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많은 부처님, 대웅보전 천불도
미황사 대웅보전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천불도(千佛圖)는 조선 후기 불교회화의 걸작으로 손꼽힌다. 보통은 벽면이나 기둥에 직접 그리지만, 미황사 대웅보전 벽화는 한지에 그림을 그리고 이 그림을 벽면에 붙였다. 탈부착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매우 독특한 장엄 방식이다. 제작 당시 천불도 불사를 주관한 스님과 직접 그림을 그린 화승(畵僧)의 안목이 돋보인다.
조선 후기에 제작돼 당시 사람들에게 지상에 건설된 극락의 모습으로 다가왔을 천불도 속 수많은 부처님은, 미황사를 찾는 많은 이들에게 간절히 소원하는 바를 다 들어줬을 것이다.
땅끝마을 해남 미황사는 매년 10월에 열리는 괘불재(掛佛齋)로도 유명하다. 야외에 괘불을 걸고 진행되는 괘불재는 2000년부터 시작돼 현재는 해남의 문화축제로 자리 잡았다. 해남 주민을 비롯한 많은 사람이 1년간 마음을 모아 수확한 것을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만물공양(萬物供養)이 인상적인 괘불재다. 가을에 햇살, 바람, 비, 땅의 도움과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룩된 성과물을 나누고 축하하는 땅끝마을 사람들의 대동제(大同祭)로, 미황사 괘불재는 많은 사람에게 매년 10월을 그리워하게 한 행사였다.
미황사는 의조화상이 통일신라 경덕왕 8년(749)에 창건했다는 설화가 전해지지만, 기록 대부분은 조선 후기에 집중됐다. 「달마산미황사대법당중수상량문」(1754)에 따르면, 미황사는 정유재란 이후 세 차례에 걸친 대규모 중창이 있었다. 1차는 1598~1601년, 2차는 1658~1660년, 3차는 1751~1754년에 이뤄졌다. 3차 중건 때 현재의 대웅보전과 천불도가 함께 조성됐다.
대웅보전이 중건되고 천불도가 제작된 1754년은, 미황사가 명종의 장남 순회세자(順懷世子, 1551~1563)가 머물렀던 용동궁(龍洞宮)의 원당(願堂)사찰로 기능하던 시기였다. 이 같은 왕실과 관련된 배경이 대웅보전 건립과 천불도 제작의 원인으로 짐작된다.
대웅보전과 천불도가 건립된 당시 미황사에 주석했던 스님들은 염불과 천불신앙을 강조하며 다양한 신앙 활동을 전개했다. 벽하(碧霞) 스님은 만년에 선송(禪頌)을 좋아해 관련 서적을 탐독하며, 『선문염송설화(禪門拈頌說話)』의 잘못된 부분을 지적하는 학문적 태도를 유지했다.
연담유일(蓮潭有一, 1720~1799) 스님은 대둔사 제12대 종사이자 화엄학의 대가로 선과 교에 능했다. 1768년 미황사 주석 당시 『임하록(林下錄)』에 “미황사는 예부터 천 분의 부처님이 출현할 곳이다”라고 기록했다. 환봉(1767~1850) 스님은 고의 스님을 거느리고 경주 기림사로 가서 대흥사 천불 조성에 참여했다. 이러한 사찰의 분위기와 스님들의 활약은 미황사 천불도 조성에 큰 영향을 미쳤다.
염불은 성불(成佛)과 왕생(往生)을 위한 수행 방법 중 가장 쉽고 빠른 방법으로 여겨졌으며, 참회의 수단으로도 널리 행해졌다. 천불도는 이러한 염불 수행을 돕기 위한 시각적 보조 자료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미황사에서의 천불도 조성은 단순한 장엄을 넘어, 부처님의 자비와 중생구제 의지를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하는 중요한 신앙적 표현이었다.
천불도에 담긴 예술성
미황사 대웅보전 천불도는 종이에 그려 벽에 붙인 것이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두 개의 대들보 안쪽에는 앉아 있는 부처님들이 서로 마주 보도록 배치했고, 바깥쪽에는 구름을 타고 서 있는 부처님을 표현해 어칸(御間, 정면 가운데 칸)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같은 모습의 부처님상이 반복되지만 각각 고개를 돌려 다른 방향을 바라보게 했다. 마치 부처님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 같기도 하다.
부처님 머리에서 빛나는 두광(頭光)은 녹색과 황토색을 번갈아 사용해 전체적으로 다양한 색상이 조화롭게 처리됐다. 부처님의 머리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되는데, 머리 위에 높게 솟은 정상 계주(髻珠, 불상의 머리 모양)와 머리 중앙에 중간 계주를 표현하는 방식을 교차해 표현했다. 부처님이 탄 구름은 흰색 바탕에 먹으로 그렸고, 배경을 이루는 천공(天空)은 먹칠해 구름이 부재 끝까지 이어지도록 했다. 부처님의 둥근 얼굴은 먹선으로 처리했고 작은 입술에는 홍색을 덧칠했다. 바깥쪽 대의(大衣, 겉에 걸친 옷)는 붉은색과 흰색을, 안쪽 대의는 하엽(荷葉, 연꽃의 잎)과 청록을 번갈아 칠해 변화를 줬다.
사방의 내목도리 장여와 내목도리 사이의 판벽에는 작은 크기로 무수히 많이 서 있는 부처를 종이에 그려 벽면에 붙였다. 미황사 대웅보전의 대들보와 판벽에 그려진 천불의 수는 결실된 두 분의 부처님을 포함하여 정확히 천(千)이다. 천불신앙은 일반 대중이 참회하고 부처가 되기 위해 천불의 명호를 수지하고 독송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불교에서 천불은 삼천불(三千佛)이나 백천불(百千佛)의 줄임말로 볼 수 있지만, 반드시 삼천이나 백천 명의 부처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삼천이나 백천은 숫자로 헤아릴 수 있는 가장 많은 수를 의미한다. 즉 ‘천(千)’이라는 숫자는 ‘많다’는 뜻의 상징적인 의미이기 때문에 천불은 다불(多佛)로 해석될 수 있다. 한 분의 부처님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부처님이 중생을 구제한다는 믿음에서 이러한 관념이 생겨났을 것이다(이종수, 「해남 대흥사의 천불 조성과 그 시주자들」, 『강좌미술사』43, 한국불교미술사학회, 2014, p.104.).
대부분의 천불도가 부처님이 앉은 모습으로 표현되는 것과 달리, 미황사 천불도는 서 있는 입상으로 표현된 점이 매우 독특하다. 이러한 양식은 감로탱에 등장하는 일곱 분의 부처님을 그린 칠불(七佛) 양식으로부터 영향받은 것으로, 자유롭고 다양한 구성이 돋보인다.
대의나 두광의 색을 달리 사용하면서 밑그림인 초본에 2~3명의 인물을 가감하거나 조합해 천불의 수를 맞춰 표현했다. 미황사 천불도는 이러한 예술적 특징과 신앙을 통해 대중들에게 부처님의 세계를 시각적으로 구현하고, 신앙적 위안을 제공하는 중요한 문화유산이다. 또한 미황사 천불도는 예배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대웅보전을 장엄하는 단청의 일부로 조성됐다.
천이라는 숫자에 맞춰 중생의 기도 소리를 듣고 지금 막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자세를 취한 천불의 모습은, 미황사 천불도가 단순한 장엄을 넘어 특별한 신앙적 목적으로 조성된 사실을 암시한다. 즉 부처님의 자비와 중생을 구제하려는 의지를 생생하게 전달하고 있다.
천불도의 시각적 표현과 신앙적 의미
미황사 대웅보전의 천불도는 단순한 장엄을 넘어, 부처님의 세계를 눈앞에 펼쳐 놓는다. 현실 세계에 부처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미황사 대웅보전 천 분의 부처님은 임종을 맞는 사람들을 극락으로 인도하기 위해 내려와 맞이하는 내영(來迎)하는 모습이다. 서 있는 부처님의 모습은 미황사 괘불에서 볼 수 있듯이 단순한 장엄이 아닌 신앙적 의미를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자세는 중생을 구제하는 부처님의 자비를 상징하며, 모든 중생을 구원하고자 하는 대승불교의 핵심 사상을 반영한다. 천불도의 입상 부처님들은 각기 다른 손짓과 표정으로 부처님의 다양한 면을 표현해, 불교도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더욱 깊이 체험할 기회를 제공한다.
존상이 봉안되는 모습과 표현되는 방식에는 그 상에 대한 인식이 내재하기에 천불의 의미 해석도 이런 맥락에서 가능하다. 천불도는 개인의 수행을 돕기 위한 시각적 보조 자료로 활용된 의미도 있고, 불교도들에게는 신앙심을 고취하기 위해 천불이 속계에 내려오는 모습을 시각적으로 구현했다.
미황사 괘불 속 부처님이 마치 푸른 하늘에서 내려오는 듯한 인상을 주는 것처럼, 천불도 속 천불은 벽면 위에 배치돼 마치 강림하는 부처님처럼 표현했다. 이러한 시각적 표현은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부처님이 같은 공간에 머물고 있다는 믿음을 주는 역할을 한다. 하늘에서 막 내려온 불보살의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서는 서 있는 자세의 부처가 적합하다.
이는 미황사 괘불에서도 볼 수 있듯이, 의식이 거행되는 동안 그 장소를 성스러운 불국(佛國)으로 치환시키는 현현으로 간주할 수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개인의 수행에 있어 참회의 기도를 들어주고 죄를 멸해주며, 수행을 이끌어주는 역할을 했을 것이다(강희정, 「한국 불교미술 연구의 새로운 모색 -이미지: 도상과 기능의 소통을 위하여」, 『미술사와 시각문화』6, 미술사와 시각문화학회, 2007, p.154).
손상과 보존 처리
미황사 대웅보전 천불도는 종이에 그려진 특성상 오랜 세월 산화가 진행되면서 부스러짐 등의 물리적 손상과 더불어 안료가 가루로 변화하는 등 손상 상태가 심각했다. 벽체의 움직임으로 바탕지에 균열이 일어나고 벽체와 떨어졌으며, 부분적으로 유실되면서 벽체와 바탕지 사이가 들떠 있었다. 산사에 위치한 탓으로 아침, 저녁 그리고 우기 동안 습기의 영향을 많이 받아 종이가 우는 현상과 같이 천불도가 그려진 바탕지의 평면성이 크게 훼손된 상황이었다.
이에 천불도를 보존하고 복원하기 위한 과학적 조사와 분석이 이뤄졌다. 적외선 촬영, X-선 분석 등 최신 과학기술을 사용해 천불도의 재료와 제작 기법, 손상 상태를 정밀하게 분석하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보존처리를 했다. 이러한 보존처리는 천불도의 예술적 가치를 유지하고, 후대에 전승하기 위한 중요한 작업이다.
미황사 대웅보전의 천불도는 부처님의 세계를 현실 세계에 구현하려는 신앙적 노력과 예술적 표현의 결실이다. 천불신앙의 역사적 배경과 예술적 특징을 통해, 우리는 부처님의 자비와 중생을 구제하려는 의지를 시각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또한 보존처리 과정을 통해 이러한 문화유산을 후대에 전승하는 중요성을 확인할 수 있다. 미황사 대웅보전 천불도는 불교신앙과 예술이 조화를 이룬 조선 후기 뛰어난 불화로 많은 사람에게 정신적 위안을 제공하는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이수예
동국대 예술대학 미술학부 불교미술전공 부교수로 재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