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성숙하게 하는 선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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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성숙하게 하는 선지식
  • 관리자
  • 승인 2007.09.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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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그늘, 향곡(香谷) 스님

나는 한 때, 천성산(千聖山) 내원사(內院寺) 산내암자(山內庵子)인 성불암(成佛庵)에 있었다.
성불암에 살기 직전에는 성불암에서 5백미터 가량 올라간 곳에 있는 성수(性守) 스님의 토굴에서 살았다. 내가 성불암에 살게 된 것은 성불암의 법연(法演) 스님이 쌀궤에 2가마 가량의 쌀을 남겨 두고서 성불암을 떠났기 때문에 그 쌀이 있는 동안은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고 지낼 수가 있으므로 옮겨 앉은 것이었다.
그 무렵, 내원사는 비구니인 수옥(守玉) 스님이 주지를 맡아 불탄 내원사를 다시 짓는 불사가 한창이었다. 수옥 스님은 내원사를 중건해서 비구니도량으로 키울 생각이었다. 때문에 전국 각처에서 비구니들이 모여들었고 새로 출가한 젊은 사미니와 행자들도 많았다. 그러한 내원사의 산중에 비구가 살면 그 젊은 여인들과 불미스러운 일이 일어날까 걱정을 한 수옥 스님은 산중에서 비구들이 떠나기를 원하였다. 그때, 내원사 산중에는 나와 법연 스님 이외에 견성암에 한 비구가 살았고 노전(爐殿)에는 대처승인 노장스님이 계셨다. 노전의 늙은 스님은 그런 점에서 걱정을 할 대상이 아님은 물론이었다. 견성암 스님은 수옥 스님이 뜻을 내비치기 바쁘게 암자를 비우고 떠나갔다.
그런데 성불암의 법연 스님은 떠날 기미가 없으니 답답할 밖에. 답답한 수옥 스님은 본사인 통도사에 여러 차례 협조를 청했으나 그럴수록 법연 스님의 노기(怒氣)를 돋운 셈이 되었다. 한편 내 경우는 내가 살고 있는 토굴이 내원사에 속한 암자가 아니므로 나에게 산중에서 나가라 말아라 할 개재가 아니었다. 그러한 내가 법연 스님이 어렵사리 성불암을 비우고 떠나자 곧 차고 앉았으니 수옥 스님에게는 눈에 가시였다. 여러 가지로 우회해서 떠나기를 종용하는 수옥 스님에게 쌀이 떨어지면 가지 말라 해도 갈 것이니 걱정을 놓으시라고 했다.
수옥 스님 생각으로는 2가마의 쌀이 몇 달을 가랴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서 2가마의 쌀은 1년 식량으로 넉넉했다. 하루 한 끼만을 사시(巳時 오전 11시)에 먹으니 쌀이 줄지를 않는다. 사시에 한 끼만을 먹는 것을 '일종'이라고 한다.
운허 스님의 불교사전에 보면 '일종'은 하루 동안에 한 끼만을 먹는다는 뜻으로 쓰인 말 '일중(日中)'이 변한 것이라 했다. 그리고 일종을 하면 여러 겁 동안 지은 죄업을 없애고 일종을 함으로써 양식을 아낀 공으로 내생에는 수천 석의 식량을 비축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생각으로 일종을 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게을러서 그렇게 한 것뿐이었다.
밥은 중탕(重湯)을 해서 짓는다. 큰 솥에 물을 붓고 남비에 쌀과 물을 알맞게 넣어 큰솥 안에 띄우고 불을 때면 밥이 타거나 설익는 법이 없다. 찹쌀을 약간 섞으면 밥맛이 금상첨화다. 그렇게 지은 밥 한 냄비면 사나흘을 먹는다. 때문에 부처님께 올리는 사시마지는 사나흘에 한 번 새로 밥을 지었을 때만이다. 그래서 성불암 부처님은 굶기가 일쑤였다. 부처님께 사시에 마지를 올리고 예불을 하고 축원을 하는 것은 비구가 지켜야 할 의식이고 일과(日課)인데도 그것을 소홀히 한 것은, 지금 생각하면 참선한답시고 건방이 든 탓이고 신심이 바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겨울 안거(安居)를 마치고 성불암으로 옮겨 온 뒤, 어느덧 초여름이었다. 어느 날 산 아래서 "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 소리는 찾아오는 손님이 주인이 있으면 대답하라는 신호이다. 대답이 없으면 주인이 없거나 손님을 맞지 않겠다는 뜻이므로 가파른 산길을 굳이 올라갈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혼자서 산에 살다보면 가끔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더욱이 서로 신호를 주고 받는 사이라면 낯익은 반가운 손님임에 틀림이 없다. 툇마루에 나가 "우-"하고 회답을 했다. 다시 되돌아 온 소리의 주인은 향곡 스님이었다. 뛰어 내려가니, 몸이 뚱뚱해서 우리가 호호법당(好好法堂)이라고 놀리는 몸으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라오고 계셨다.
스님은 내가 성수 스님의 토굴에 있을 적에도 가끔 찾아오셨는데 오실 때마다 빈손으로 오시는 일이 없었다. 공부하는 수좌에게 공양하는 것은 큰 복덕이 된다고 하시면서 반드시 무엇이든 먹을 것을 가지고 오신다.
그러나 나는 스님이 복덕을 바라서가 아니라 공부하는 수좌를 격려하는 친절한 마음 때문이라고 믿는다. 그날도 한 팔에 웃옷을 벗어서 걸고 한 손에는 조그만 보퉁이를 드셨다. 당신의 뚱뚱한 몸을 가지고 산길 오르기도 힘겨우실 터인데 비록 작은 보퉁이지만, 먼길을 들고 오신 스님을 대하는 나는 감사하는 마음 그지 없었다. 만나기가 바쁘게 "공부는 여일(如一)한가" 묻는 스님에게서 남다른 친근감을 느끼는 것도 다 그러한 스님의 마음씨 탓이라고 지금도 믿고 있다.
스님이 가져 오신 것은 국수였다. 내가 국수를 좋아하므로 사 오셨다 하셨다. 스님과 나는 국수를 삶아 고추장에 비벼서 모처럼 포식을 했다.
스님이 이번에 오신 것은 내원사에서 초청한 공양에 참석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날이 다음 날이었다. 나도 산중의 유일한 비구로서 초청을 받은 것은 물론이다. 스님은 나와 함께 하루밤을 지내고서 내원사에 가시려고 하루를 당겨서 오신 것이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수옥 스님이 내가 산중에 남아 있는 것을 매우 불편해 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내원사를 가 본 사람은 알겠지만 내원사 가는 길은 국도에서 들어서면 Y자형의 오른쪽 길이다. 왼쪽 길은 노전으로 가는 길이고 그 사이는 능선이고 이 능선에 견성암이 있고 더 올라가서 성불암이 있다. 능선이 끊어지는 곳, 즉 Y자의 삼거리에 산신각이 있다.
내원사에서 노전을 가려면 이 산신각을 거쳐서 가게 되어 있는데 거리가 15리 길은 된다. 그러나 성불암을 거쳐서 능선을 넘으면 노전은 금방이다. 그러니 내원사의 스님이나 사미니 . 행자들이 노전을 가고 오는데 으레 성불암을 거쳐서 다닌다.
그러므로 수옥 스님은 이리가 지키고 있는 길목을 양들이 지나는 꼴이어서 위험천만하다는 생각을 했음직 하였다.
그래서 성불암을 거치지 말고 산신각을 돌아서 노전으로 가도록 엄명을 했지만 잘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니 더욱 걱정이 되고 걱정 끝에 향곡 스님에게 상의를 한 것이었다.
이튿날, 내원사에는 운허 스님도 오시고 경봉 스님도 오셨다. 공양을 마친 다음 차를 마시는데 문득 한 스님이 나에게 "젊은 수좌가 무슨 사정이 있는가. 얼굴색도 좋지 않고, 마음 속에 남에게 말할 수 없는 사정이라도 있는가. 있으면 말을 하게" 하셨다. 듣는 순간, 이것은 나를 시험하자는 것이다.
비구니 산중에 사는 나를 넘겨 짚자는 것이다라는 생각이 번뜩 떠올랐다. 때마침 나는 지루한 시간을 죽이기 위해서 {조당집(祖堂集)}을 읽고 있었다. 그 조당집에 사정은 다르지만 백장(百丈)이 운암(雲巖)에게 이와 흡사한 말을 했는데 그것이 생각났다.
그래서 운암이 대답한 대로 "아무 일도 없습니다" 했다. 마음 속 같아서는 "그래서 스님은 비구니를 데리고 나가서 딸도 낳고 살림을 하셨느냐"고 묻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그런데 향곡 스님께서 "수좌의 공부를 성숙시키는 것은 선지식(善知識)이다"하셨다.
선지식이 없는 이 산중에 있지 말고 선지식을 찾아가라는 뜻이었다. 이 말도 백장이 운암에게 한 말과 흡사하다. 나는 향곡 스님의 간절한 말씀을 따라서 내원사 산중을 떠나리라 마음 먹었다. 그러나 쉬 떠나지 못하고 그 해의 겨울안거를 지나고서야 떠났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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