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하나의 여정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누구나 길을 나선 나그네이다. 앞서 간 사람들이 남 긴 길을 걷기도 하고, 길 없는 길을 헤쳐나가면서 보고 듣고 느끼는 일이다. 만남이 있고 이 별이 있다. 무명에서 시작하여 깨달음의 길까지 끈끈한 연으로 이어진 삶의 길을 체험하는 것이다. 그 길은 준비된 것도 아니고, 포장된 상품처럼 배달되는 길이 아니다. 마치 시장의 새처럼 곱게 길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스스로 선택하고, 자유를 누리는 데 참다운 가 치가 있겠다. 나 이외의 이웃을 만나면서, 세계에 눈을 뜨고 우주로 향한 상상의 나래를 펼 쳐 볼 때, 우리는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가.
귀동냥한 정보로 작은 내 나라를 벗어나서 머나먼 이국의 땅에 닿았을 때, 벅찬 감동에 앞 서 두려움과 착잡한 심정이 앞섰다. 8년 전 처음 발을 디딘 땅이 태국이었다. 일년 내내 찌 는 듯한 더위가 계속되는 열대의 나라, 물의 나라, 자유의 나라 그리고 불교의 왕국이라는 단편적인 상식이 전부였다.
푸른 하늘, 투명한 산호빛 바다, 아름다운 천혜의 자연이라는 포장된 광고문을 먼저 떠올리 는 나라이다. 이왕 내친걸음이라면, 구경거리를 찾아다니기 보다는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살 아있는 역사의 숨결을 느끼고 신앙심을 일깨우는 체험을 통하여 생활의 활력과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여행이기를 내심 바라고 있었다.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이라는 상식적(?) 표현을 좋 아했던 까닭이다. 단시일에 태국을 이해하기란 힘들다는 생각이 우리와 공통점이 있는 부분 부터 이해 하기로 마음 먹었다.
태국은 다른 동남아 국가들과는 달리 역사상 남의 나라에 주권을 빼앗긴 적이 없기 때문에, 그만큼 국민들은 강한 자긍심을 지니고 있다는 나라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만하기보다는 오 히려 겸손한 태도를 보인다. 그것은 태국의 역사가 태동할 때부터 태국인들에게 정신적으로 절대적 영향을 미쳐온 불교의 가르침에 기인하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태국은 불교의 나라이다. 우리 나라도 불교로 통치이념을 정립한 역사가 있다. 그 러나 태국의 불교는 테라바다 즉 상좌부 불교라 칭한다. 이는 대승불교에 견주어 소승불교 라하여 자신의 해탈만을 위해 수행하는 이기적 불교라는 편견 외에는 소승불교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은 없었다. 지극히 피상적인 불교를 접해온 나로서는 이 점에 많은 의구심과 호기심 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아득한 지평선 너머로 해가 짙은 오렌지 빛으로 불들 때, 항공기가 빠져드는 듯이 내려앉았다.
합장한 채 작별인사를 하는 태국인 스튜어디스의 모습에서, 태국 에 대한 첫인상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만나는 사람마다 반드시 두 손을 모아 공손히 인사 하는 태국인들, 그것은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가르침을 몸소 행하며 받드는 공경의 예가 아 니던가. 기껏해야 절에 가면 아는 얼굴들만 골라 합장하는 자세에 비하면 그들은 삶을 즐기 는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인다. 낯선 사람을 만나도 빙긋이 웃어 주는 그들의 미소는 보살 의 마음을 닦고 있다는 느낌을 줄 정도이다. 그래서 하나 더 알게 된 사실은 태국을 '미소 의 나라'라고도 한다는 별칭이다.
태국의 불교는 일찍이 남방의 스리랑카, 미얀마, 크메르(캄보디아) 등지로부터 그들 문화와 함께 들어왔다고 한다. 외형적으로 태국의 사원 양식에서 그 영향을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왕실 전용사원이라는 에메랄드 사원 내에 있는 스리랑카 불탑양식과 크메르 양식의 건축과 조형기법을 쉽게 느낄 수 있다.
태국의 역대 왕조들은 불교를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 백성들을 다스렸다. 시기적으로 1238 년 통일국가를 이룩한 수코타이 왕조 때부터 불교를 수용 및 장려하였다고 본다. 태국이 입 헌군주제의 길로 들어선 1932년 이후 지금까지도 왕실에 대한 국민들의 절대적인 경애는 바 로 이런 불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성들로부터 신임과 공경을 받게 되니 이것이 태국을 지탱하는 정신적 통일이며 곧 국가의 저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태국은 가는 곳마다 사원이 있고, 불교가 생활화되어 있다. 방콕 시내에 300여개 이상의 사 원이 있고, 국민의 94%가 불교를 믿고 있어 모든 면에서 불교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진다.
심지어 집집마다 자그만 불당을 모셔둘 정도이다. 태국의 불교는 인도에서 부처님 재세시 수행하는 전통적인 모습이 그대로 살아 있다고 한다.
이른 아침이면 승려들이 오렌지 빛 가사를 두르고 맨발로 탁발을 나서는데, 거리 곳곳마다 시주를 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공양물을 들고 나온다. 맨땅 위에 무릎을 꿇고 스님에게 합장 하여 기도한다. 그리고 나서 마련한 공양물을 정성껏 바루에 담아 드린다. 묵묵히 바루를 들 고 눈 짓 한 번 주지 않는 듯 유유히 길을 돌아가는 스님의 모습들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
그 당당함,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거룩한 모습 앞에 넋을 잃고 말았다. 아, 신앙의 힘 이란 바로 이런 것인가.
태국의 승려들은 매우 엄격한 계율을 지키며 수행해 나간다고 한다. 파티모카라는 227조의 계율을 지켜야 하는 승려생활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닐 것이다. 식사도 하루에 두끼로 정오를 넘겨서는 음료수 이외에는 결코 공양물을 들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계율을 지키지 못할 경우에는 승복을 벗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으며, 아무도 비난하지 않는다고 한다. 오히려 승복을 벗고 속인으로서 열심히 일하며 사는 것이 더 떳떳하다고 생각한다는 이야기이다. 이런 체계가 승가를 정화하는 작용을 한다는 것이다.
방콕 시가지를 누비고 다니는 교통편중에는 '뚝뚝이'라 부르는 오토바이엔진을 달고 바퀴가 세 개인 자그만 차량이 많다. 정규 택시보다 값도 싸고 관광객들에게 인기가 있어 방콕 관 광에서 빼놓을 수 없는 교통수단이다. 어느 날 사원을 참배하고 나오면서 뚝뚝이를 이용했 는데, 영어를 짤막하게나마 하는 젊은 기사였다. 이런 저런 이야기 도중 그에게 당신은 왜 출가하여 승려가 되지 않았느냐고 하자, 그는 승려가 될 생각은 없었으나, 3개월 간 사미승 으로 출가의식을 거쳐 본 적이 있다고 하였다.
대부분 남자들은 성년이 되기 전에 한번씩 절에 가서 승려와 같은 생활을 경험하는 것이 태 국의 불교 전통이라는 것이다. 남자로서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군대에 가는 것은 선택적으 로 결정되지만, 출가의식을 경험하는 것은 모든 태국의 남성들에게 있어서 당연한 절차라는 사실에 또 한번 충격을 받았다. 현재의 국왕도 역시 절에서 승려의 생활을 경험하였다고 하 니,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태국인들에게 있어서 불교는 신앙으로서 지배되고 있는 것이 아니 라 삶과 생활 그 자체라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우리가 사는 세계를 생사가 거듭되는 윤회의 세계로 본다. 이 윤회의 세계에서 해탈하여 열반의 경지에 이르도록 하는 가르침이 곧 불교라 한다. 우리가 저한 불교는 대승 적 차원의 보살도를 행함으로써 불국토를 실현해 나가는 것이라 배웠다. 소승불교에서의 가 르침은 어떤 것일까? 소승불교를 지극히 소극적이며 개인주의적이라 들어왔다. 열반의 경지 에 도달하기 위하여 계율을 엄수하고 세속을 탈피하여 대중을 위한 포교보다는 오로지 자신 의 해탈을 목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이다.
소승 즉 '한 사람만이 탈 수 있는 수레' 가 다소 멸시적인 의미로 들렸는데, 지금 보고 느낀 것은 여기 모든 사람들이 태국이라는 거대한 수레를 타고 함께 어울려 간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웬일일까? 교과서를 통한 주입식 교육을 받은 탓이다. 나의 공간은 그만큼 작고 편협 했다. 소승에 대한 편견적 견해에 대해 스스로 무지함을 탓할 뿐이다. 소승이 대중을 싣고 간다. 마치 거대한 코끼리 처럼 그 걸음이 당당하고 위엄이 있다. "포교하는 사람들은 먼저 욕망과 증오와 환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상좌부 불교에서는 우선 자기 수행에 힘을 쓰지요. 정확히 진단할 수 없는 의사가 어떻게 환자를 올바르게 치료 할 수 있으며 소경이 어찌 소경을 바르게 인도할 수 있겠습니까? 대중들은 좋은 말보다는 승려의 청정한 생활을 통해 부처님의 법에 더 다가갈 수 있습니다. 수행은 결국 각자 개개인이 하는 것입니다. 승려들은 행동으로 모범을 보임으로써 대중들로 하여금 청정한 수행을 하도록 합니다. 이것이 설법보다 더 효과적인 포교입니다." 소승에 대한 의구심을 이렇게 들려준 태국 스님의 말에 내 마음은 더욱더 남방불교의 길목 으로 이끌려 가고 있었다.
*이상원, 이상일 님은 형제로 현재 (주) 실크로드여행사에서 함께 일하며 10년 이상 동남 아 불교성지순례단을 이끌고 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김생호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