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의 본업은 '한의사'입니다. 임상을 하면서 여러 환자를 접하고 나니, “모든 사람에게 최고의 의사는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말합니다. <프레시안>에 건강에 관한 글을 올리고자 하는 목적도 독자들이 각자가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데 작은 도움이 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필자는 ‘건강’을 “몸과 맘, 얼과 알의 조화”로 정의합니다. ‘여담(如談)’은 ‘자투리 이야기’로서의 ‘여담(餘談)’이 아니라, ‘다를 바 없는 진솔한 이야기’란 뜻입니다. 즉, ‘건강 여담(如談)’은 “몸과 맘, 얼과 알의 조화를 이루는 데 작은 징검다리가 될 수 있도록, 진솔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醫)의 이치와 역(易)의 이치는 같다
‘우주만물의 생성과 변화의 이치’를 일컬어 ‘역(易)’이라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하(夏)나라의 역인 ‘연산역(連山易)’, 은(殷)나라의 역인 ‘귀장역(歸臧易)’, 그리고 주(周)나라의 역인 ‘주역(周易)’이 있으며, 우리나라에서도 ‘환역(桓易)’이라는 역이 상고시대에 존재하였다고 전해집니다. 안타깝게도 이들 중 ‘연산역’, ‘귀장역’, ‘환역’ 등은 그 이름만 전해지고, 현재 그 내용이 전해지는 것은 『주역』 뿐입니다.
건강을 얘기하는 자리에서, 그것도 첫머리에 우주만물과 역에 대해 언급을 하게 되어 다소 뜬금없다고 여기신 분들도 계실 테지요. 하지만 동양의 의학은 천지의 이치와 사람의 이치가 다르지 않으며, 나아가 ‘천지와 사람은 서로 느껴서 응한다’는 뜻의 ‘천인상응(天人相應)’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주만물 혹은 천지의 생성과 변화의 이치를 뜻하는 ‘역(易)’은 사람의 생노병사의 이치를 따지는 ‘의(醫)’를 이미 그 시작에서부터 포용하고 있습니다.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 - 상생(相生)과 항구(恒久)함
『주역』에 대한 해설서 중 하나인 「계사전(繫辭傳)」에는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이란 표현이 있습니다. 앞서 역(易)의 이치가 ‘우주만물의 생성과 변화’라고 했는데, 생(生)/성(成)/변(變)/화(化) 중에서도 ‘생의 이치’즉 생리(生理)에 치중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입니다. 또한 생사(生死)의 문제로 본다면, ‘죽음보다는 삶’, ‘죽임보다는 살림’을 위주로 하고 있다고 봐야겠지요. 더욱이 「계사전(繫辭傳)」에서는 ‘생(生)’을 두 번이나 겹쳐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이라는 문장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생생(生生)’을 중심으로 좀더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생생(生生)’은 상생(相生)과 항구(恒久)함이라는 관점을 모두 포괄하는 말입니다.
상생(相生)에 대하여
먼저 상생의 관점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앞서 역(易)의 이치가‘죽음보다는 삶’, ‘죽임보다는 살림’을 위주로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지만, 이는 좀 더 생각해볼 여지가 있습니다. 사실 역에서는 생과 사를 대비시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바로 ‘생생지위역(生生之謂易)’이라고 한 문장이 이를 명확히 하고 있습니다. 다소 황당할지 모르겠습니다만, ‘생(生)’과 대비되는 건 다름 아닌 ‘생(生)’입니다.
흔히 상생이라고 하면 ‘너도 살고 나도 살자’는 의미로 이해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의 이해는 원래 역에서 말한 의도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한다고 봅니다. 상생은 ‘내가 살리니, 네가 산다’, ‘네가 살리니 내가 산다’라는 뜻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으니까요. 즉, 상생은 ‘살림살이’라고 하겠습니다. 더불어 살피자면, ‘낳다, 살리다, 기르다’도 생이지만 ‘나오다, 살다, 자라다’도 생입니다. 요컨대, ‘생생(生生)’은 ‘낳으니 나오고, 살리니 살고, 기르니 자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 역의 이치가 확연히 드러난다는 점은 두말 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나아가, 나온 것은 다시 낳고, 산 것은 다시 살리고, 자란 것은 다시 기르게 되는 역할의 변동이 있게 됩니다. 때로는 자신을 낳아 주고, 살려 주고, 길러 준 대상에게 받은 만큼 다시 돌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새로운 대상을 낳아 주고, 살려주고, 길러 줍니다. 도식화하자면, 전자가 A-B-A라면, 후자는 A-B-C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주는 만큼 받기를 원하겠으나, 역은 전자의 경우처럼 스스로가 보상을 받든지, 후자의 경우처럼 새로운 무언가가 보상을 받든지 간에, 그 차이를 두지 않습니다. 이러한 무심하고도 면면한 흐름에는 보상심리가 없습니다. 쉽게 말해 ‘내가 저를 살려줬는데, 설마 내가 힘들 때 설마 나 몰라라 하진 않겠지’하는 생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역의 이치에서 보자면, 사람이 병이 드는 원인의 바탕에는 보상심리가 자리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생생(生生)한 흐름에서는 A-B-A가 나은지, A-B-C가 나은지는 자연스런 상황에 맞게 구현될 뿐입니다. 아니, 둘 중 어느 경로가 나은지에 대한 비교 자체가 없다고 해야 더 정확하겠죠. 그런데, 사람은 자신과 관련한 일에 있어서만큼은 최소한 A-B-A는 확보되어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심리가 있습니다. 이것이 사람이라면 누구나 병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이유일 겁니다.
항구(恒久)함에 대하여
‘생생(生生)’의 사전적인 뜻은 ‘만물이 끊임없이 활동하는 모양’입니다. 이를 항구(恒久)함의 관점에서 좀 더 자세히 풀어보자면, ‘끊임없이 스스로 틀바꿈하는 하늘과 땅의 기운에 맞도록, 만물이 언제까지나(恒) 오래도록(久) 탈바꿈하는 모양’입니다. 여기서 ‘틀바꿈’과 ‘탈바꿈’은 ‘변화(變化)’의 순우리말이라고 생각하는데요. ‘틀과 탈’은 ‘화(化)’라고 할 수 있고, ‘바꿈’은 ‘변(變)’이라고 하겠습니다. 바꿔 말하면 ‘스스로 변화하는 하늘과 땅에 맞춰 만물이 적응해 가는 항구(恒久)한 흐름’이 ‘생생(生生)’입니다.
‘항구(恒久)’라는 말은 『주역』에서 사용되어, 널리 퍼지게 된 관용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역』에 나오는 64괘 중 32번째 괘인 항괘에는 "恒은 久也"란 설명이 있는데, 이로부터 ‘항구(恒久)’라는 표현이 널리 퍼지게 됩니다. 영화 제목으로도 유명한 ‘천장지구(天長地久)’라는 문장이 『노자(老子)』에 나오면서 ‘장구(長久)’라는 표현이 널리 퍼지게 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이 ‘항(恒)’자를 파자(破字)하면 옛 분들이 ‘언제나, 늘 그렇다’고 여긴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언제나 늘 그런 것은 ‘바로 선 마음’(忄)과 ‘천지간의 해’(日)입니다. 오래가는 것은 이들만 한 게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나아가 생생의 관점에서 ‘바로 선 마음’(忄)과 ‘천지간의 해’(日)가 각자 생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바로 선 마음이 생한 것을 ‘성(性)’이라고 합니다. 또한 천지간의 해가 생한 것을 ‘성(星)’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옛 분들은 마음과 별이 서로 통하게 되는 데서 항구함을 읽어냈습니다. 이는 앞서 말씀드렸던 ‘천인상응(天人相應)’과도 일맥상통하는 점입니다. 하늘과 땅이 끊임없이 틀바꿈하기 위해선 해와 별이 늘 그렇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 것처럼, 만물의 하나인 사람이 끊임없이 탈바꿈하기 위해선 마음을 언제나 바로 세워 해와 별처럼 중심을 놓치지 않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생생의 길목에서...
세계보건기구(WHO)의 헌장에는 “건강이란 질병이 없거나 허약하지 않은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사회적으로 완전히 안녕한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인종 ·종교 ·정치 ·경제 ·사회의 상태 여하를 불문하고 고도의 건강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것을 명시한 것이겠죠.
이를 바꿔 말하면 심신과 사물의 조화 혹은 몸과 맘, 얼과 알의 조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事)/심(心)/신(身)/물(物)의 조화, 얼/맘/몸/알의 조화라고 하겠습니다.
‘사(事)/심(心)/신(身)/물(物)’이 건강의 비결이라고 말한 사람은 사상의학을 만드신 동무 이제마 선생님입니다. 이제는 일반인들도 잘 알고 계시다시피, 『동의보감』을 편찬한 허준 선생님과 함께 현재 우리 한의학의 모습을 일궈내는 데, 매우 큰 공헌을 하신 분입니다. 앞으로 글을 연재하는 동안에 허준과 이제마 두 분의 저작인 『동의보감』, 『동의수세보원』은 심심치 않게 인용이 될 듯합니다.
‘얼/맘/몸/알의 조화’는 한자어를 제가 나름대로 순우리말로 바꿔 써 본 겁니다. 사(事)/심(心)/신(身)/물(物)과 얼/맘/몸/알이 상통하는 면이 있기도 하거니와, 사물과 심신에서는 느껴지기 힘든 어감이 얼과 알, 몸과 맘에는 있습니다. 얼과 알, 몸과 맘은 어원이 같으면서 적절한 간격을 두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점이 지금까지 이야기했던 ‘생생(生生)의 대비’에서 느껴지는 것들을 나타내기에 적당한 용어가 아닐까 싶습니다.
아직은 다소 생뚱맞다는 느낌이 드실 것 같네요. 하지만 오늘은 자세한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앞으로 이어지는 연재에서 사(事)/심(心)/신(身)/물(物)과, 얼/맘/몸/알은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 될 것입니다. 다음 ‘여담(如談)’부터 이들 개념에서 알 수 있는 생리 병리 및 치유 등에 대해서 우선적으로 이야기하렵니다.
사실, 사(事)/심(心)/신(身)/물(物)의 조화와, 얼/맘/몸/알의 조화로 건강을 이야기 하는 것은 보다 구체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방편인 셈입니다.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한마디로‘생생(生生)의 길목에 몸을 두고 그 길목을 바라보는 맘’이라고 하겠습니다.
이혁재
연세대 물리학과와 경희대 한의학과를 졸업했다. 경희대 한의과대학 대학원에서 의사학(醫史學)을 전공하고 있다. 석사학위 논문은 「동의보감에 나타난 의역(醫易)사상에 대한 고찰」이 있으며, 현재도 허준의 『동의보감』과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신천 함소아 한의원 원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