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들이 모여 치열하게 참선 수행하는 선방의 하루는 철저한 적막과 침묵 속에서 흘러간다. 고요함 속에는 도시의 소음 속에서 느낄 수 없는 어떤 것들이 분명히 있다. 그 고요함 속에 처하기 전에는 무엇으로도 그 고요함이 주는 어떠한 상태를 짐작조차 할 수 없다. 그 고요함을 벗어나 있는 지금의 나 또한 그것을 잊고 사는지도 모른다.
처음 이 글을 쓰면서 도대체 선방에서의 일과에 대해 무엇을 적을 것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일상이 되어버린 어떤 것들은 이미 어떤 것이 아니게 되는 것 같다.
도반 중에 차에 관하여 해박한 스님이 있었다. 그 도반은 출가 전에도 전통찻집을 운영하며 차에 관해 공부도 하고 직접 차를 만들기도 했던 차 전문가였다. 차에 대해서 문외한이었던 나에게 그 도반이 들려주는 차 이야기는 지금까지 접해보지 못한 신세계였다.
그 도반은 차를 마신다는 것은 차와 대화를 나누는 것이라고 했다. 어떤 마음으로 차를 마시느냐에 따라 차가 사람에게 다른 맛을 선사한다는 것이다. 차를 우려내는 물에 따라서도 그 맛이 천차만별이며 산물로 내려 마실 때 가장 그 본연의 맛을 느낄 수 있다고도 했다. 그래서인지 과연 도심에서 먹는 차는 산중에서 산물로 내려 먹는 차에 비할 바가 아니다.
출가하고 한참 어른 스님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묻던 때 평소 뵙고 싶었던 어느 노스님을 찾아뵈었던 적이 있었다.
노스님께서 “무슨 일로 왔느냐” 물으셔서 “여쭐 것이 있어서 왔습니다” 말씀드리니 들어오라 하셨다. 노스님은 조용히 좌정하시듯 앉으셔서 말없이 차를 내리셨다. 어색한 마음에 무언가 여쭈었던 것 같은데 노스님께서는 아무런 응대도 하지 않으시고 그저 묵묵히 차를 내리셨다. 그렇게 차가 우러나기를 한참을 바라보고 계셨다.
어색한 시간이 흐른 뒤, 차를 따르시며 권하셨다. 차를 따랐으니 이제 뭐라고 한마디 말씀하시려나 기다렸지만 여전히 아무 말씀이 없으셨다. 내가 또 무엇인가를 여쭈었던 것 같은데 노스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찻잔을 바라보셨다. “차 맛이 어떤가?” 하신 것 같은데 그 당시로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이것이 출가하고 처음으로 차 맛을 보게 된 일이었고 이때의 차의 맛은 ‘어색함’과 ‘침묵’이었다.
그러나 선방에서 안거를 나게 되면서 이러한 어색함과 침묵이 대중선방에서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대중선방에서는 공양 후나 운력 후, 휴식시간에 모여서 차담 시간을 갖곤 한다. 선방에서의 차담 시간도 처음의 경험과 크게 다르지 않다.
차를 마시면서 대부분은 조용히 차를 마신다. 차담 도중 몇 마디 대화가 오고 가지만 대화가 길게 이어지지는 못한다. 대화의 주제도 사람이나 세속에 잡다한 일이 아니다. 누군가 의미 없이 한마디 내뱉어도 그것에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애끓는 말이나 재치 있는 화려한 문장은 환영받지 못한다. 선방 스님들은 사실 차에 그렇게 관심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여느 선방에 구비되어 있는 상비약처럼, 정진 중에 졸음을 쫓으려고 차와 커피를 마시는 것 같기도 하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몸이 정화되면, 차나 커피를 그저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는 작용에 대해 더 민감하게 느끼고 반응하게 된다. 차가 주는 고요함에 동화되는 느낌 같은 것일까?
차를 몰라도 자꾸 마시다 보면 차마다 고요함의 정도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깊은 차 맛을 알기 위해서는 침묵과 기다림이면 족하다.
두두물물(頭頭物物) 부처 아닌 것이 없으며 삼라만상 모든 것이 곧 부처님 법문이라고 하지 않나. 그 법문은 어떠한 말이나 글로도 한정되거나 제한되어서는 안 된다. 차가 가진 오묘한 깊고 깊은 맛을 이름이나 지식과 상식들로 제한하거나 잡다한 이야기들로 오염시킨다는 것은 그만큼 차를 마시는 사람에게도 이득이 없다.
나의 수행은 어디를 향하고 있는 것일까?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묵묵히 차를 마시며 그 차 맛이 온 곳, 찻잎을 거슬러 차나무가 펼쳐진 광활한 자연으로 돌아간다. 소음 속에서 잊고 있던 자연의 고요함 속에 머물러 본다.
꽃을 키우려면 먼저 그것에 대해서 여러 가지를 알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 방법대로 씨앗을 심고 적당히 물을 주고 거름도 주어야 한다. 꽃이 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지 꽃이 피는 방법을 안다고 해서 꽃이 피는 것은 아니다.
서울 가는 길을 알아도 떠나지 않으면 닿을 수 없듯이 천하제일의 명차를 마신다고 해도 수행으로 이어지지 못한다면 그것이 출가 수행자에게 무슨 효용이 있을까?
원효 스님의 『발심수행장(發心修行章)』에 이런 구절이 나온다.
雖有才智 居邑家者(수유재지나 거읍가자는)
비록 재주가 뛰어나고 지혜가 있다고 해도 세속에 머무르면
諸佛 是人 生悲憂心(제불이 시인에 생비우심하시고)
모든 부처님께서 이 사람에 대해 근심과 슬픈 마음을 내시고
說無道行 住山室者(설무도행이나 주산실자는)
설사 도를 닦지 않더라도 산속에 거처하는 자는
衆聖 是人 生歡喜心(중성이 시인에 생환희심하나니라)
모든 성현께서 이 사람에 대해 기쁜 마음을 내신다.
고요한 산중 처소, 새로울 것 없이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마음 낼 일 없이 하루하루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꽃이 피기에 훌륭한 조건이지 않을까.
스님이 되어서 기본교육기관에서 교육받을 때의 일이다. 강사로 유명하신 어느 노스님께서 강의 중에 부처님께서 늦게 도착한 가섭존자에게 자리 곁을 내어주신 이야기를 하시던 중 갑자기 말씀이 없으셨다.
한참이나 말씀이 없으셔서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 들어 노스님을 바라봤을 때 그 노스님께서는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세수 여든을 훌쩍 넘기신 왜소한 체구의 노스님의 두 눈에서는 분명 뜨거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수습하신 뒤에야 미안한 표정을 지으시며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보다라고 하셨다.
지금 나의 수행 속에는 그때 그 노스님의 눈물이 녹아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얼마나 깊고 진솔한 마음으로 스님으로서, 또 수행자로서 초발심을 간직한 채 살아가고 있는가? 늘 반성하고 또 반성해 본다.
‘수행에 마음을 낸 사람은 매 순간순간 특별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라고 하신 노스님의 말씀을 떠올려 본다.
혜민 스님
봉은사 상담지도법사. 백담사 기본선원을 나왔으며 상담을 통한 수행 포교를 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