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으레 초전법륜지(初轉法輪地)라는 수식어가 앞서는 사르나트, 이 유서깊은 성적(聖跡)은 바라나시에서 북쪽으로 약 8km 가량 떨어진 곳에 있다. 지난날 부처님의 행적을 따라 답사했던 법현의 기록으로 짐작해 본다면, 부처님은 깨달음을 얻은 후에 보드가야를 떠나 라지기르, 나란다, 파트나, 바라나시의 순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이곳 사르나트로 왔다.
오늘날에는 가야에서 바라나시로 이어지는 대로가 있어 굳이 이렇게 돌아갈 필요가 없어졌지만, 당시에는 이 길이 여의치 않았던 것 같다. 근 3백 km에 이르는 이 먼 길을 걸어 온 것은 지난날의 다섯 도반(道伴)에게 법을 전하고자 함이었다.
바라나시에서 사르나트로 가는 길은 이른 아침 자전거 릭샤(人力車)가 격에 맞는다. 어슴 새벽부터 저녁 늦도록 언제나 사람들이 북적대는 바라나시 역사를 떠나 철교 하나를 건너면, '인환의 거리' 바라나시를 빠져나오면, 전혀 다른 세계가 된다. 노변에 늘어선 해묵은 가로수가 싱그럽고, 촉촉해진 마당을 비질하는 농가의 아낙들이 푸근하다. 노변 구멍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라가(raga)의 선율, 시타르(sitar)와 타불라(tabula)의 경쾌한 어울림은, 늦가을 날씨처럼 알싸한 사르나트의 아침을 더욱 상쾌하게 만든다.
가는 길에 제일 먼저 만나게 되는 유적은 차우칸디 스투파(Chaukhandi stupa, 迎佛塔)이다. 초전법륜지 조금 못미처 길 왼편에 있으며, 대개는 일단 유적지로 갔다가 돌아가는 길에 들르게 되는 곳이다. 이 스투파는 부처님이 다섯 비구를 재회한 사건을 기념하여 굽타왕조 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당시에는 높이 3백여 척에 달하는 웅장한 규모였다고 한다. 현재의 팔각 기둥 형태로 올려진 건물은 1588년 무갈 제국의 악바르(Akbar) 황제가 세운 것으로, 부왕 후마윤(Humayun)의 방문을 기리는 것이라 한다. 계단을 따라 탑 위로 오르면 사르나트 마을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스투파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초전법륜지가 있다. 입구 오른편에 단층 석조 건물의 사르나트 고고학 박물관이 있으며, 이곳에는 유적지에서 발굴된 수많은 불교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 박물관은 특히 초전법륜상으로 유명한 곳이다. 설법인을 맺은 결가부좌의 이 불상은 굽타왕조 시대의 불상 가운데서 최고 걸작의 하나인 동시에 인도 조각 예술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꼽힌다. 회백색 사암에 새겨진 심원한 표정이 오묘하다. 그 외에도 연화대 관음보살 입상, 미륵보살 입상, 자타카 이야기를 새긴 부조 등 많은 불교 걸작품이 전시되어 있으며, 갤러리 입구에 버티고 선 아쇼카 왕 석주 머리 부분의 사자 장식 또한 이 박물관의 명물이다. 온화하면서도 위엄어린 이 석사자 상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생생하다. 아쇼카 왕 당시의 간소함이 차츰 화려한 꾸밈으로 바뀌면서, 이에 따라 정신적인 긴장감도 사라져 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유적지 안으로 들어서면, 우선 다메크(Dhamekh) 스투파로 눈길이 간다. 오른편 먼발치에 당당한 자태로 우뚝 솟은 이 거대한 스투파는 오늘날 사르나트의 상징처럼 초전법륜지를 지키고 서 있다. 이 스투파는 부처님이 다섯 비구에게 처음으로 설법한 곳을 기념하여 아쇼카 왕이 조성한 것이라고 하나 그 내력은 확실치 않다. 지금 우리가 보는 것은 굽타왕조 시대에 증축된 것으로, 기단부 외벽을 장식하고 있는 기하학적 문양이 특히 인상적이다.
유적지 입구 정면 가까이에 있는 다르마라지카(Dharmarajika) 스투파 터는 뒷전이고, 입구에서부터 눈길이 자꾸 다메크 스투파로 가는 것은, 보이는 물상에 대한 우선을 물리치지 못하는 답사자의 한계다. 지금의 다르마라지카 스투파 터는 둥그렇게 적벽돌을 쌓고 그 안에 붉은 흙을 채운 품이 흡사 씨름장 같지만, 현장이 이곳을 찾았을 때는 이 터에 백척이 넘는 웅대한 스투파가 있었으며, 그 앞에는 칠십여 척 높이의 석주가 서 있었다고 하니 실로 격세지감이 있다. 터만 남은 이 다르마라지카 스투파는 부처님의 사리를 담고 있었으니, 의미로 친다면 다메크 스투파에 결코 밑가지 않는다 할 것이다.
유적지 한 가운데 있는 사원 터는 서기 2세기 경의 것으로 입구가 동쪽으로 향해 있으며, 이곳으로 향하는 길 양편으로는 여러 기의 작은 스투파들이 있다. 이 사원의 벽은 아랫 부분에 석재를, 그리고 윗 부분에는 적벽돌을 사용하여 쌓아 올려 독특한 양식을 보이고 있으며, 내부의 벽에는 불상을 안치했던 흔적도 있다.
이 사원의 서쪽에 있는 아쇼카 왕 석주도 의미 깊은 유적이다. 원래는 부처님이 다섯 비구들에게 처음으로 법을 설했던 곳에 세워졌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현재로서는 그 정확한 위치를 가늠할 수 없다고 한다. 비록 머리 부분은 박물관에서 맡겨 두고 부러진 몸 몇 토막을 겨우 유지하고 섰지만, 회백색 사암의 매끈한 표면은 서늘한 생기를 내뿜는 듯하다. 석주 표면에 브라흐미 문자로 새겨진 '파화합(破和合)'에 관한 아쇼카 왕의 금계(禁戒)는 당시 승단의 분열 조짐을 반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아쇼카 왕 석주를 지나 유적지 북쪽에 있는 세 곳 승원터를 둘러본 후에, 이곳 아이들이 파는 야채 한 광주리를 사 들고 사슴 동산으로 가면, 사르나트 유적지의 답사는 대개 끝나는 셈이다. 돌아나오는 길에 이 주변에 있는 스리랑카 사원을 비롯한 동남아 제국의 사원들을 둘러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 될 것이다. 사슴 동산 뒷편에는 최근에 조성된 한국절이 있다.
☞ 본 기사는 불광 사경불사에 동참하신 권창선 불자님께서 입력해 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