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꽃 속에서 연꽃을 피우다-마르크 샤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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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속에서 연꽃을 피우다-마르크 샤갈
  • 보일 스님
  • 승인 2024.09.10 10: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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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에서 찾은 사성제 이야기]
마르크 샤갈, 1921년 파리에서

火裏生蓮終不壞  
花似須彌葉似空 
普散淸香三界內
不憂容易落西風   

불길 속에 핀 연꽃 끝내 무너지지 않으니
꽃은 수미산 같고 잎사귀는 허공 같네
맑은 향 삼계에 널리 널리 흩뿌리니
서풍에 쉽게 질까 걱정하지 마시게

-『남명천화상송증도가사실』 중에서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신념을 추구하면서 세상에 대한 따듯한 시선을 잃지 않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특히 야만과 광기가 난무하는 전쟁 중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가자지구, 도네츠크, 레바논 등지에서 사람들이 북적이던 시장에 어린이와 여성 노인들이 폭격의 희생양이 되고, 평화롭게 왕래하던 교외 도로변에는 군인들의 시신이 즐비하다. 사람들은 때로는 이 참혹한 광경을 낱낱이 눈에 담기보다는 무감각을 선택하기도 한다. 일부러 둔감해지는 방법을 통해 충격을 견디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선택적 무감각은 최소한의 자기방어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의미의 방조이기도 하다. 하지만 객관적 거리가 확보된 상태에서야 이 무감각으로 일관할 수 있지만, 분노와 증오가 활활 타오르는 현장 한복판에서 그게 가능할 리 만무하다. 

선가(禪家)에서는 ‘화리생련(火裏生蓮)’이라는 표현을 종종 사용한다. 말 그대로 해석하자면 타오르는 불길 속에서 연꽃을 피운다는 의미다. 이미지를 연상해 보면 말이 되지 않는 표현이지만 수행에 관한 하나의 은유라고 할 수 있다. 수행승의 관점에서는 탐욕(탐貪), 성냄(진瞋), 어리석음(치痴)이라는 불길에 휩싸이기보다는 그 에너지를 오히려 수행의 동력으로 삼아 깨달음과 자비라는 연꽃을 피워낸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그런 은유가 아닌 실제로 불타는 전쟁 속에서도 그림을 통해 특유의 시적 호소력으로 사랑의 맑은 향기를 널리 널리 전해준 이가 있다. 바로 마르크 샤갈이다.    

“불합리하게 보이는 것을 모두 공상이나 동화로 치부해 버린다면, 그 사람은 자연을 이해하지 못했다는 의미이다.” - 마르크 샤갈

마르크 샤갈(Marc Chagall, 1887~1985)은 1887년 러시아 비텝스크(현재 벨라루스) 근교의 가난한 유대인 부부의 아들로 태어난다. 샤갈의 아버지는 중노동을 하거나 생선 가게에서 점원 일을 했고 어머니는 야채를 팔았는데, 샤갈의 아홉 명이나 되는 형제를 부양하기에는 버거울 수밖에 없는 살림이다. 어려운 살림에도 불구하고 샤갈은 일찍이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 덕분에 예술적 감성을 키워나갈 기회를 부여받는다. 그는 꿈과 상상력을 시각 언어로 표현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당시 차별받았던 유대인 신분으로 이동이 자유롭지 못했음에도, 1906년 샤갈은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이사를 감행하고 왕립 협회 예술학교에 입학해서 본격적으로 그림을 시작한다. 이후 1910년 샤갈은 당시 세상의 천재 예술가들이 집결했던 곳이자 표현의 자유가 넘실대는 파리로 유학을 떠난다. 

샤갈은 당시 파리에서 주류적 영향력을 발휘하던 입체파 속에서도 이에 편승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갈고 닦는다. 그 와중에도 샤갈은 그의 연인 벨라와의 결혼을 위해 일시 귀국했다가 때마침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고 국경이 봉쇄되면서 고국에서 8년간 생활하게 된다. 그 시기 샤갈은 혁명이 예술을 대하는 방식과 태도에 환멸을 느끼고 다시 파리로 돌아가고 아예 프랑스로 귀화를 선택한다. 

작품에서 드러나는 샤갈만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색채는 유럽인들을 매료시켰고 특히 아이가 그린 듯한 혹은 동시를 읽어 내려가는 듯한 몽환적이고 신비한 느낌의 묘사는 샤갈만의 고유한 스타일로 자리 잡기 시작한다. 샤갈이 파리에 머물던 십여 년의 기간은 샤갈 자신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말했듯이 재정적으로 안정되면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낸다.

그러나 다시 전 세계가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쟁의 포화에 휩싸이면서 샤갈은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도피하는데, 이 무렵 아내 벨라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큰 상실감을 겪게 된다. 샤갈은 프랑스 남부에 머물면서 작품을 통해 벨라를 추억하고 회고하면서 아픔을 극복한다. 이렇게 샤갈은 일생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그 누구보다도 전쟁의 공포와 불안을 잘 알고 있었지만, 우울과 비탄을 극복하고 작품을 통해 사랑과 희망을 꽃피운다. 

이후 샤갈은 새로 인연을 맺은 발렌티나 바바 브로드스키와 프랑스 생폴드방스에 정착해 만년을 보내면서 다양한 작품을 남겼고, 1985년 98세를 일기로 삶을 마감한다.  

“샤갈이 그림을 그릴 때는, 그가 잠들었는지 깨어 있는지 알 수 없다. 그의 머릿속 어딘가에 혹은 그 밖의 다른 곳에 천사가 있음이 틀림없다.” - 파블로 피카소

샤갈의 작품세계는 독특하고 그만의 스타일이 선명하기 때문에 누구나 처음 보는 작품을 마주하더라도 샤갈이 그렸음을 추측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 정도다. 그것은 아마도 그가 지배적이고 주류적인 화풍을 그대로 받아들이길 거부하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고집했기 때문일 것이다.

샤갈, <나와 마을>, 1911년, 미국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샤갈만의 스타일은 그의 작품 <나와 마을>(1911)에서도 잘 드러나는데, 샤갈은 어린 시절의 고향 비텝스크를 다양한 색채와 구도로 묘사하면서 향수를 달랜다. 

커다란 눈을 가진 소와 초록색 얼굴빛을 한 농부가 서로 마주하고 있다. 소와 농부의 시선 사이로 농부가 하루 농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아내가 마중 나와 발길을 재촉하고 있다. 소의 뺨에는 한 여인이 소젖을 짜는 모습이 그려져 있고 초록색 얼굴빛의 농부는 소에게 반짝거리는 모양의 나뭇가지를 선물하는 듯하다. 소와 인간이 서로를 헤아리듯 어울리고, 배경으로는 다채로운 색상의 집과 교회가 뒤집힌 채 세워져 있다. 마치 줄거리 없는 꿈을 꾸듯 조각 조각난 이미지들이 서로 중첩돼 있고 단절된 듯하면서도 서로 연결되어 있다. 

샤갈, <전쟁>, 1964년, 스위스 취리히 미술관

그렇다고 해서 샤갈이 마냥 천진난만한 시선으로 세상을 응시한 것은 아니다. 그가 살아내야 했던 현실은 처참한 전쟁의 연속이었다. 샤갈은 작품 <전쟁>(1964)에서 그가 겪었던 처참한 기억의 파편들을 꺼내어 모자이크처럼 캔버스에 하나하나 그려 넣는다. 

암흑천지 속에서 세상은 불타고 있으며, 사람들과 소가 불길 속에서 타 죽어가고 집도 송두리째 타들어 간다. 다급하게 피난을 떠나는 이들은 소달구지에 빽빽이 올라타서 목숨을 부지하려 애쓰고 있다. 그 아래에는 한 여인이 이미 목숨을 잃고 누워 있는 어린아이를 붙잡고 오열하고 있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다. 색채의 마법사로 불릴 만큼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색채를 즐겨 쓰는 샤갈이지만 전쟁에 대한 기억만큼은 온통 어둡고 잿빛일 뿐이다. 그나마 샤갈은 고향의 소를 다시 소환하면서 고통 속의 희망을 놓지 않으려 한다.             

“우리가 아무 스스럼없이 사랑이라는 말을 입 밖에 낼 때, 모든 것은 변하게 된다. 진정한 예술은 사랑 안에서 존재한다. 그것이 나의 기교고 나의 종교다.” - 마르크 샤갈

샤갈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왕립 예술학교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절, 그의 인생을 뒤흔든 운명의 상대를 만나게 된다. 바로 벨라 로젠펠트(Bella Rosenfeld, 1895~1944)이다. 샤갈의 인생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세계에서도 그녀를 빼놓고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샤갈이 진정 사랑했다고 회고한 여인 벨라 로젠펠트, 샤갈은 그녀의 나이 겨우 열네 살이었을 때 처음 만나 사랑의 감정을 품게 된다. 샤갈은 『나의 삶』에서 벨라와의 첫 만남을 이렇게 기술한다. “그녀의 침묵은 내 것이었고, 그녀의 눈동자도 내 것이었다. 그녀는 마치 내 어린 시절과 부모님, 내 미래를 모두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나를 관통해 볼 수 있는 것 같았다.” 샤갈에게 있어 벨라는 샤갈의 작품세계에서 영감과 통찰을 전해주는 뮤즈이자 현실에서는 연인이다. 

샤갈, <생일>, 1915년,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샤갈은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벨라와의 결혼을 감행한다. 마침내 사랑을 이루게 된 샤갈이 결혼 승낙을 받고 그린 작품이라고 알려진 <생일>(1915)에서는 그 무렵 샤갈의 감정이 오롯이 드러난다. 

그림 속에서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입술을 갖다 대려 하는 샤갈과 놀란 눈을 하면서도 이에 호응하는 벨라의 모습이다. 그림 속 두 남녀는 이미 너무나 초현실적이다. 여인의 두 발은 허공으로 이제 막 뜨려 하고 있고, 남성의 발은 이미 허공중에 붕 떠 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남성이 그 와중에 마치 곡예를 부리듯 고개만을 돌려서 여인과 마주한다. 여인이 손에 쥐고 있는 꽃다발 속 잎사귀들과 꽃잎들마저도 두둥실 하고 같이 떠오를 기세다. 심지어 방안을 장식하고 있는 탁자, 카펫, 작은 침대마저도 들썩이는 듯하다. 샤갈이 느낀 사랑이라는 감정을 표현하는 시각 언어는 바로 이런 것이다. 이 순간 샤갈이 몸과 마음에는 오직 사랑만이 깃들어 있고 그 마음은 주변 사물에까지 전이되고 있다.        

“삶이 언젠가 끝나야만 한다면 우리의 삶을 사랑과 희망의 색으로 칠해야 합니다.” - 마르크 샤갈  

샤갈이 평생 유독 사랑이라는 감정에 침잠해 들어간 것은 어쩌면 양차 대전을 겪으면서 분노와 증오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몸소 목격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혁명이라는 이름 속에 은폐된 폭력과 억압뿐만 아니라,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무자비한 살육과 파괴는 인간의 마음마저도 병들게 한다. 인간으로서 가지는 최소한의 감정 상태마저도 짓밟아 버리고 무감각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전쟁의 무서움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 한편에서는 올림픽이 열리고 화합을 노래하지만, 동시에 한편에서는 여전히 살육이 진행 중이다. 

증오라는 독이 차츰 퍼지면서 인간의 이성을 마비시켜가고, 그 광기가 무감각과 침묵의 커튼 뒤에서 어른거리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공포가 세상을 뒤덮고 있는 요즘, 새삼 전쟁의 불길 속에서도 연꽃을 피워내듯 사랑을 이야기한 마르크 샤갈이 더욱 크게 다가온다. 

 

보일 스님
해인사로 출가해 해인사승가대학을 졸업, 서울대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박사를 수료했다. 현재 해인사승가대학에서 경전과 논서를 강의하며, 예술과 인공지능을 주제로 붓다의 지혜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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