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우당간 강릉 삼척] 강릉의 수호신 범일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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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우당간 강릉 삼척] 강릉의 수호신 범일국사
  • 김흥삼
  • 승인 2023.06.27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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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일, 강릉 굴산사에서 선풍禪風을 휘날리다
삼척 영은사 범일국사진영, 월정사성보박물관 소장

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

2001년 새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강릉에 가려면 대관령을 넘어야 했다. 대관령 정상쯤에 ‘산신당(山神堂)’과 ‘성황사(城隍祠)’라는 현판이 붙은 두 채의 건물이 자리한다. 산신당에는 김유신 장군이 모셔져 있다. 성황사에 모셔진 신은 백마를 타고 활과 화살을 메고 있는 모습인데, 그 앞에 ‘대관령국사성황지신주(大關嶺國師城隍之神主)’라는 나무로 만든 위패가 보인다. ‘국사성황지신’은 신라 말에 실존했던 고승이며, 한국불교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문(闍崛山門)을 개창한 범일(梵日, 810~889) 스님을 가리킨다. 2005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강릉단오제’의 주신이 바로 범일국사다. 범일 스님은 살아생전에 왕으로부터 국사(國師)에 책봉됐으나 받아들인 적이 결코 없다. 하지만 강릉 일대에서는 오래전부터 ‘범일국사’로 불려 왔다. 강릉단오제는 대관령에서 ‘산신제’와 ‘국사성황제’를 올린 후, 국사성황신의 위패와 신목(神木)을 모시는 것으로 시작한다. 스님이 왜 대관령성황신으로 모셔졌는지 의견이 분분하지만, 범일 스님이 강릉을 대표할 만한 종교·문화의 상징으로 일찍부터 믿어져 왔기에 아마도 대관령성황신으로 모셔졌을 것이다. 범일은 품일(品日)이라고도 불렸고, ‘해가 든 물을 마시고 태어났다’고 해서 범일(泛日)이라고도 했다 한다. 구림(鳩林, 경주를 일컫는 말)의 관족(冠族) 김(金)씨로, 할아버지는 명주도독(溟州都督)을 지낸 김술원(金述元)이다. 어머니는 호족 문씨(文氏) 가문 출신으로 세상에서 ‘부녀의 모범’이라 불렸다.

범일이 경주 김씨인 점으로 보아 왕족임을 알 수 있고, 조부가 명주도독을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강릉에 계속 거주하게 된 것 같다. 이렇게 지방관으로 파견됐다가 낙향한 귀족의 가계는 이미 몰락해, 경주에서는 더 이상 거주할 수 없는 처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부친은 어떤 벼슬도 못 해 그에 대한 기록이 없는 듯하다. 이것은 범일의 가계가 진골에서 6두품으로 낮아져, 부친 대에는 중앙으로 진출하지 못하고 지방에 머물러 호족 세력으로 토착화됐음을 뜻한다. 

모친이 태기가 있을 무렵 해를 받아들이는 영험한 태몽을 꿨고, 범일은 태 속에 있기를 열석 달 만인 810년(헌덕왕 2) 음력 1월 10일에 출생했다. 범일은 태어났을 때 나계(螺髻) 모양의 머리와 구슬 모양의 정수리를 한 부처의 모습을 갖췄다. 그의 출생과 신체적 특이성은 불교와 본래부터의 인연, 또한 스님이 될 수밖에 없는 연기 법칙을 보여준다. 범일은 결국 15세에 출가를 결심하고, 부모에게 허락을 구하자 양친은 전생에 좋은 인연을 심은 결과라며 승낙했다. 머리를 깎고 입산해 도를 닦다가, 20세 때 경주로 가 구족계를 받았다. 범일은 경주에 머물 당시 상당히 촉망받는 젊은 스님이었다.

 

중국 유학과 귀국

범일은 태화연간(太和年間, 827~835)에 중국에서 법을 구하고자 하는 뜻을 혼자 세웠다. 왕자 김의종을 만나 품은 뜻을 털어놓으니, 훌륭한 포부에 감탄하고는 그의 동행을 허락했다. 836년, 배를 타고 두운(杜雲)과 함께 당나라에 도착했다. 곧 항주(杭州)에 이르고 명주(明州) 개국사(開國寺)에서 일시 머물다 각지로 순례의 길에 올라 선지식을 두루 찾았다. 마침내 항주 염관진(鹽官鎭) 해창원에서 마조(馬祖)의 제자인 염관 제안(濟安)을 뵙고 그의 문하에 들어갔다.

“어떻게 해야 성불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범일이 물으니, “도는 닦을 필요가 없으니, 그저 더럽히지 말라. ‘부처다. 보살이다’ 하는 견해를 짓지 말라. 평상시의 마음이 곧 도이니라” 하고 제안이 답했다.

범일은 6년(836~842) 동안 제안의 문하에서 수련하고 인가를 받았다. 제안이 열반에 든 후 약산(藥山)에 이르러 선문답을 나눴다. 그 뒤 운수행각(雲水行脚)을 하다가 844년 장안에 들렀다. 이때 당 무종(武宗)이 불교를 억압하는 법난(法難)을 일으키고는 외국 스님들을 귀국도록 조치했다. 범일은 이를 어기고, 법난을 피해 동분서주하며 힘들게 애쓰다가 황하에서 지역민의 도움을 받았다. 그 뒤 상산(商山)에 은거하여 반년 동안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서도 선정에 힘썼다. 후에 소주(韶州) 조계(曹溪)에 가서 혜능(慧能)의 조사탑(祖師塔)을 예배했다. 범일은 고향으로 돌아가 불법을 펼 생각을 하고는, 847년 8월에 신라로 돌아와 불법을 널리 선양했다. 851년 정월, 백달산(白達山)에서 연좌(宴坐)하고 있을 때 명주도독인 김공(金公)이 굴산사(崛山寺)에 머물러주기를 청했다. 이에 굴산사로 간 후 산문을 열고 입적할 때까지 40여 년 동안 이곳에서 불도를 행하고 좌선하면서 불법을 전했다.

“무엇이 조사의 뜻입니까?”라고 어떤 사람이 물으니,
“육대(六代)에도 잃을 수 없었습니다”라고 범일이 말했다. 
“어떤 것이 승려가 힘써야 할 일입니까?”라고 물으니, 
“부처의 계급(堦級)을 밟지 말라. 남을 따라 깨달으려 하지 말라”고 답했다.

강릉 굴산사지 석불좌상. 얼굴에서부터 마모가 심하고, 하반신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국사(國師) 책봉을 거절하다

범일은 중국에서 유학하는 동안 명주 개국사에서 한쪽 귀가 잘린 사미승을 만난 적이 있다. 사미승이 “저도 역시 한 고향 사람입니다. 집은 명주 관할 익령현(翼嶺縣, 현 양양) 덕기방(德耆坊)에 있사오니, 조사께서 훗날 본국에 돌아가시거든 꼭 저의 집을 지어주십시오”라고 범일에게 정중히 부탁했다. 그러나 신라로 귀국한 범일은 선종을 전파하느라 그 약속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대중(大中) 12년(858) 석가 열반일인 음력 2월 15일에 사미승이 꿈에 나타나 약속을 지켜달라고 했다. 놀라 일어나 사미승의 집을 찾다 한 여인과 그 아들을 만났다. 그 아이가 말하기를 “나는 개울가에서 황금빛 나는 동자와 함께 논다”고 하여 가보니, 물 가운데 한쪽 귀가 잘린 정취보살(正趣菩薩) 석상이 있었다. 범일은 낙산사(洛山寺)에 3칸의 정취전을 만들어 모셨다. 

굴산사에 머문 이후 함통(咸通) 12년(871)에 경문왕(景文王)이, 광명(廣明) 원년(880)에 헌강왕(憲康王)이, 광계(光啓) 3년(887)에 정강왕(定康王)이 그의 선풍을 흠모해 국사로 봉하기 위해 경주로 모시려 했다. 그러나 끝내 왕실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 이유는 왕의 통치력이 미치기 어려운 북쪽 변방에 거주하고 있었고, 명주 지역의 반신라적 성향과 선종의 개인주의적 성향 때문이었다. 한편 886년에 동리산문의 경보(慶甫)선사가 범일을 찾아와 가르침을 받았다.

889년 음력 4월 말, 범일은 문도를 불러 “내가 장차 타계(他界)로 돌아가니 이제 곧 영원한 이별이다. 너희들은 세정(世情)에 이끌려 슬퍼하지 말고, 오직 스스로 마음을 닦아 종지를 실추시키지 말라”고 당부했다. 이는 부처가 마지막으로 설법한 “너희들은 자신을 등불로 삼고 자신에게 의지하라. 또한 법을 등불로 삼고 법에 의지하라”는 것과 맥을 같이한다.

음력 5월 1일에 이르러 부처가 열반할 때와 같이 오른쪽 옆구리를 밑으로 하고 발을 포개어 굴산사 상방(上房)에서 입적했다. 부처의 모습으로 태어나, 성불하고자 교를 배우고 선을 수행하면서 불법을 전하고, 부처의 형상으로 돌아간 것이다. 나이는 80세였고, 승랍은 60세였다. 탑호는 연휘(延徽)고,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다.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창건 당시 건립된 것으로 보이며, 우리나라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 당간지주와 승탑이 꽤 멀리 떨어져 있는데, 굴산사의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사찰 터는 논밭으로 변해 있다.

 

범일의 마조선(馬祖禪)

국가에서 내려준 호인 통효(通曉)에서 보듯, 범일은 부처의 마음을 깨닫고 인도의 여러 경전을 통달했다고 당대에 평가받고 있었다. 먼저 범일의 선사상은 위에서 언급한 선문답과 임종게를 통해 알 수 있다. 범일은 “도란 수행하거나 조작과 분별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인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는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를 주장했다. 또 “달마가 서쪽에서 온 뜻은 무엇인가(祖師西來意·조사서래의)”라는 물음에 “불법의 큰 뜻은 지식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으로, 자신에게 불성이 갖춰져 있음을 알고 자기의 본래심을 자각하라”고 답해, 자신의 주체적 인식을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깨달음은 조사나 부처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직접 몸으로 체험할 때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평상심과 서래의와 관련해, 범일은 “자심(自心)이 부처이므로 다른 사람의 가르침보다 자심에 의해 깨달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면서 선의 목적을 여기에 뒀다. 아울러 그는 “일심(一心)으로부터 각양각색의 모든 존재가 유래한다”며, “달마가 전한 상승(上乘)의 일심지법(一心之法)을 깨달아 자신을 깨쳐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일상의 주체성에 대한 가르침은 마조 도일이 주장한 것인데, 제안 등에게 전수된 뒤 범일이 충실히 받아들여 실천했다. 그러므로 범일의 선법은 철두철미한 마조선이라는 평을 받게 된 것이다. 범일은 마조 계통의 선사상만이 아니라 석두의 법손인 약산 계통의 선사상도 잇고 있었다. 마조와 석두의 스승인 혜능의 탑에 예배를 드린 것으로 보아 결국 범일은 다양한 선사상을 두루 익혔던 것이다. 일심을 주장한 것은 신라 하대 지방 세력이 등장하는 시대적 분위기와도 연관됐다. 일심을 지켜 그것을 잃지 않도록 하는 종지는 개인주의적 성향을 강하게 나타내는데, 이러한 선종의 경향은 지방에서 독자 세력을 형성하려는 지방관과 지방호족의 성격과 궤를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조사선을 강조하면서 평상심을 내세우고, 일심을 주장하면서 그것을 고수하려는 범일의 종지는 강릉 지역 등에서 독자적으로 실력을 기르는 세력 기반과 표리를 이루며 퍼져나갔을 것이다.

강릉 굴산사지 승탑(보물). 탑비가 발견되지 않았지만, 범일국사의 승탑으로 추정한다.
강릉 굴산사지 승탑 받침돌
강릉 굴산사지 승탑 비천상

 

자장, 의상, 진표와 범일

한편, 범일이 선수행을 할 수 있도록 근거를 제시해 준 것은 경전이었다. 『능가경』에 “깨달음은 문자로 헤아릴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 오직 자신의 수행을 통해서만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자내증(自內證)이라는 말이 있다. 여기에 범일은 열정을 보여 안선(安禪)을 취하는 등 『능가경』에 능통했다. 그의 제자인 개청(開淸) 또한 이것으로 깨달음을 얻었다. 또 범일이 연좌(宴坐)를 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 선의 사상적 기반을 이루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유마경』을 소의경전으로 삼았을 것이다. 

범일은 『화엄경』에서 관음보살 다음에 등장하는 정취보살을 낙산사에 봉안했다. 이것은 관음신앙을 중요하게 여기는 의상(義湘)계와 교섭을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범일은 출가하면서부터 자장(慈藏)계와 친연관계에 있었던 오대산과 인연을 맺었고, 그의 제자인 행적(行寂)과 신의(信義)도 오대산과 관련 맺으면서 수행했다. 범일은 선사상을 배운 뒤에도 화엄사상과 관련된 수도 생활을 한 것으로 보아 선종을 화엄종과 공존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한편 범일은 진표(眞表)의 미륵신앙의 영향을 받아 간자(簡子)로 점쳐 정취보살상을 낙산사에 모셨다. 범일과 인연이 있는 삼화사에서도 미륵신앙을 믿으며 말법시대임을 설파했다. 또 범일은 강서지법(江西之法)과 관련된 마조의 법손(法孫)에게서 수학해 풍수지리설을 전수받았을 것이다. 수해 억제 등과 관련된 사탑비보설(寺塔裨補說)에 근거해 굴산사와 신복사(神福寺)도 창건한 것으로 보인다. 범일은 산신(山神)신앙이 강렬해 그에 관한 영적인 체험을 하기도 했다. 이처럼 범일의 수행을 보면, 선교융합적 현상이 두드러지므로 그가 주장했다고 하는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은 범일의 작품일지 의심스러워 보인다. “석가여래가 진귀조사에게 심인(心印)을 받았다”는 진귀조사설은 교(敎)에 대한 선(禪)의 절대적 우위와 선교대립을 주장하기 때문이다. 또한 진귀조사설은 범일이 살았던 신라 말 선사들의 비문과 『조당집』에 보이는 선교융합적인 태도와도 상반되는 것이다. 

범일의 문하에는 개청, 행적, 신의 등 빼어난 십성제자(十聖弟子)가 있었다. 이들의 법맥은 고려 전기를 거쳐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지눌(知訥)에게 계승됐다. 사굴산문에서는 지눌을 이은 16국사와 나옹, 무학 등 많은 고승이 나타났다. 그 후에도 한국 선종의 주요한 맥을 이뤄 한국불교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범일은 사후에도 강릉 지역민들의 마음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다시 살아나 대관령국사성황신으로 모셔졌다. 지금의 강릉단오제와 달리 ‘읍치성황제’는 범일의 기일인 음력 5월 1일부터 대관령국사성황신을 맞이해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범일의 기제사(忌祭祀)를 병행한 읍치성황제는 범일이 생존해 있을 때부터 강릉 지역에 큰 영향을 끼쳤고, 사후 토착 세력과 민중의 지지를 받았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 결과 오늘도 범일은 강릉 지역의 수호신으로 나타나 지역민을 결속시키는 인물로 숭앙받는다. 

 

사진. 유동영

 

김흥삼
한국불교역사 배움터 소장. 출신지가 영동지방이라 어린 시절부터 이 지역의 종교에 관심을 가졌다. 영동 지역과 제의와 관련된 석사논문을 썼고, 굴산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후 신라와 고려의 불교 금석문에 대해 천착하다가 요즘은 조선 후기 불교문헌에 자꾸 눈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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