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대화엄사] 화엄 종풍을 계승한 도광·도천 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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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대화엄사] 화엄 종풍을 계승한 도광·도천 스님
  • 이종수
  • 승인 2024.09.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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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으로 그린 빛의 세상, 지리산 대화엄사] 화엄의 산문山門을 다시 열다

구례 화엄사는 지리산 불교에서 중심이 돼온 고찰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화엄경』을 돌에 새겨 쌓아 올린 장육전(丈六殿, 현 각황전)이 세워졌으며 화엄교단 남악파(南岳派)의 근거지이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도 화엄종 사찰로서 전통이 계승돼 왔으며, 조선 전기까지 그 화엄 종풍이 이어져 왔던 것으로 보인다.

다른 사찰들과 달리 큰 화재 없이 신라시대에 건축된 건물들이 무너지지 않고 보존돼 왔으나 임진왜란의 화마는 피해 가지 못했다. 결국 왜군의 분탕질로 장육전이 무너지고 많은 건물이 소실됐다. 전란이 끝난 후 중창을 시작해 지금까지 전해지는 각황전, 대웅전 등이 건립됐다. 또한 임금으로부터 선교일치의 시대적 정신을 구현하는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 문서, 즉 교지를 받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화엄사는 또 한 번의 혼란기를 맞이한다. 일제 총독부는 처음에 화엄사를 전국 30본사에서 제외하면서 지리산을 대표하는 선교양종대가람 화엄사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화엄사 사부대중의 끈질긴 요청으로 1924년에 이르러 본산(本山)으로 승격되기는 했으나 이미 화엄사는 화엄 종풍의 전통이 무너져 가고 있었다. 게다가 한국전쟁 때 지리산이 빨치산의 근거지가 됨으로써 사찰 전체가 소실될 뻔하기도 했다. 

전쟁 이후 화엄 종풍의 전통이 무너지고 텅 빈 사찰을 일으켜 세울 중흥주가 필요했다. 바로 이때 도광 스님과 도천 스님이 화엄사에 왔다. 

도광(導光, 1922~1984) 스님 
“우리 두 사람이 평생 도반으로서 인연을 이어,
세세생생 이 땅에 도인들이 공부할 수 있는 좋은 도량과
인연을 만들어 보도록 합시다.”

화엄사의 중흥 이끈 도광 스님

도광(導光, 1922~1984) 스님은 1922년 전남 담양 금성면 외추리에서 부친인 김기춘(우와거사)과 모친인 장오현 사이에서 2남 2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김오남(金午南)이었다. 1937년(16세) 7월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동헌 스님을 은사로, 동산 스님을 계사로 출가했다. 

1939년 4월 범어사 강원에서 사집과(四集科) 과정을 수료했으며, 1945년 3월 금강산 장안사에서 사교과(四敎科)를 수료했다. 그리고 1946년 동안거부터 부산 범어사, 합천 해인사, 장성 백양사, 담양 보광선원 등지에서 20안거를 성취했다. 특히 1952년 1월부터 평생 도반인 도천 스님과 함께 스님의 고향인 담양에 보광선원(普光禪院)을 개설해 수행했다.

1954년 이후 불교계 정화운동이 일어나 비구승과 대처승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고, 1955년 8월 12~13일 조계사에서 개최된 전국승려대회를 기점으로 비구승 측으로 종권이 넘어왔다. 그 결과 새로운 종헌의 제정, 종회의원 선출, 종정을 비롯한 집행부의 교체, 전국 사찰의 주지 교체 등이 단행됐다. 이런 변화 속에서 도광 스님은 강진 백련사의 주지로 1955년 10월 15일에 취임했다.

1962년부터는 제1~3대 중앙종회의원 및 제1~2대 감찰위원을 역임하며 종단 중흥에 헌신했다. 이후 1965~67년 부산 범어사 주지, 1967~69년 수원 용주사 주지를 거쳐, 1969년 화엄사 주지를 맡았다. 당시의 상황을 「리산당도광대선사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도광은 걸망에 검은 고무신으로 전국 각지에 원력을 세워 화주 수행하니 그의 인욕, 자비, 외호심은 사부중에 감화되어 발심 출가자, 구참납자가 운집여해하니 구층암 백련결사로 선교양종의 종지가 재현된 듯하다.”

도광 스님은 1969년 11월부터 1975년 7월까지 화엄사 봉천암과 구층암에 선원을 개설해 생사를 내놓고 정진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고무신을 신고 걸망을 짊어지고 화주해 살림을 꾸려나갔다. 담양 보광선원을 운영할 때도 시장에 나가 장사하며 선원 운영 자금을 마련했다는 증언이 있듯이, 스님은 화엄사에서도 대중의 수행을 위해 자신을 희생해 주지의 소임을 맡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차츰 화엄사의 수행풍토와 살림이 정착되자, 1975년 8월에 해인사 주지로 초빙돼 가게 됐다. 

그러나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자행된 10·27 법난으로 화엄사 주지 명선 스님이 연행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신군부는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선을 다른 데로 돌리고 불교 재산을 정치자금으로 활용하기 위해 총무원장 및 전국 본사 주지 등 153명을 강제로 연행하고 사찰의 재산 관련 서류를 압류하는 법난을 일으켰다. 

당시 화엄사 조실로 있던 동헌 대종사는 혼란을 타개할 인물로 제자 도광이 적임자라고 판단하고 불러들였다. 당시 도광 스님은 해인사 주지 소임을 마치고 은거해 수행하고 있었는데, 은사의 부름을 받고 화엄사로 가서 다시 주지가 됐다. 1980년 11월 화엄사 주지에 취임, 혼란을 수습했다. 그런데 1983년 9월에 동헌 대종사가 화엄사 구층암에서 원적하더니, 그 이듬해인 1984년 9월에는 도광 스님마저 입적하기에 이르렀다. 스님의 세수 63세, 법납 47세였다.

도광 스님은 1969년 화엄사 주지를 맡은 이후 사찰의 행정적 안정은 물론, 수행 가풍을 정착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바쳤다. 스님이 바라던 것은 바로 신라시대 이래 화엄사의 정통성이라 할 수 있는 화엄 종풍의 확립이었을 것이다. 

도천(道川, 1910~2011) 스님
“오늘 저 많은 별이 우리 두 사람의 결사도반
서원을 축하하는 듯합니다. 상좌를 두더라도 서로 구분 없이
함께 교육시키도록 합시다.”

화엄 종풍 이어간 도천 스님

도광 스님을 이어 화엄사의 정신적 지주로서 문도의 수행 가풍을 지켜온 분은 도천(道川, 1910~2011) 스님이다. 스님은 1910년 11월 평안북도 철산군 백량면 하단리에서 부친 김만길과 모친 정씨 사이에서 5남 2녀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1929년에 금강산 마하연 산내 암자인 만회암에서 묵언(默言)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다. 

이후 10여 년간 금강산 마하연, 신계사, 유점사, 표훈사, 장안사 및 묘향산 상원사 등에서 수행했다. 1938년 금강산 표훈사에서 수행하던 중 동년배인 도광 스님을 처음 만나 결의형제의 인연을 맺었다.

도천 스님은 1945년 3월 범어사에서 동산 율사를 계사로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했다. 1946년에 서울 대각사와 도봉산 망월사에서 수행했고, 1948년 지리산 칠불암에서 금오 스님을 모시고 서암 스님 등과 결사 정진에 참여했다. 1952년 도광 스님과 함께 담양에 보광선원을 개설해 함께 수행하다가 1954년 정화운동에 참여했다. 

한국전쟁으로 폐허가 된 충남 대둔산 태고사로 찾아가 1962년 자청해 주지가 되고, 움막 한 채를 짓고 나물죽을 끓여 먹으며 중창불사를 일으켰다. 1974년 삼불전, 1977년 극락전, 1980년 산신각, 1985년 관음전, 1992년 108계단, 1993년 지장전, 2006년 종각, 2009년 선방을 완공했으니, 일생을 태고사 불사를 위해 매진한 것이었다. 

그 사이 1987년 3월 조계종 원로의원이 됐으며, 1996년 하안거와 동안거에는 천은사 방장선원 조실, 1997년 동안거에는 화엄사 연기암 선원 조실, 2001년 하안거와 동안거에는 태안사 원각선원(전 금강선원) 조실, 2002~03년 하안거에는 화엄사 선등선원 조실로 주석하며 백장청규(百丈淸規)의 정신을 후학들에게 가르쳤다. 그리고 2004년 5월에는 해인사에서 대종사 법계를 품수받았다. 

평소 스님의 보살행에 대해 「도천당도천대종사비명」에서는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까만 고무신에 달랑 걸망 메시고 낙하(落霞)를 등지고 산 비탈길을 돌아가는 모습은 멀리서 보면 율사(律師)처럼 엄숙(嚴肅)해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춘풍면(春風面)처럼 따스하고 부드러운 미소(微笑)여.”

2011년 9월 28일, 도천 스님은 “나는 깨친 것이 없어. 수미산 주인집에 머슴 살러 갈거여!”라는 말씀을 남기고 태고사에서 입적했다. 도천 스님은 도반이었던 도광 스님이 무너져 가고 있던 화엄사의 수행 가풍을 다시 일으켜 세울 때 옆에서 묵묵히 도와주다가, 도광 스님이 먼저 입적에 들자 본격적으로 후학들을 지도하며 화엄사를 안정시켰다. 

담양 보광사 창건 초기 대중과 함께한 도광, 도천 스님
1973년 도광 스님 생신을 맞아 화엄사에서 

부휴계 법맥에서 도광·도천의 법맥으로

무너져 가던 화엄사를 다시 일으켜 세운 공로가 도광 스님에게 있다면, 그 정신을 이어 화엄사의 수행 가풍을 정착시킨 분은 도천 스님이었다. 도천 스님은 화엄사 선원의 조실로 주석하면서 신라시대의 화엄 종풍을 게을리하지 말 것을 후학들에게 부탁했다. 그리고 두 스님의 입적 이후에도 그 문도들이 화엄사를 이끌어가고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 정착된 화엄사 부휴계(浮休系)의 법맥이 계승된 것과 다름없다고 평가된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전국 불교계는 임진왜란 의병장 청허 휴정(서산대사)의 문도를 자처하는 청허계(淸虛系)와 병자호란 의병장 벽암 각성의 문도를 자처하는 부휴계로 나뉘어 경쟁했다. 화엄사는 벽암 각성이 주석하며 중창한 곳으로 부휴계의 대표적인 사찰이었다. 부휴계는 선과 교학의 일치를 표방하면서도 교학에서는 화엄사상을 중시했으므로, 신라시대 화엄 종풍을 계승한 부휴계의 사찰이 됐던 것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수백 년을 이어왔던 화엄사 부휴계의 법맥이 끊어졌다. 지리산 불교를 대표하며 선의 법맥과 교의 강맥을 이어오던 화엄사의 전통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화엄사의 화엄 종풍을 다시 일으켜 세우고 새로운 법맥을 정착시킨 스님이 도광·도천 스님이었다. 

2016년 9월 조성된 도광·도천 대종사 합동 부도탑. 사진 유동영

두 스님이 화엄사에 주석하고 입적한 이후 그 문도가 화엄사를 이끌어왔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는 조선 후기 이래 이어왔던 부휴계의 법맥이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치며 유명무실했다가 두 스님이 화엄사에 정착한 이후 새로운 법맥으로 정착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도광 스님과 도천 스님이 제자들을 구분하지 않았듯이 그 제자들 역시 스승을 구분하지 않고 모셨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도광·도천 두 스님이 화엄사에서 이루고자 했던 것은 신라시대 이래 이어온 화엄사의 화엄 종풍을 정착시키고, 조선 후기 이래 ‘선교양종대가람’으로서 부휴계를 대표하던 사찰의 위상을 회복하는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도반이었던 두 스님은 화엄사에서 이루고자 한 뜻이 같았고 또 제자들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제자들 역시 두 스님의 법맥을 구분하지 않고 하나의 법맥으로 여기면서 화엄사에서 화엄 종풍의 정신을 이어가고자 했으니, 신라시대 화엄 종풍을 계승하고 조선 후기 부휴계를 계승한 도천·도광의 법맥이라 할만하다. 이제 화엄사에 남은 과제는 두 큰스님의 유지를 받들어 화엄 종풍의 정신을 이어가는 것이리라. 

 

사진. 화엄사 제공

 

이종수
국립순천대 사학과 교수. 한국불교사를 전공하고, 동국대 사학과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불교학술원 조교수와 순천대 지리산문화연구원 HK교수를 역임했다. 저서로 『운봉선사심성론』(2011) 등이 있으며, 「숙종 7년 중국선박의 표착과 백암성총의 불서간행」 「조선후기 가흥대장경의 복각」 「16~18세기 유학자의 지리산 유람과 승려 교류」 등 다수의 논문을 저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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