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라한과 보살의 성지, 오대산 암자에 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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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한과 보살의 성지, 오대산 암자에 오르다
  • 김성동
  • 승인 2015.08.31 1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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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정사–중대 사자암・적멸보궁, 북대 미륵암, 동대 관음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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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대산五臺山으로 들어가면서 공기가 달라졌다. 월정사를 지나 왼쪽 상원사로 올라가는 길에 서늘한 공기가 몸으로 들어왔다. 깊은 곳이다. 전란戰亂이 닿지 않아 월정사 옆에 사고史庫를 두어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관했을 만큼 골이 깊다. 오대산 바깥의 30도가 넘는 더위를 금방 잊어버린다. 동행한 사진작가가 춥다며 잠깐 몸을 떨었다. 오대산은 비로봉, 호령봉, 상황봉, 두로봉, 동대산 등 다섯 봉우리로 이루어진 곳이다. 각 봉우리 자락마다 동대, 서대, 남대, 북대 암자를 두었으며, 가운데에 중대 암자가 자리한다. 오대라는 이름은 바로 이 다섯 개(五)의 대(臺)에서 나왔다. 오대 암자를 하루 일정으로 갈 수는 없으며, 서대 수정암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 

 

| 왕의 아들, 보천 스님과 효명 스님
 
오대산 다섯 암자에는 신라 신문왕(?~692년)의 두 아들 보천과 효명의 이야기가 전해온다. 왕자인 보천과 효명은 오대산 다섯 봉우리를 참배하면서 수행 정진 중이었다. 형 보천은 적멸보궁 남쪽 아래의 암자에서 정진했고, 동생은 지금의 북대 자리에서 수행했다. 두 왕자는 오대의 각 대마다 거주하는 보살에게 매일 참배했다. 동대 관음암에는 1만의 관음보살이, 남대 지장암에는 1만의 지장보살이, 서대 미타암(지금의 수정암)에는 1만의 대세지보살이, 북대 미륵암 나한당에는 오백 나한이, 중대 사자암에는 1만의 문수보살이 오대산을 지키고 있다. 오대산은 이런 아라한과 보살의 성지인 셈이다. 두 형제는 아라한과 보살들과 함께 오대산에 상주하며 수행 정진한다. 
 
아버지 신문왕은 이대로 두 왕자가 수행만 하고 있으면 왕위가 끊어질 수 있으니, 두 왕자 중 누군가는 왕위를 계승할 것을 알려왔다. 형인 보천이 오대산에서 계속 수행하고자 눈물로 끝내 거절했고, 결국 동생 효명이 신문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33대 왕에 오른다. 그가 바로 성덕왕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이며, 빼어난 비천상으로 유명한 상원사 동종(국보 36호, 725년 제작)이 그때 만들어졌다. 형 보천은 동생인 성덕왕이 창건한 진여원(지금의 상원사)에서 수행 정진하면서 오대산을 아라한과 문수, 관음, 지장, 대세지 보살의 화현처로 만들었다. 
 
 
| 중대 사자암・적멸보궁
 
상원사에서 중대 사자암과 적멸보궁으로 가는 길은 윗길과 아랫길이 있다. 윗길은 한 사람이 오를 만큼의 폭으로 20여 분을 올라가야 한다. 아랫길은 차량이 다닐 만큼 넓다. 여름은 아랫길이 시원하며, 윗길은 봄과 가을, 겨울에 오르면 오대산의 정취를 더 느낄 수 있다. 중대 사자암은 적멸보궁을 가는 길목에 자리한다. 2006년 중창불사를 하면서 비탈면에 오대를 상징하는 오층으로 된 향각을 신축했다. 사자암은 적멸보궁을 지키는 암자이자, 적멸보궁으로 가는 일주문이다. 월정사에서부터 이곳까지 오르면 대략 점심 공양시간이다. 사자암에서 등산객은 점심 공양이 어렵지만, 기도객을 위해서는 점심 공양을 제공한다. 이제 적멸보궁으로 올라가야 한다. 
 
중대 적멸보궁은 5대 적멸보궁(양산 통도사, 영월 법흥사, 정선 정암사, 설악산 봉정암, 월정사 중대) 중 하나이다. 자장 율사가 가져온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오대산 중심 자락인 비로봉 용머리에 해당한다. 법당 안 좌대에는 붉은 색 방석만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모셔져 있기 때문에 불상이 없는 것이다. 대신 법당 창 뒤에 바로 84센티미터 정도의 소박하고 단아한 사리탑이 있다.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 곳이다. 탑면에는 5층 목탑 형상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참배객들은 법당 안에서 바로 이 사리탑을 향해 예를 올린다. 법당 참배를 한 후, 주변 산세를 둘러본다. 어사 박문수가 “천하의 명당”이라고 감탄할 만큼 적멸보궁을 둘러싼 오대산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참배를 끝낸 후 인근에 용의 눈이라고 일컫는 용안수龍眼水에서 물을 떠먹어 보자. 비온 뒤에는 물이 제법 차올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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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인 보천이 오대산에서 계속 수행하고자 눈물로 끝내 거절했고,
결국 동생 효명이 신문왕의 뒤를 이어 신라 제33대 왕에 오른다. 그가 바로
성덕왕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동종이며, 빼어난 비천상으로
유명한 상원사 동종(국보 36호, 725년 제작)이 그때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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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백 나한을 모신 곳, 북대 미륵암
 
상원사 들머리에서 16.5킬로미터의 비포장 길이 이어진다. 그 끝이 바로 북대 미륵암이다. 길 입구에 차단기가 있어, 일반인들은 이 길을 올라가지 않는다. 더구나 가도 가도 끝없을 것 같은 거리다. 북대 미륵암 덕행 스님께서 차량으로 올라올 수 있도록 배려해주지 않았다면, 서너 시간을 걸어야 할 거리다. 미륵암은 1,300미터 높이에 자리한다. 구름 위에 있는 암자다. 덕행 스님은 “월정사 아랫마을 주민이 햇볕 한 점 못 봤다고 했는데, 여기는 하루 종일 해가 보였다. 다만, 산 아래는 운해뿐이었다.”고 했다. 스님은 핸드폰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줬는데, 구름이 펼쳐져 저 멀리 산 아래가 마치 바다처럼 보였다. 스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에도 구름이 휙휙 눈앞에서 지나갔다. 어떤 구름은 가랑비를 뿌리고 사라졌다. 
 
미륵암은 나한도량이다. 중국에서 귀국한 나옹 스님은 1360년 가을 오대산에 들어와 이곳 북대에 머물렀다. 나옹 스님은 미륵암에 있는 16나한을 상원사로 옮기려고 했다. 스님들이 옮기는 것이 무거워 부담스러워하자 나옹 스님은 당신이 혼자 옮기겠다고 했다. 나한상을 옮기기로 한 날, 스님이 나한당에 가보니 아직 그대로 있자, 버럭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이 화상이 업어서 옮겨 주기를 기다리는가!” 그러자 나한들이 스스로 옮겨갔다. 스님이 상원사에 가서 보니 15나한은 있는데, 나머지 한 나한상이 없었다. 스님이 살펴보니 그 나한상은 칡넝쿨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이에 스님은 오대산에서 칡넝쿨을 쫓아내 지금도 오대산에는 칡넝쿨이 없다고 한다. 왜 하필 칡넝쿨일까? 갈등葛藤의 한자어에 쓰인 것으로 보면 얽혀있는 모양, 번뇌 이런 것을 유추해볼 수 있지 않을까. 덕행 스님은 “지금 나한전이 없어, 내년에 작은 나한전을 지으려고 한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보면 미륵암보다 나한암으로 부르는 것이 어울렸다.     
 
 
| 동대 관음암 구정 스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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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암을 내려와 동대 관음암으로 오른다. 가파른 길이다. 2킬로미터를 오르자 작은 암자가 나타났다. 암자에 오르자 구름이 암자 주변을 감싸더니 순간 비를 뿌리고 사라진다. 높은 곳이다. 관음암은 1만 관세음보살이 머물고 계신 곳으로 전해진다. 보천 스님이 임종 직전에 “동대에는 관음방을 두어 1만 관음상을 그려 봉안하며 금강명경, 인왕반야경, 천수주를 독송하고, 관음예찬을 행하게 하라.”고 했다. 오랫동안 이어져온 도량은 한국전쟁으로 모두 불탔으며, 현재 법당과 요사채는 1996년 월면 스님이 새롭게 불사를 했다. 월면 스님은 월정사 어른 중 한 분으로 항상 손에서 일을 놓지 않는 분으로 유명했다.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때도 월면 스님은 호미로 밭을 일구고 있었다. 이곳 관음암은 구정 스님 이야기가 설화로 전해온다. 
 
신라 말 강릉의 비단 장사 청년이 소금을 팔기 위해 대관령을 넘는데 길에서 움직이지 않고 서 있는 노승을 만났다. “스님, 지금 뭐하고 계시죠?” 노승이 답한다. “중생들에게 공양드리고 있다.”고 하자, “무슨 중생이요?” 하고 물었다. 그러자 노승이 답했다. “옷 속의 이와 벼룩이 내 피를 빨아먹고 있다네.” 청년은 그 말에 감명 받아, 그 길로 노승을 따라갔다. 바로 그 노승이 신라 고승인 무염 스님이다. 청년은 무염 스님을 따라 매일 밥 하고, 물 긷고, 나무 하면서 3년을 보냈지만, 어찌된 일인지 무염 스님은 경전 한 구절도 알려주지 않았다. 답답하고 초조한 청년은 용기를 내어 “부처가 무엇입니까?”하고 물었다. 그러나 스승은 “즉심시불卽心是佛이니라.” 했다. 청년은 일자무식이라, 이 말을 잘못 알아듣고, ‘짚신이 부처’라고 알아들었다. 그때부터 이 청년은 짚신을 신고 걸을 때 짚신을 보면서 생각했다. ‘짚신아, 네가 왜 부처냐?’ 오직 이 생각만 하고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3년을 이 질문만 하면서 보내는 어느 날, 짚신의 끈이 뚝, 하고 끊어지는 순간, 크게 깨달았다. 깨닫고 보니, 짚신이 부처가 아니라, ‘즉심시불’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무염 스님께 한걸음에 달려가 말씀드리니, 무염 스님은 아무 말 없이 “부엌에 솥이 잘못 걸렸으니 다시 걸어라.” 한마디 하고 돌아섰다. 청년은 어리둥절해 스승이 하라는 대로 부엌에 가서 솥을 다시 걸었다. 그러자 무염 스님은 다시 고쳐 걸라고 했다. 이것을 아홉 번 반복해 솥을 다시 걸게 했다. 무염 스님은 깨달음의 환희 순간이 자칫 잘못된 상황으로 나타날 것이 염려되어, 그 환희를 진정시키고자 엉뚱하게 솥(鼎)을 아홉 번(九)이나 다시 걸게 했던 것이다. 이 청년이 신라 고승인 구정九鼎 스님이다. 제자의 깨달음을 다루는 스승의 애정이 아낌없이 드러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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