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5년(숙종 21년)의 실화失火로, 동우제료東隅諸寮, 만월당滿月堂, 원음圓音 등의 각閣을 태우다.
1696년(숙종 22년)에 또 실화, 서우제료西隅諸寮와 무설전無說殿 등을 태우다.
1743년(영조 19년) 대적광전 큰 축대 아래의 당우 수백 칸이 불타다.
1763년(영조 39년), 1780년(정조 4년)에 실화하다.
1817년(순조 17년)에 실화失火, 태반殆半이 소진燒盡되다.
부흥復興을 꾀하던 중 1871년(고종 8년) 또 법성료法性寮와 수백 칸의 당우를 태우다.
이 사실은 1876년 2월 퇴암退庵 스님이 찬술한 『해인사실화적海印寺失火蹟』에 기록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후 해인사에서 일어난 일곱 번의 큰 불에도 장경판전만은 그대로 보존되었다.
단오절인 음력 5월 5일. 매년 이날이면 법보종찰 해인사(주지 향적 스님)에서는 특별한 의식을 치른다.
단오절 소금묻기.
해인사의 모든 대중이 대적광전과 봉황문 앞 등 경내 일곱 자리에 소금을 묻고 물을 부었다. 향적 스님은 “해인사는 화재에 대한 경각심이 높다. 남산에 화기가 많다고 해서 남산 제일봉에 소금을 묻는 행사를 갖는다.
단오날 바닷물 염분이 가장 높다고 해서 이날 소금묻기 의식을 행해왔다.”고 밝혔다. 언제부터 경내와 남산 제일봉에 소금을 묻었는지 기록이 명확하진 않다.
일곱 번의 큰 화재로 해인사 대중들에게 사찰과 가야산 산림, 무엇보다 장경판전을 지켜야 한다는 의식이 전승되고 있는 것이다.
경내 소금묻기를 마치자, 곧바로 대중들은 1,010미터 남산 제일봉을 오른다. 승가대학, 선원, 산내암자 등에서 정진하는 스님들과 신도들이 모두 참여했다.
열 평 남짓한 넓이의 정상.
저 아래 해인사가 보인다. 눈높이로 수평보다 조금 위에 가야산 칠불봉이 서 있다.
해인사를 바라보며 모든 대중이 합장한다. 지난해 묻어두었던 소금단지를 걷어내고 새로운 소금단지를 묻는다. 몇 곳은 소금을 한지로 감싸서 파묻었다. 이렇게 해인사 대중의 염원이 오랫동안 내려왔다.
『해인사실화적』에는 이렇게 적고 있다. “몇백 년이 못 되어 일곱 번이나 화재가 있었으나, 장경판전만은 그대로 보존되었으니 ‘이것이 사실은 변천하지만 이치는 변하지 않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