발현되는 열 가지 인(忍 : 音聲忍·順忍·無生法忍·如幻忍·如焰忍·如夢忍·如響忍·如影忍·如化忍·如空忍)은 단순히 참는다는 뜻이 아니다. 때문에 중국 화엄종의 현수법장(賢首法藏)은 “인(忍)이란 지혜를 깨닫고 달관(達觀)하는 것”이라고 주석하고 “진리를 인수(忍受)하여 마음이 평안하고 부동하기 때문에 인(忍)이라고 한다.”라고 말한다. 또한 “이 인(忍)은 지혜를 자성으로 삼는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와 같은 인(忍)의 사상은 아무리 드높은 지혜라고 할지라도 그 기초는 마음의 평화에서 시작된다는 지극히 불교적인 통찰이 담겨있는 것이다. 아아, 우리는 언제쯤이나 성난 손과 발로, 사악한 눈초리와 언어의 화살로 자신과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고 나서 이겼다고 우쭐거리는 아수라와 축생의 세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참회의 슬픔은 끝날 날이 없으리라.
가령 불타는 철의 바퀴가 나의 머리 위에서 구를지라도 일심으로 불도를 구하여 마침내 회한을 품지 않나니 만약 삼악도에 떨어져 한량없는 고통을 받을지라도 일심으로 불도를 구하여 마침내 물러나지 않으리 假令熱鐵輪 在我頭上轉 一 心求佛道 終不懷悔恨 若使三惡道 人中無量苦 一 心求佛道 終不爲此轉 『대지도론』 권11지금은 입적하셨지만 현대의 한 고승은 평소 후학들에게 “사람은 마음속에 밝은 태양을 품은 것처럼 항상 기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아무리 괴롭고 슬플 때에도 나의 뇌리에서 잊혀지지 않는다. 도를 구하는 인간은 『대지도론』의 말씀처럼 회한을 품을 일이 정녕 없는 것이다. 우리들은 매사에 쉽게 분노하고 기뻐하며 사소한 일에도 조급해하고 좌절한다. 그리고도 곧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다시 분노하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그러나 불교적인 삶의 정신에서 본다면 스스로 자제심을 올바로 확립한 사람이나 인간의 영혼을 성찰할 수 있는 사람에게는 인내할 수 없는 모욕이란 이 세상 어디에도 없다. 그러므로 경전에서는 “삶의 고통으로 인해서 결코 마음을 어지럽히지 말라.”고 설한다. 어지러운 마음은 더 큰 고통의 대가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음은 삶의 갈등과 고통을 이해하고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잠재되어 있다. 오히려 그런 삶의 갈등과 고통을 겪음으로써 인간은 더욱 더 단련되고 깊이 있는 인간으로서 품격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몇천 겁 동안 쌓고 쌓은 선행과 보시, 부처님께 올린 공양의 선업도 한 번 화내는 마음을 일으키면 그 공덕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화내는 것보다 더한 죄악은 없고 인욕보다 어려운 고행은 없다.
그러므로 최선을 다해서 인욕을 닦아야 하리라.
심장에 분노의 화살이 박혀 있는 동안은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될 수 없으며 인간 최고의 목표인 해탈에 이를 수 없다.
산티데바 『보리챠리야아바타라』남을 미워하거나 분노나 증오에 쉽게 사로잡히는 것은 인간의 질긴 숙업이다. 그러나 우리들의 마음에 분노의 화살이 박혀 있는 동안은 마음이 고요하게 안정될 수 없으며 수행에 필요한 바른 지견을 갖출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움·분노·증오의 실체를 꿰뚫어 보아야 한다. 인욕이라고 해서 단순히 참는다는 것은 아니다. 인욕에는 여러 차원이 있어서 『유식론(唯識論)』 9에서는 자신에게 해를 끼치는 타인의 악행을 참고 용서하는 인욕, 내원해인(耐怨害忍)과 다른 사람의 고통을 기꺼이 함께하는 ‘대수고(代受苦)’의 인욕, 안수고인(安受苦忍), 모든 일에 대해 기뻐하거나 노여워함도 없이 진리의 본성이 본래 평등하여 차별이 없음을 깨닫는 인욕, 제찰법인(諦察法忍)을 설한다. 이 제찰법인이야말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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