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국본찰 대흥사 표충사의 서산대사와 의승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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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본찰 대흥사 표충사의 서산대사와 의승들
  • 김상영
  • 승인 2024.08.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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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남 땅끝 아름다운 절, 미황사] 해남에 오신 서산대사
대흥사에 모셔진 서산대사 승탑(보물)

서산대사와 대흥사

서산대사, 즉 청허 휴정(淸虛 休淨, 1520~1604)은 조선시대 불교를 대표하는 고승이자, 우리 역사를 크게 빛낸 위인이다. 대사는 조선불교가 존폐 위기에 있을 때 태어났으며, 임진왜란으로 조선 사회 전체가 위기에 처해 있을 때 삶의 말년을 보냈다. 조선시대 불교는 ‘청허 이전’과 ‘청허 이후’로 구분할 수 있을 만큼, 대사는 한국불교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대사의 저술과 선풍(禪風)은 17세기 이후 불교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그의 제자들에 의해 성립된 이른바 ‘임제태고법통’은 오늘날까지 한국불교의 근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정조(正祖)대왕은 이러한 대사의 삶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대사의 삶을 찬탄하면서 “(대사는) 종풍을 발현하고, 국난을 널리 구제하였으며, 의병을 일으켜 근왕(勤王)의 원훈이 되었다”고 했다. 

정조 임금이 찬탄했듯이, 대사는 크게 세 가지의 업적을 남겼다. 첫째 침체에 빠져 있던 16세기 조선불교의 종풍을 발현시킨 업적, 둘째 전쟁으로 도탄에 빠져 있던 국가를 널리 구제한 업적, 셋째 조선 왕실을 지켜낸 최고의 업적 등이다.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존호처럼, 서산대사는 16세기 불교계와 조선 사회를 널리 구제한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해남 두륜산에 자리한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의발(衣鉢, 가사와 발우)이 전래된 이후 오늘날까지 호국도량으로서의 사격(寺格)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정작 대사의 일대기를 전하는 각종 자료에서 대사와 대흥사의 인연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후대 자료에는 의발 전래가 대사의 유언에 따라 이뤄진 것이었음을 전하는 내용이 많다. 

서유린(徐有隣)이 지은 「표충사기적비명(表忠祠紀蹟碑銘)」(1791)에 “세상을 떠나려 할 때 그의 제자들에게 부탁하기를 ‘내가 죽으면 의발은 반드시 해남으로 보내라. 그 고을의 두륜산에 대둔사(대흥사)가 있는데 남쪽으로는 달마산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월출산이 보이며 동쪽에는 천관산이 있고 서쪽에는 선운산이 있어 내가 참으로 좋아하던 곳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아울러 「표충사보장록(表忠祠寶藏錄)」(1846) 등의 자료에도 의발 전래와 관계된 내용이 실려 있다. 실제로 서산대사가 의발 전래와 관계된 유언을 남겼는지 여부는 단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대사의 입적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대사의 의발은 이곳 대흥사로 모셔졌으며, 이후 오늘날까지 대흥사는 서산대사의 불교를 상징하는 도량으로 그 위상을 굳건히 유지하고 있다. 

표충사 안에는 서산대사(가운데)와 사명대사, 처영 스님의 진영을 모시고 있다.
표충비각 「서산대사 표충사기적비」 

 

임진왜란과 의승

임진왜란 시기 승려 군사 집단의 참전 결행은 매우 특별한 것이었다. 전란 극복에 앞장섰던 세 부류의 군대 가운데 관군과 의병은 의무적이면서도 당위적 성격이 짙은 군대에 속한다. 반면, 의승(義僧) 또는 의승군으로 칭해지는 승려 군사 집단은 철저하게 자발적 참여하에 이뤄진 군대라는 특성이 있다. 특히 이들 의승 활동은 연산군-중종 대라는 조선왕조 최악의 불교 탄압기를 거친 이후 피지배계층에 의해 전개된 것이라는 점에서 소중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

조선의 의승군은 선조의 환궁, 평양성 탈환, 청주성 수복, 행주대첩, 노원평 전투 등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이들뿐만 아니라 의승군은 전국 곳곳에서 발생한 크고 작은 전투에서도 많은 전과를 거뒀으며, 이들의 활약은 임진왜란사 전체에서도 상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전쟁 당시는 물론이고 전쟁이 종료된 이후에도 조선의 의승군은 철저하게 차별적인 대우를 받는 집단에 불과했다. 

서산대사를 비롯한 의승장과 이들을 따랐던 수많은 의승은 단지 승려 신분이었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한 평가와 예우를 받지 못했다. 동일한 전투에서 함께 전사했음에도 불구하고 의병장 조헌(趙憲)과 700의병, 그리고 영규대사와 800의승에게 가해졌던 예우와 포상은 너무도 달랐다. 이 같은 측면에서 조선 중기 의승의 활동과 업적을 더욱 재조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표충사와 춘추제향 봉행

의병장, 또는 의승장들이 남긴 업적을 기리는 추념사업 가운데 사우(祠宇)의 건립과 제향 봉행은 가장 대표적이면서도 상징적 의미를 지니는 사업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밀양 표충사(1738), 해남 표충사(1788), 묘향산 수충사(1794) 등의 공식 사액사우(賜額祠宇)가 건립된 것은 임란 시기로부터 150~200여 년이나 흐른 뒤였다. 고경명, 고종후 등의 위패를 모신 광주 포충사(1603), 이순신, 이억기 등의 위패를 모신 여수 충민사(1604)는 임진왜란이 끝난 직후 사액을 내렸다. 

이후 현종-숙종 대에 임진왜란 시기 활동했던 충신 열사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사우를 건립해 추모하는 사업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에 비해 의승의 희생과 전공을 추모하고 의승장을 배향하는 일은 매우 늦게 진행됐으며 그 과정 또한 순탄치 못했다. 

의승장을 추념하기 위해 최초로 공식 건립된 사액사우는 밀양 표충사였다. 밀양 표충사는 다양한 창건설이 존재하지만, 이곳에서의 춘추제향은 1739년 가을부터 본격적으로 봉행되기 시작했다. 밀양 표충사의 사액 청원은 태허 남붕(太虛 南鵬) 스님이 주도했다. 남붕 스님은 지역 유림과 여러 관료를 찾아다니면서 밀양 지역 출신인 유정, 즉 사명대사의 공적을 알리는 노력을 했으며, 결국 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사우의 중수라는 성과를 얻어낼 수 있었다. 

밀양 표충사의 탄생은 한편으로 만시지탄의 아쉬움을 느끼게 하는 일임이 분명하지만, 오히려 의승장을 공식적으로 추념하는 사우가 건립될 수 있다는 선례를 남겼다는 점에서 소중한 의의를 발견할 수 있다. 실제로 해남 표충사 건립 과정에서 밀양 표충사의 사례는 중요한 전거이자 선례로 적극 활용되기도 했다. 

대흥사 경내에 있는 표충사 전경

해남 표충사는 매우 어려운 과정을 겪은 이후 공식 사우로 지정될 수 있었다. 이 일은 대흥사(대둔사) 계홍(戒洪)과 휴정의 7세 법손 천묵(天默) 등의 스님들에 의해 추진됐다. 천묵 등은 ‘발이 부르트도록(繭足)’ 많은 사람을 만나고 다녔으며, 글을 엮어 조정에도 여러 차례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서유린, 「표충사기적비명」). 당시 대흥사 스님들은 무엇보다 밀양 표충사, 특히 스승을 제자의 자리에 모신 현실에 대해 강하게 문제를 제기했다. 이것은 존비(尊卑)의 차례를 잃은 것이고, 사리와 체면이 뒤바뀐 것이라는 지적이었다. 이들의 노력은 1788년 4월 무렵 결실을 보게 됐다. 결국 정조에게 대흥사 스님들의 뜻이 전달됐으며 정조는 보다 자세한 내용의 품의를 지시했고, 이후 당상관 서유린의 보고를 받아들여 1788년 7월 5일 사당 건립 일을 윤허하게 됐던 것이다. 

대둔사 스님들은 청허 휴정을 배향하는 사우 건립을 위해 ‘발이 부르트도록’ 다녀야 했고, ‘죽음을 무릅쓰는(玆敢冒死呼)’ 용기를 내야만 했다. 임진왜란 발발 200여 년이 흐르고, 그것도 대흥사 스님들이 온갖 고초를 겪은 이후에야 표충사 건립은 비로소 공적 승인을 얻을 수 있었다. 임진왜란 극복에 끼친 의승의 공적, 특히 서산대사의 역사적 위상을 감안할 때 지난했던 해남 표충사 건립 과정은 참으로 많은 점을 시사해 준다. 

1789년(정조 13) 4월 27일, 해남 표충사에서는 사당 완공 이후 첫 번째 제향을 봉행했다. 이후 표충사 제향은 매년 봄과 가을 꾸준하게 봉행됐는데, 이때의 춘추제향에서 읽혔던 「춘추시향축문」 내용은 지금도 전하고 있다. 아울러 대흥사 성보박물관 소장 「표원참사록」과 담양 용흥사 소장 「제임명함록참사록」을 통해 표충사 제향과 관련한 다양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표충사 건립 과정에서 서기 역할을 담당했던 장우(壯愚) 스님은 1791년 어가가 지나는 길에서 직접 대둔사의 복호와 보솔(保率)의 혜택을 요청하는 일을 벌이기도 했다(윤지범, 「표충사기」). 어쩔 수 없이 왕은 이 같은 요청을 받아들여 대둔사에 복호 외 보솔 30명을 주는 조치를 취했지만, 표충사 운영을 위한 재정 기반은 여전히 취약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결국 등오(登旿) 스님을 중심으로 한 표충사 관계 대중은 위토(位土)를 마련하기 위한 불사에 나섰다. 각자 주머니를 털어 모으거나 적극적인 화모(化募) 활동에 힘입어 위토는 어느 정도 장만돼 간 듯하며, 「위토원입록」은 그 결과가 수록된 자료다. 

표충사 춘추제향은 1871년에 이르러 중단되고 말았다. 1871년은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이 내려진 해였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표충사에 주어졌던 부역 면제의 혜택과 보솔은 이 영으로 인해 취소됐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표충사는 한식과 중양(重陽, 음 9월 9일)에만 차례를 올렸다고 하는데, 1871년 이후의 춘추제향 설행 문제에 대해서는 별도로 살펴봐야 할 과제다. 

 

대흥사 호국대전. 의승군 추모 공간으로 활용될 예정이다.

호국대전 불사

이미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대흥사는 지난 2018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공식 등재되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이제 ‘호국본찰 대흥사’는 온 인류가 함께 보존하고 전승해야 할 ‘세계인의 문화유산’이 된 것이다. 더 나아가 대흥사는 호국대전(護國大殿) 완공이라는 대작불사의 회향을 목전에 두고 있다. 호국대전은 그 규모나 성격으로 볼 때, 향후 한국 호국불교를 상징하는 건축물이자 성소(聖所)로 자리할 가능성이 크다. 

필자는 이 불사의 소식을 접한 이후부터 호국대전에 호국의승을 위한 추모공간이 마련됐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사중 스님들께 전달해 왔다. 그동안의 호국불교 선양사업이 지나치게 특정 의승장을 추모하는 방향으로 전개됐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 법명을 확인할 수 있는 의승과 법명조차 확인되지 않는 의승을 위한 위패 봉안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의견이었다. 다행스럽게 호국대전 내부의 위패 봉안 불사는 산중 공의를 거쳐 이제 본격적 실행 단계까지 이르게 됐다. 

임진왜란을 극복해 가는 과정에서 희생된 의승은 그 정확한 규모조차 파악하기 힘든 상태다. 이 시기 의승은 ① 의승장 ② 법명을 확인할 수 있는 의승(전명의승傳名義僧) ③ 법명조차 확인하기 어려운 의승(망명의승亡名義僧) 등의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① 과 ② 는 불과 수십 명에 지나지 않는다. 수천 명에 달했을 ‘망명의승’의 고혼을 위무하고 그들의 업적을 추념하는 일은 우리 후손 모두의 몫이 돼야 한다. 앞으로 대흥사 호국대전이 의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기리는 추모공간으로 널리 알려질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유동영

 

김상영
동국대 사학과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석사를 거쳐 동국대 대학원에서 「고려시대 선문 연구」로 박사학위 취득했다. 1991년부터 중앙승가대 불교학부 교수로 재직, 2023년 퇴직했다. 저서 『전통사찰총서』(1~21권)와 한국불교사와 관련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이 글과 관계된 저서로 『표충사-해남 대흥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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