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에' 는 S자형으로 남북으로 긴 국토 한가운데의 가장 좁고 가는 지점(동서 거리 65Km) 부근에 있는 도시이다. 이곳은 1802년부터 제2차대전이 끝난 1945년까지 13대에 걸친 원왕 조(元王朝)의 수도였던 유서 깊은 고도(古都)이다. 또한 베트남 분단시대의 '군사경계선'인 17도선과 인접하고 있는 곳이다.
걷는 것은 모르고 뛰는 것만 알고 있는 것 같은 24시간 '러시아워'를 방불케 하는 요란한 호찌민 시, 정부청사 주위의 군인들 복장의 견장(肩章)과 명패의 선명한 붉은 색이나 TV뉴 스에서 보는 요인(要人)들 회의장면에서의 한결같이 굳은 표정과 약속처럼 치는 박수소리로 문득 '아! 그렇지. 여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 수도 하노이지' 하고 새삼 주위를 살펴보게 하는 하노이 시.
그 두 도시에 비하면 후에는 훈 강을 중심으로 신시가지와 구시가지로 나뉘어져 있는 조 용하면서도 가는 곳마다 역사의 유물이 널려 있는 곳이다. 여행자에게 볼거리선물을 담뿍 주는, 즐거운, 오래 머물고 싶은 자유스러운 그런 도시다. 중국에 온 것 같은 착각을 느끼게 하는 고적(古蹟), 고딕한 프랑스식 건물, 카페, 미군이 남기고 간 헌 짚차를 약간 개조하여 달리고 있는 거리 풍경, 시골 길가의 이발소가 물 대야로 삼고 있는 US 마크의 철 헬멧이 인상깊은 곳이다.
이 나라 역사의 무대에 강제 등장하여 늘 주연으로 설친 여러 나라들이 남긴 자국, 그것 이 하나의 문화적 변화나 다양성으로 흡수 수용도 되고, 또 아물 수 없는 상처로도 보존된 후에, 그야말로 묘한 양면성이 풀기 힘든 수수께끼가 지닌 매력과도 같은 흥미와 관심을 불 러일으키는 도시라고나 할까.
역대 황제가 풍수(風水)를 따지고 골라잡은 땅에 세웠을 왕궁과 제묘(帝廟) 등을 돌아보 자니 만감이 교차된다. 사람은 가도 산천(山川)은 남는다던가. 내란과 통일과 분열 속에서 왕들은 가고 없어도 건물은 남아 그 영화의 날들을 헤아리게 하니, 무상(無常)을 벗어날 수 있는 곳 그 어디멘가.
도심에서 남서(南西)로 4km. 훈 강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사원 티엔무 사((天姥寺). 이 절은 1601년 "이 땅에 불탑(佛塔)을 세우면 나라가 흥하리라."는 한 노파의 고시(告示)로 세워졌다 한다. 중간에 재난도 더러 있었으나 그 웅장한 면모가 그 옛날의 영 화를 넌지시 일러준다.
1844년에 높이 21m, 7층으로 된 팔각형의 탑을 완공(처음엔 자인탑(慈仁塔)이라고 명명되 었으나 후에 복연탑(福緣塔)이라고 개칭되었다.), 층층마다 불타의 화신(化身)인 불상이 모셔 져 있고 탑의 좌측의 누각에는 10m 거리까지 그 소리가 울려 퍼지는 거대한 범종(梵鐘)이 있다.
훈 강에서 언덕을 오르는 계단은 그대로 티엔무사로 올라가는 계단으로 이어진다. 하늘이 라는 무한한 여백(余白)을 배경으로 나무들 속에 드높이, 마치 공주에 떠있는 듯한 탑의 전 경은 대안(對岸)에서 볼 때 거룩할 정도로 아름답다. 참으로 후에의 심벌로서 대접받고, 사 랑 받고 있다는 시민의 말을 실감케 한다.
한편 이 절은 1963년 고딘디엠 정권의 불교탄압에 항거하여 분신(焚身) 자살을 한 승려들 의 이야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금도 그 당시 죽음을 결의하고 타고 간 색 바랜 차가 절의 뒤뜰에 전시되어 있으며 그 앞에는 자세한 설명을 기록한 게시판이 있다. 후에에는 국사(國寺)로 지정된 절이 세 곳인데 티엔무사는 제일국사(第一國寺)이다. 제3국 사(第三國寺)라고 할 수 있는 '디에우데사(妙諦寺)'는 1842년에 건립한 것이다. 장비실(藏碑室)의 각자(刻字)나 천장의 용화(龍畵) 등, 선명함이 그대로 남아 있다. 사찰 곳곳의 전각이 전혀 손상을 입지 않은 것을 보면 단순히 연력(年歷) 때문만은 아닌 듯 싶다. 지극한 보호를 받은 것 같은 모양새를 보면서 이 나라 불교신자들의 경건한 신심을 보는 것 같아 찬사를 보낸다.
디에우데사 역시 1960년대 저항운동의 활동 거점으로서 베트남 불교사에 격동과 수난, 희 생의 장(章)으로 길이 남을 절이다. 승려의 붉은 가사가 너울거리는 불꽃과 이어지는 분신 (焚身) 장면이 자꾸 떠오른다. 그토록 처절한 죽음을 택해야 했던 또 입회해야 했던 사람들 을 위해 명복과 성불을 빌고 돌아섰다.
'후에'에서 얼마 멀지 않은 군사경계선 17도선 근변에는 아직도 DMZ(Demilitarized Zone, 비무장지대)가 그대로 있다. 얼마 떨어지지 않는 격전지대에는 총탄자국이 생생하게 남아 있다던가. 뼈대만 남은 건물이나 호찌민 루트를 위시한 장장 2km나 되는 지하 터널, 버리고 간 미군의 탱크 등 살벌한 전쟁의 유물들이 산재하고 있다. 그러나, 주위의 풍경은 초원에서 느긋하게 걷고 있는 소. 노화된 다리 옆에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고 있는 현장의 사람들, 가 고 오는 낡은 트럭 등, 그 많은 폭탄이 투하된 곳곳이 이제는 모두 베트남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무성한 초원으로 변하고 있다.
참호 역할을 한 함정과 덫이 원시시대 짐승을 잡기 위해 만들었을 성싶은 극히 비기계적 인 구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들이 자타가 세계 최강국으로 인정하는 미국을 물리친 여러 가지 전략(戰略)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한 사실을 생각하니, 그 웅덩이를 파고 덫 을 장치하는 손끝에 필사의 혼(魂)이 깃들지 않고 어찌 그런 결과를 기대하랴 싶어 전율이 일었다. 깍지 부푼 손, 어린 손, 늙은 손, 무수한 손의 난무(亂舞)가 환상처럼 떠오르며, 더운 한낮에 나는 으스스 몸이 떨림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도 이제는 풀에 덮여 쉽게 알아보지 못할 정도가 되었으니, 전쟁과 평화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마치 물리적인 탄력을 가진 어떤 법칙처럼 힘을 동반하고.
DMZ도 언젠가는 해제되고 격전의 자리도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과도 같은 비장한 명칭 이 붙는 기념의 땅이 되어 역사의 교훈으로 남을 터이다.
그렇지만 그날의 우리 국군의 피의 색깔은 어디로 가서 찾을까. 이곳 어느 곳엔가에 말라 붙었을, 어느 땅 밑엔가에 스며들었을 젊은 피, 삶을 다한 이국(異國)의 하늘에서 아직도 헤 매고 있을 것만 같은 그들의 영혼, 그 명복을 누가 따로 빌었던가. 설사 만들어진 명목이라 도 국가의 소명이기에 청룡이요, 비둘기요 하고 떠나기만 하고 돌아는 오지 않았던 병사들, 버려진 미군 탱크의 미채색(迷彩色) 무늬에 겹쳐 워싱턴의 위령의 벽에 새겨있는 이름들이 떠오른다.
터널을 파고, 그것이 상징하는 어둠 속에서 그대로 간 이 땅의 사람들, 가해(加害)와 피해 (被害)의 눈금이 정확하게 교대로 적혀있는 굴레가 인간사임을 그리도 많이 보고 겪으면서 도 벗어나지 못하는 어리석음을 속절없이 탓해본다.
나는 이곳에 머물고 있을 것만 같은 '넋', 우리의, 베트남의, 또 미군의 그 넋을 생각하고 분노와 비애, 허무를 느끼며 언제까지나 서 있었다.
금년 베트남 북부에는 비가 많이 내려 복숭아꽃이 예정대로 피지 못해 V.T.V.(베트남 방 송)의 뉴스 시간에서까지 걱정하고 있다. "곧 돌아올 데토(음력설)에 집집마다 복숭아꽃을 장식해야 하는데… 어쩌지?"(그들은 설에 복숭아꽃과 낑깡 화분을 꼭 장식한다고 한다.) 작은 소망, 그러나 소중한 그런 것들을 지키는 것으로 평화와 행복의 의미를 반추하는 듯 한 모습에 중복되어 그 옛날 '잘 살아보세 잘 살아보세'라는 노래까지 부르면서 밤을 낮으로 삼고 신들린 듯 일을 하던 사람들 얼굴이 떠오른다.
그 피땀이 이뤄 놓은 오늘의 풍요 우리도 잊어서는 안 될 일들이 베트남 못지 않게 많은 민족임을 마음에 새겨야 할 것 같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배지숙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