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 태어납니다. 본인은 태어남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죠. 그러나 어느 날인가부터 알기 시작합니다. 보고 듣고 느끼고 인지하며, 울고 넘어지고 다치고 아파하며 성장해 왔습니다. 언제인가부터 자신의 몸을 보고 느끼며 많은 현상들에 대하여 알아왔습니다. “내 몸, 내 몸, 내 마음, 내 마음” 하며 표현하기 시작했습니다. 삶과 고통에 대해서도 눈이 열리기 시작했고 ‘삶이란 무엇인지’ 사유도 하였습니다. 나이는 깊어져 죽음에 대하여 관심도 갖게 됩니다. “어떻게 하면 유익한 삶(Well-living)이 될까?” 고민합니다.
| 걷고 쉬며 편안하게 주시
숲속에서 휴식하기, 혹은 편안한 공간에서 휴식을 취해봅시다. 그러면서 그동안 살아온 삶에 대해서 비추어 봅시다. 어린 시절부터 나이별로 다양한 측면에서 사유 분석해 보세요. 인과因果의 현상으로 그때그때 조건에 따라서 진행되어 살아온 과거 자신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분석해 보세요.
면밀하고 깊게 관찰합니다. 그러면서 현재를 살펴봅니다. 현재 나의 몸 상태나 마음 상태에 대하여 눈을 지그시 감고 주시합니다. 일어나고 사라지는 생멸生滅현상을 그대로 바라봅니다. 가볍고 맑게 숲속을 걸으며 주시합니다. 거실이나 적당한 곳의 일정한 거리(약 5~7M 정도)를 걸으며 편하게 주시합니다. 현재 진행되는 순간순간의 현상에 대한 주시는 깊은 휴식의 효과를 줍니다. 자신에 대한 통찰적인 앎과 이해, 연민과 나눔의 지혜를 낳습니다. 간혹 어떤 사안에 대해서 깊은 사유가 필요한 경우 지혜롭게 사유하며 분석해보는 것도 좋습니다. 분명한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합니다. 진행과정은 어떠했는지, 최종적으로 결과는 어떠했는지 파악합니다. 그리고 내 몸과 마음, 주위에 미친 영향, 의도가 어떠했는지, 종합적으로 면밀하게 파악하고 조사합니다. 아울러 의도는 바른지 그렇지 않은지도 알아야 합니다. 의도가 어떠했는지 따라 선업善業과 불선업不善業으로 갈립니다.
예컨대 발을 관찰할 경우에는(身隨觀) 발의 움직임만을 알아차려 봅니다. 발이 나가고 닿고 누르는 일련의 현상만을 주시합니다. 단순한 발의 움직임 현상에 마음이 집중됨으로써 마음은 고요해져요. 점점 깊은 삼매에 들기도 합니다. 정신이 단순해지고 맑아집니다. 삼매는 깊은 휴식이 됩니다. 1시간 정도 걸으며 진행되는 생멸 현상들에 대한 주시는 그 순간 주시한 대상에 머물며 알아차리게 합니다.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의 생멸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다시 발을 들고 나가고 누르는 현상으로 돌아와서 그 현상을 주시합니다. 눈을 최대한 적게 뜨고 천천히 움직입니다. 걸으며 알아차림에서 오는 행복을 열어봅니다.
5가지 속도로 걸음을 나눠 걷고 싶은 걸음 속도를 그때그때 선택해서 ‘걷기관찰’을 해봅니다. 최대한 아주 천천히 걷기, 천천히 걷기, 보통 걸음걸이, 빠른 걸음걸이, 아주 빠른 걸음걸이를 진행하며 면밀하게 관찰합니다. 머리가 숙어지지 않도록 하고요. 잘 챙기며 눈은 조금만 뜨고 아래를 내려다보며 걷습니다. 매일 한 시간씩 훈련한다면 큰 효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또한 큰 휴식을 가져오지요. 많은 시간 정진 속에 통찰 지혜가 무엇인지 눈뜨게 합니다. 바쁘고 산만한 일상, 들뜸, 고요하지 못한 상태일 때 걷기 관찰은 크나큰 ‘쉼’이 됩니다. 좌선하기 전에 걷기 정진은 깊은 삼매를 가져오는 데 도움이 됩니다. 걷기 싫어도 인내하며 훈련합니다. 혹 힘들게 느껴지면 안하던 것을 하니 당연히 처음에 힘들 수 있습니다. ‘그 정도 노력 없이 무엇을 기대한단 말인가?’라고 자신에게 말해 줍니다. 정 힘들면 30분, 40분, 50분, 1시간 이렇게 늘려갑니다. 삼매에 들면 시간가는 줄도 모릅니다.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을 초월합니다. 이것은 우리 인생살이에 있어서 새롭고 신선한 체험입니다.
걷는 동작을 세 가지 두드러진 동작으로 나눕니다. (발을) 듦, (앞으로) 나아감, (발을) 내려놓음이 그 세 가지입니다. 혹은 ‘듦’, ‘밈’, ‘놓음’ 하며 반복합니다. 그럼으로써 발의 움직임의 현상에 그대로 몰입하여 알아차림이 됩니다. 맑고 성성하게 깨어있는 정신이 흐르게 됩니다. 정확한 알아차림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 듦, 밈, 놓음, 듦, 밈, 놓음, 듦, 밈, 놓음 각 동작들을 분명하게 구분해서 알아차립니다. 마음속으로 명칭을 붙여 알아차릴 때 많은 이익이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저절로 알아차림 삼매의 흐름이 잘 되고 있을 때는 굳이 명칭을 붙일 필요는 없습니다. 명칭을 붙임과 놓음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판단하여 취사선택합니다. 다만, 한 동작 한 동작 분명하고도 힘 있게 알아차림이 진행되는지 스스로 확인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충분하게 걷고 나면 좌선坐禪 혹은 와선臥禪
충분하게 걷고 나면 앉고 싶어집니다. 그럴 땐 앉습니다. 우선 바닥에 앉든 의자에 앉든 부담 없이 앉습니다. 허리가 굽지 않게 바르게 앉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눈을 감으면 내면 주시하기가 아주 유리하죠. 몸의 현상들 관찰하기도 아주 유리합니다. 졸리면 무명無明으로 가니 결코 졸음에 지지 않도록 다짐합니다.
내면에서는 두 줄기의 흐름이 생멸합니다. 몸의 현상과 정신 현상입니다. 양쪽을 오가며 주시합니다. 알아차림. 관찰. 때로는 한 가지 현상에만 주시하기도 합니다. 코앞에서 들숨날숨에만 주시하기도 합니다. 배 전체의 움직임을 주시하기도 하고요. 둘 중에서 하나를 선택하여 기본대상으로 활용합니다. 가슴까지 연결되는 느낌들을 주시하기도 합니다. 여러 현상들을 주시하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이런저런 생각들, 상상들이 일어나면 일어남을 알아차립니다. 또 사라지면 사라짐을 알아차립니다. 그런 다음엔 다시 몸의 현상으로 돌아와서 알아차립니다. 요지는 몸의 현상, 정신 현상들을 구경하듯이 편하게 주시하는 것입니다. 주시하다 보면 그 현상들의 특징도 알 수 있지요. 그러다가 어떤 현상 하나에 집중되어 삼매에 들기도 합니다. 또 어떤 경우에 이 생각 저 생각이 많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들이 일어남을 거부하고 싫어하면 안 됩니다. 싫어하면 ‘화’의 나타남입니다. 이러한 진심瞋心의 일어남은 손해이니 생각, 상상 등이 생멸함을 그대로 알아차리기만 하면 됩니다. 싫어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생멸하는 현상을 주시함이 아주 중요합니다. 그 생멸을 봄으로써 무상, 고통, 무아의 지혜를 증득해 가기 때문입니다.
생각들의 내용, 특성, 원인도 잘 바라봅니다. 생멸함을 잘 알아차립니다. 일어났을(生) 때 보는 것입니다. 일어나지 않으면 보지 못하지요. 우리 고정관념에 소위 수행修行한다고 하면 한 곳으로만 집중하려고 하는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 생각 저 생각이 일어남을 아주 싫어하고 괴로워하고 짜증 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럴 필요가 전혀 없어요. 생각들은 중대한 주시 대상이니 그럴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어떤 생각이 일어날 땐 그럴만한 원인이 있음을 잘 살피면 됩니다. 잘 보고 알고 이해하면 또 사라집니다.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알면 됩니다.
우리는 직립보행 하는 인간입니다. 그러하기에 서고 걷고 앉고 눕습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우리의 삶은 걷고 앉고 눕는 것을 무한히 반복하며 살아왔습니다. 우리는 하루하루 행주좌와行住座臥함에 있어서 유익하지 못한 시간보내기, 잡담으로 시간보내기, 의미 없는 만남, 유익하지 못한 대화 등으로 소중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지금도 또한 그렇게 보내기도 하지요. 어떤 경우엔 멍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신세 한탄하고 슬퍼하며 울고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런 흐름은 나 자신에게 유익하지 못하고 힘이 빠지게 합니다. 나태함을 떨치고 일어나서 자각각타自覺覺他의 정신으로 무장하며 죽는 순간까지 멈춤 없는 정진과 나눔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 정신은 힘이 나게 할 것입니다. 이왕에 걷고 앉고 눕고 하는 삶, 기왕이면 내가 복되고 자애와 연민의 마음, 통찰지혜가 계발되는 방향으로 의도를 일으켜 봅시다.
법문. 지우 스님
대구 관오사 주지. 진제 선사 문하에 출가했다. 해운정사, 각화사, 봉암사 등에서 화두정진, 중앙승가대학교, 동국대 대학원 등에서 교학정진, 찬메 파욱 빤디따라마 셰우민 큰스님들을 통해 위빠사나 정진을 하였다. 어린이 포교, 교도소 포교, 방송포교, 복지기관, 지방경찰청, 불교대학 등 전법활동에 힘쓰며, 대구 보현사와 관오사에서 정진하며 나눔의 삶을 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