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별의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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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의 병
  • 관리자
  • 승인 2007.09.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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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마음의 풍경
인간은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행복하고 보람 있는 삶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생활을 계속해 가는 가운데 모든 일에 분별을 앞세우고, 스스로 한 분별을 둘러싸고 집착과 갈등을 일으키며, 그것들은 곧 번뇌로 이어진다.
아무 말 없이 지나가는 여인을 보고 매우 아름답다고 생각하여 말이라도 걸어보았으면 하는 충동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같은 여인을 가리켜 마치 못생긴 표본이나 되는 것처럼 머리를 돌리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둥근 얼굴을 좋아하고, 어떤 사람은 갸름한 얼굴을 선호한다. 소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떤 사람은 ‘재즈’를 소란스럽다고 멀리 하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클래식’만 들으면 잠이 온다고 한다. 입맛이나 냄새의 경우는 더욱 차이가 심하다.

같은 대상을 놓고 각자의 주관적이고 자의적인 분별을 하고, 그 분별이 자기에게 좋은 것이면 곧 그에 매달리고, 만일 분별의 결과가 싫은 것이면 바로 배척하고 갈등을 일으킨다. 여기에 번뇌의 씨앗이 눈을 트게 된다.

분별과 변덕의 극단적인 예는 바로 우리 자체에서 엿볼 수 있다. 아주 맛이 좋고 귀한 것이라고 해서 애써 구해 온 과실을 한 입 씹어 목을 넘기고 나면, 그 다음에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 태도가 표변한다. 자기가 좋아서 넘긴 음식물이 1미터 남짓한 자기의 몸속을 통과해 오면 그것이 마치 불결의 대명사나 되는 것처럼 멀리하고 더러워한다. 이 이상의 변덕이 또 어디에 있겠는가?

어디 그뿐인가? 인도에서는 소똥을 거두어 손으로 마치 우리의 빈대떡 모양으로 만들어 집의 벽에 붙여 말린 다음, 연료로 사용한다.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이나 다른 사람의 배설물은 멀리한다. 이 무슨 해괴한 분별이란 말인가! 번뇌의 씨앗이라고 할 수 있는 분별이라는 것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제멋대로 이루어진 것인지를 짐작하게 한다.

있는 그대로 보라

분별은 언제나 상대 개념을 전제로 하지만, 분별의 대상은 하나일 뿐이고 언제나 그대로 있을 뿐이다. 그저 그대로 있는 대상을 놓고 사람들이 제멋대로 분별하고, 그 분별에 따라 스스로 반응을 일으키고, 그 반응에 따라 집착하거나 혐오한다. 중국의 3조(三祖) 승찬(僧璨)의 신심명(信心銘)에는 생사, 선악, 명암(明暗), 애증(愛憎), 시비, 미추(美醜) 등 40개의 상대어가 나온다. 이들은 모두 사람이 분별하고 개념 지은 것들로, 사람들은 이들이 서로 융합될 수 없는 양극인 것처럼 생각하며, 울고 웃는다.

그러나 잘 챙겨보면, 이들은 서로 상대적인 것일 뿐만 아니라,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 실체는 하나이다. 하나의 실체를 놓고 사람들은 제 멋대로의 환영(幻影)을 그려놓고, 그에 집착하거나 증오하며 번뇌를 거듭한다. 그러니, 알고 보면 번뇌는 밖에서 온 것이 아니요, 누가 안겨준 것도 아니며, 오로지 자기 스스로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인간이 그 속에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번뇌의 증세는 바로 분별병(分別病)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병은 밖에서 온 것이 아니고, 스스로의 마음이 만들어낸 것에 불과하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지만, 성철 스님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누가 산을 모르고, 물을 모르느냐고 비아냥거리는 사람도 없지 않지만, 몰라도 한참 모르는 사람이다. 성철 스님의 말씀은 분별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뜻이다. 마음에 끼운 색안경을 벗어던져 덧칠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이다.

하기야, 사람의 육신 그 자체가 이원적(二元的)으로 되어 있으니, 그 육신의 주인이 분별을 뛰어넘기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우리의 몸을 이루고 있는 눈, 귀, 콧구멍, 목구멍, 손, 다리, 콩팥, 폐, 혈관 등이 모두 두 개씩이고, 이는 우리 육신의 이원성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쌍(雙)은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라 균형을 도모하기 위한 것으로서 서로 돕고 보완하는 입장에 있고, 크게 보아 하나를 이루는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가 그 속에 깊이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분별하는 병도 그림자에 집착하여 정작 그 실체를 보지 못하는 무지에서 온 것이다. 너무 가까이에서 보지 말고 한 발 물러서서 볼 수 있는 여유와, 겉만 보지 않고 속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지혜를 가져야 한다. 결국, 그 병의 병원체(病原體)는 무명(無明)이라고 하겠다. 아무쪼록 무명을 벗겨내고 분별의 병을 멀리 떨쳐내도록 정진할 일이다.

학산 이상규|변호사·전 환태평양변호사협회(IPBA)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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