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의 마애불]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 석불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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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의 마애불] 나주 철천리 마애칠불상, 석불입상
  • 이성도
  • 승인 2018.08.31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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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의 고도 나주에서 고려시대 특별한 마애석불을 만나다
사진 : 최배문

영산강은 전남 담양군 용추봉에서 발원하여 나주에 이르러 광활한 강줄기를 이루고 이곳을 풍요의 땅으로 만들면서 고대 문화의 꽃을 피워왔다. 나주는 고려 초기에 ‘나주목’이 설치되면서 전라도의 중심고을 노릇을 해왔다. 나주를 두고 ‘천년 목사 고을 나주’, ‘천년 고도 천년목사 고을’이라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선사시대부터 영산강 주변에서 고대문화를 일구어 왔는데, 기원후 4-5세기 무렵 형성된 반남 지역의 고분군은 특별한 문화유적이다. 나주는 고대로부터 정치·경제적으로 발달했지만 불교문화재는 그 역사성이 뚜렷하지 않다. 큰 강과 넓은 평야가 있어 사람과 물산이 모이기 쉬운 지정학적 여건임에도 불교유입 초기에서 통일신라기의 유적이 없다는 것은 의문을 제기할 만하다. 불교문화 유입이나 활성화가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이 지역 특유의 옹관묘를 중심으로 한 고분문화의 강인한 전통성 때문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주목할 만하다. 

고古신라의 경주처럼 전통사상이나 신앙이 강한 지역에서는 그만큼 외래사상의 접근이 어렵다. 옹관묘 중심의 고분문화가 정형화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새로운 사상이나 종교의 접근이 용이하지 않다. 나주에는 삼국시대, 통일신라기의 불교문화도 뚜렷한 흔적이 남지 않았다. 본격적인 것은 고려시대이다. 

고려에 만들어진 것으로는 나주 철천리에 있는 석불입상과 마애칠불석상이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의 불교문화재도 여럿 있는데 이 중 운흥사, 불회사, 총지사, 법천사 등에서 불교와 민속이 습합한 돌장승이 전국적으로 유명하다. 그것은 예배 대상의 불상이거나 사찰을 장엄하는 석탑과 석등도 아닌 민속신앙이 불교적으로 수용된 조선 후기의 석조유물이다. 그런 면에서 고려시대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철천리마애칠불상이나 석조여래입상은 주목할 만한 유산인 것이다. 

 

나주 철천리마애칠불상은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의 야트막한 산기슭에 있다. 근래에 지은 미륵사의 대웅전 바로 뒤편의 사각에 가까운 원추형 바위에 부조로 된 일곱 구의 불상들이 새겨져 있다. 또한 그곳에서 약 30m 떨어진 곳에 장대한 석불입상이 있다. 철천리석불입상과 지척에 있으면서도 이 마애칠불상은 조각한 석재나 기법, 표현형식에서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마애칠불상의 석질은 입자가 곱고 검은빛이 나는 단단한 화강암인 반면, 대형 석불입상의 석질은 작은 자갈과 시멘트를 버무려 놓은 듯한 역암으로 보이며, 섬세하게 세부를 다듬기에는 불가능할 정도로 거칠다.

마애칠불상은 1미터 높이의 원추형 바위에 새긴 것으로 좌상과 입상을 조각하였으며, 그 높이는 82-90cm이다. 바위 동면과 북면에는 좌상이 한 구씩 있고, 남면에는 네 구의 입상이 있다. 서면에는 한 구의 불상이 있었던 흔적만 있다.

좌상의 두 불상은 어깨와 양 무릎의 폭은 적정하지만, 팔은 빈약하다. 또한 불신佛身의 굴곡을 살리지 못한 딱딱하고 평면적인 조형으로 옷 주름도 도식적이며 얕게 선각으로 표현하고 있다. 동면상의 수인은 촉지인이며, 북면상은 합장인이다. 이러한 수인과 표현기법은 이곳에서 가까운 화순 운주사에 집중적으로 나타나고 있어, 도상과 양식의 유사성에서 비교해 볼 필요가 있다.

남면에 있는 4구의 입상은 좌상과 같은 기법을 보여 주고 있으나 표현은 더 딱딱하다. 그 세 번째 상은 두 손을 몸에 붙인 채 꼿꼿하게 서 있고, 나머지 상은 오른손을 가슴에 대고 있어 마치 국기를 향해 경례하는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빈약한 체구에 형식적인 옷 주름 등 도식화된 불상을 만들었지만 그 구성은 특별하다. 원추형의 바위 정상에 별석으로 조각한 동자상이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볼 수 없다. 

서면에는 상을 떼어낸 흔적이 역력하다. 현재로서는 어떤 상인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전하는 말로는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 있었다고 한다.

조각된 상들은 민머리에 육계가 큼직하고 얼굴은 타원형이다. 어깨를 비롯한 불신과 법의는 직선적이고 딱딱한 평면적인 표현인 반면, 얼굴은 둥근 반입체의 고부조이지만 이목구비의 구체적인 표현이 없다. 입상의 발아래에는 1단의 돌출된 면을 만들어 대좌에 대신하였고 광배 표현은 없다.

이 불상들은 빈약한 체구에 도식적인 형태와 형식적인 옷 주름, 평면화된 조형, 형식적인 표현 기법으로 조형성이 떨어진다. 그러나 하나의 바위에 이처럼 여러 상의 불상을 조각한 예는 희유하며, 그렇다고 전형적인 사방불도 아니다. 특히 비정형화된 원추형의 둥글고 각진 면에 방위불 형식을 갖추어 조각한 유일한 예로서 귀중한 자료이다. 이를 두고 법화경의 ‘견보탑품’이나 사방불四方佛의 도상 등으로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상과 연계한 경전과 교학적 해석의 가능성은 서면 불상의 파손과 바위 정상의 환조불상이 절취당하면서 많은 한계를 갖는다. 조성 연대는 고려 전기로 추정된다.

사진 : 최배문
사진 : 최배문

 

나주철천리석불입상은 큰 절벽의 바위 면에 조각한 마애불이 아니다. 불상은 높이가 5m 넘는 큰 판형 석재를 세워 불신과 광배가 한 돌로 조각된 입立불상이다. 정확하게는 마애판석불상으로 자연석의 큰 바위가 아닌 석판재石版材에 조각하여 이동이 가능하다. 판형 석재에 장대한 여래입상을 조각한 것으로 고려 초부터 유행한 거불양식이다. 상호는 살찐 편이며 어깨는 풍성하다. 

넓고 볼륨 있는 각진 얼굴에 뭉툭한 코, 치켜 올라간 긴 눈, 짧은 인중, 단정한 입술, 넓고 큰 귀 그리고 삼도가 깊게 그려진 짧고 굵은 목 등에서 강건한 인상을 풍긴다.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보이나 생동하는 자연스런 미소는 보이지 않는다.

얼굴 넓이와 같은 굵은 목에는 세 줄의 음각선이 뚜렷하고, 통견의 법의는 가슴에서 겹쳐지면서 반전을 이루고 V자식 옷 주름은 상반신에서는 좁은 간격의 선과 면을 이루다가 무릎 아래까지 큰 U자형으로 흘러내린다. 상반신은 당당하나 어깨는 과장되었고 아래로 갈수록 형태는 빈약하다. 옆에서 보면 고부조에 가깝게 광배와 불신의 차이를 두었지만 앞에서 보면 신체의 굴곡이 잘 드러나지 않고 평면적이다. 법의에 가려진 위의 팔 길이가 짧아 보이고 두 손은 수평으로 들어 시무외·여원인의 통인通印을 이루고 있다. 양손은 모두 작은데 특히 왼손은 왜소하고 손의 자세도 어색하다.

광배는 내부에서 머리와 몸 광배가 구분되고 두광 안에는 머리 주위에 연화문과 그 주위에 당초문 같은 꽃무늬를 새겼다. 신광에는 구름무늬로 장식하였다. 대좌는 직사각형의 육면체 형태로 장식은 없고 단순하다. 전체 크기에 비해 작아 옹색하게 보인다. 실제 오른손의 여원인을 자연스레 취하려면 손은 허벅지 가까이 내려야 하고, 만약 지금과 같이 가슴 가까이에서 수인을 취하려면 오른쪽 어깨는 올라가야 한다. 또한 왼손의 시무외인 자세도 손이 가슴 앞으로 더 나와야 한다. 물론 석재가 갖는 한계일 수 있지만 이는 작가의 조형역량과 조형성의 한계로 보인다.

이 석불은 얼굴에서 풍부한 양감을 가지고 있고, 얼굴과 신체의 표현에서는 매스가 두드러져 괴체화塊體化되어 가고 옷 주름이 형식화되어 가는 모습에서 나말여초羅末麗初의 표현양식을 보여준다. 약 4.5등신의 비례는 균형 잡힌 불신이기보다 작은 거인 같은 인상을 준다. 신체 각부의 표현에서도 얼굴과 상반신 위주의 표현을 보게 된다. 물론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거불양식을 오늘날의 조형 논리로 분석하고 해석한다는 것이 부질없을지 모르지만, 조형에서 형태의 필수 요소는 짚어야 한다. 신체의 조형 및 형식적인 옷 주름 등에서 사실성을 잃어버리고 형식화되어 가는 양상을 보이나 살찐 얼굴에서 보여주는 강한 인상, 형식화되었지만 조밀하고 활달한 옷 주름, 당당한 어깨, 풍성한 불신 등에서 통일신라의 양식이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고려가 건국되면서 지향한 강건한 정신성으로 당대의 저력과 힘을 충분히 살려준 고려 초의 거불 양식의 대작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 불상과 유사한 양식의 석불은 남원의 용담사지석불입상(보물 42호)으로 규모와 양식 면에서 비슷하다. 또한 나주 만봉리 석조여래입상과 보성 반석리석불좌상도 철천리석불입상의 상호와 두광 표현이 유사하여 이 영향력으로 만들어진 불상이라 할 수 있다. 

나주철천리석불입상은 5m가 넘는 초대형 불상인 점과 후대에 이를 모방한 다른 불상들이 조성되고 있는 점을 통해 나주와 그 주변지역에서 매우 중요하게 예경되었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이 불상의 조성 시기는 신흥 고려의 기운을 타고 각 지방에서 대대적으로 제작되었던 일련의 거불 조각 가운데 하나로 여겨지고 있어 일반적인 조성 시기는 고려 초 10세기 후반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사진 : 최배문

       

•나주철천리석불입상. 보물 제462호, 고려 10세기, 역암, 5.38m. 
•나주철천리마애칠불상. 보물 제461호, 고려, 화강암, 
   총높이 95cm, 동면 좌상높이 90cm, 남면 입상높이 82cm. 
   전남 나주시 봉황면 철천리 산 124-11          

 

이성도
서울대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하고 4회 개인전과 270여 회의 초대, 기획, 단체전에 출품하는 등의 작품 활동을 해왔다. 『한국 마애불의 조형성』 등 다수의 책을 썼고, 현재는 한국교원대학교 미술교육과에서 후학 양성과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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