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58년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모든 생명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합니다. 부처님은 어둠과 미혹의 땅에 한 줄기 빛으로 오셨습니다. “심외무법心外無法이요, 심외무불心外無佛이라” 하였습니다. 진리는 마음 바깥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곧 부처라는 뜻입니다. 마음자리에는 생사가 없으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마음의 바탕인 법성은 본래 청정하고 무한한 위신력을 원만하게 갖춘 자리입니다.
|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해법
진리를 깨달으신 부처님은 어둠과 미혹을 벗어날 희망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 빛은 내가 있는 그대로 부처임을 깨우쳐준 지혜의 빛이요, 내가 부처인 만큼 남도 부처이니 남을 돕고 섬길 것을 권하는 자비의 빛입니다. 지혜와 자비의 마음을 깨우치면 너와 나, 우리가 모두 부처입니다.
모든 생명은 자기 안에 불성을 갖추고 있습니다. 부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부처의 마음으로 이웃을 살필 때, 우리는 영원한 안락을 누릴 수 있지요.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해 도움을 주고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연기의 이치를 깨달아야 할 때입니다. 인류의 참된 스승인 부처님의 탄생을 기리는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스스로 부처로 살아가겠다는 다짐을 새삼 가슴에 새기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부처님은 모두가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해법을 제시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여전히 아집과 편견에 사로잡혀 서로를 헐뜯고 괴롭힙니다. 나와 피부색이 다르다고 차별하고 나보다 가난하다고 업신여깁니다. 국민이 아니라 오직 내 편만을 위해 일하는 정치인들도 적지 않아요. 내 잘못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덮어버리고, 남의 잘못은 조금도 용서하지 않는 사람이 으스대는 세태입니다. 세대 간, 지역 간, 빈부 간 이념갈등이 커지는데도 분열을 통해 자신의 지위와 위상을 드높이려 하기 때문에 갈등은 점차 확대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듯 너와 나는 다르다, 나는 너보다 우월하다는 소아적小我的 발상이 사회를 분열시키고 나라를 혼란에 빠뜨립니다.
일찍이 한국불교사의 위대한 선지식인 원효 스님은 화쟁 사상을 주창했습니다. 화쟁은 특정 종파를 고집하지 않고 불교를 하나의 진리에 귀결시켜 통합하기 위한 대안사상이었습니다. 또한 신라에 의한 삼국통일 후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들을 보듬으며 민족화합에도 이바지했습니다. 특히 한국불교에 원융의 정신이 자리매김하는 데 크게 기여했지요. 자기만이 옳다고 고집하는 갈등과 반목의 현대사회에서, 소통과 화해로서의 화쟁은 여전히 그 의의가 큽니다.
우리 종단도 양변에 치우치지 않는 중도의 자세로 이념적 편향을 극복하고 불교와 사회를 계도해 나가야 합니다. 지난 1994년 출범한 조계종 개혁종단도 ‘깨달음의 사회화’를 위해 사회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갈등 해소에 참여하는 등 종단의 지평을 넓혀왔습니다. 그러나 20여 년이 지난 오늘 우리의 다짐이 잘 지켜지고 있는지도 깊이 성찰해 봐야 할 것입니다.
| 자신을 비울 때 상대를 감동시킨다
화쟁이란 원융무애를 사상적 근간으로 삼아 현실세계의 갈등과 대립을 치유하는 방편이 될 수 있습니다. 각각의 종파들은 자신의 관점에서 다양한 주장을 펼치기 마련입니다. 물론 이들의 주장은 공통적으로 부처님의 말씀을 토대로 했다는 점에서 부분적으로는 진리입니다. 동시에 이러한 다름은 궁극적으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환원될 수 있으니 근본적으로는 동일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컨대 장님이 코끼리를 만질 때 누군가는 배를 만지면서 벽과 같다 하고, 누군가는 다리를 만지면서 기둥과 같다고 이야기할 수 있지요. 모두가 자신의 입장에서만 세상만물에 대해 판단하는 데서 생기는 오해입니다. 그런데 이들이 코끼리의 실상을 올바르게 파악하려면 자기 자신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수용해야 합니다. 자신이 장님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자신의 관점만이 사실이라고 한다면 코끼리를 벽이라 하고 기둥이라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입니다.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비롯된 탐욕과 분노와 어리석음을 참회해야만 비로소 진리의 본래자리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씨앗이 씨앗이기를 고집하면 또다른 생명으로 자신을 꽃피울 수 없는 법입니다.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상대방을 설득하려 들면 공감을 얻기 어렵습니다. 겉으로는 소통을 주장하면서 타인의 의견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자신의 의견만을 관철하려는 사람들이 많아요. 이는 진정한 소통의 의미를 모르는 행동입니다. 스스로는 제 것을 내어주려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서 오직 상대방만이 자신의 의견을 들어주고 받아주어야만 소통이라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공감을 얻어내기 어려운 것입니다. 오직 자신을 철저히 비워야만 상대방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습니다. 씨앗이 스스로를 희생하고 몸을 던질 때에만 그것은 꽃과 열매로 승화되어 세상을 아름답게 장엄합니다.
|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따듯한 세상을 위하여
부처님은 이상세계를 따로 설정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바로 이 자리’에서 욕심을 버리고 청정한 마음을 내면 곧바로 부처이지요. 단지 나 스스로 가지고 있는 불성을 알지 못하고 먼 곳에서 이상을 찾으려 함으로써 불성을 내던지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봐야 할 것입니다.
내가 아무리 옳다고 우겨도 남이 옳다고 인정해주지 않으면 영원히 틀린 생각일 뿐입니다. 나만이 옳고 다른 사람은 틀린 것이 아니라 내가 옳으면 다른 사람도 옳고, 다른 사람이 틀리면 나도 틀렸다는 성찰이 화쟁의 바른 의미입니다. 대승불교에서는 수행의 이상으로 자타불이自他不二와 자리이타自利利他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나와 남이 다르지 않으므로 남을 이롭게 하면 곧 내가 이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할 때 스스로 높아지고 귀해지는 것이 불교의 이치임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깨달음은 경전 속 글귀만이 아니라 고통받고 설움받는 이웃의 신음과 탄식 속에 있습니다. 자비는 타인에게 즐거움을 준다는 자慈와 타인의 고통을 없애주는 비悲가 합쳐진 것이지요. 타인의 고통을 없애고 즐거움을 더해주는 자비 실천이야말로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좋은 방편입니다. 올해 우리나라 1인당 국민소득이 2만4천 달러를 넘었다고는 하지만 빈부격차와 양극화로 인해 아직도 그늘진 곳에서 신음하는 이웃들이 있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여 주변의 어려운 이웃을 살피는 보살행을 실천하는 데에도 게으르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조계종에서도 불기 2558년 봉축표어를 ‘나누고 함께하면 행복합니다’로 정했습니다. 가난하고 아프고 외로운 이웃들과 함께할 때 모두가 행복한 불국토를 이룩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 발짝 더 나아가 우리는 지구촌 모든 이웃과 생명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삼라만상이 연기의 법칙으로 얽혀 있으니 지구촌 인류 전체가 한 형제이고 한 생명입니다. 지금도 하루 1.25달러 이하의 절대빈곤에 처해 있는 빈곤국가 주민들이 12억 명에 이르고 있으며, 분쟁과 갈등, 기상재해 등으로 고통받는 지구촌 이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다시 한번 화쟁의 참뜻을 헤아려 서로 용서하고 화합하면서 서로의 아픔을 보듬는 따듯한 세상이 되기를 기원하며, 온 국민과 불자 여러분들에게 부처님의 자비와 가피가 함께하시기를 서원합니다.
월주 스님
법주사로 출가해 1956년 금오 대선사를 계사로 비구계를 받은 후 화엄사 불교전문강원에서 대교과를 마쳤다. 제17대, 28대 대한불교조계종 총무원장을 역임했으며 1980년 4월부터 10월까지 종정 권한을 대행하였다. 현재는 금산사, 영화사 회주·조실을 지내고 있다. 사회복지법인 나눔의 집 이사장, (사)함께 일하는 재단 이사장, (사)지구촌공생회 이사장, 국민원로회의 위원(대통령 자문) 등 활발한 사회활동도 겸임하며 자비 나눔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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